교제의 신앙
(요일 1:1~4)
인간은 평생 홀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홀로 있게 하지 아니하시고 사람과 교제하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사람들을 위해 교회를 만드셨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성도들끼리의 좋은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토레이 신부는 한국 교회는 가르칠 교회가 아니라 교제할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매일 고백하는 사도신경에서도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라는 구절이 들어가 있습니다. 목사님들이 예배 때마다 하는 축도에도 성령의 교통하심이 들어가 있습니다. 성도의 교통과 교제를 가능케 하는 분은 오직 성령님뿐이십니다. 따라서 성도는 교제를 성령께 위탁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교제가 성령님의 교제가 되지 못하면 교제의 어긋남이 일어납니다. 교회에 오면 성도의 교제가 거룩한 교제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세속적인 교제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끔 성도들이 교제를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교제를 세속적인 오락이나 파티나 세속적인 비즈니스로 오해합니다. 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멤버쉽이 아니라 펠로우쉽입니다. 성도의 교제가 거룩한 교제가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성도 간의 사귐을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사귐이 먼저입니다. 인간은 본래부터 하나님과의 교제로 지음받았습니다. 요일 1:3에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인격주의 철학자인 마틴 부버의 ‘너와 나’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인간이 나와 너의 인격적 교제를 가지려면 먼저 영원자 너를 만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신 영원자 너와 만나지 않으면 나와 너의 만남은 불완전한 만남이 됩니다. 성도들의 만남을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필요합니다. 현대 사회는 고령화 사회입니다. 백 세 시대입니다. 인생의 남은 시간을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냥 의미 없이 살면 오래 살지만 사실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에녹은 인생의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남은 여생을 하나님과 동행해야 의미 있는 생애를 보내게 됩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친구처럼 지내는 것입니다.
둘째, 말씀을 통한 교제이어야 합니다. 요일 1:1~3에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요한 사도는 우리가 들은 바를 너희에게 전함은 너희와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라고 규정합니다. 요한은 여기서 교제에 대해서 기존의 개념을 뒤집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이유는 참다운 교제를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요일 1:1의 말씀을 한 번 되새겨봅니다. 생명의 말씀을 우리가 듣고, 보고, 만진 바라고 했습니다. 시청각에 촉을 더해 시청촉이 되었습니다. 만진 바는 촉인데 경험을 의미합니다. 말씀을 통해 신앙경험에 대한 간증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모든 부서에서 말씀의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말씀의 교제가 모든 선교회에서 있어야 되고 모든 위원회에서도 말씀의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매주 모이는 속회도 말씀의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말씀의 QT를 나누는 것이 진정한 교제입니다. 요일 1:4에서 보듯이 말씀의 교제는 기쁨이 충만합니다.
셋째, 예수 체험을 통한 교제이어야 합니다. 이것에 대해 요일 1:5~7에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7절에 보면 사귐이 있는데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요한 사도는 하나님에 대하여 하나님은 빛이시다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사귀려면 우리가 어두움에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어두움에 거합니다. 이것에 대해 이사야 59:1~2에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어두움에 나와 빛 가운데로 나올 수 있을까요? 어두운 죄가 요일 1:7에서 예수로 깨끗케 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체험으로 죄에서 빛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죄 용서 받고 거듭나면 하나님과도 교제할 수 있고 성도와도 교제할 수 있습니다. 교제의 근거는 예수 체험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만나야 성도의 진정한 교제가 가능합니다. 본 회퍼는 참된 교제는 예수 체험을 근거로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시편 133:1~3에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1절에 형제들이 연합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도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내가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의 교제 속에 예수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본 회퍼는 그의 책 ‘성도의 공동생활’에서 성도의 교제는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서로를 위해 중보기도 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서로가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속적 교제가 아니라 기독교적 교제이며 영적교제입니다. 이무쪼록 기독교인이면 기독교인다운 영적 교제를 나누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