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DC의 오후(afternoon)
내 기억으로는 이날 오전부터 그 유명한 공포의 벌금제도가 시행된 것 같았다. 2년전에도 해외수양회를 가질 때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내린 피치 못할 조치였다. 이번 여행에서는 1분에 1달러의 벌금이 정해졌다. 지난 유럽 수양회에서는 현지 선교사와 한 교회를 돕는데 유익하게 쓰여 졌던 벌금이었다. 이번에도 그런 아름다운 쓰임이 있는 벌금이 되리라 기대하면서 이제부터 벌금과의 싸움이 우리 여행에 끼어 들게 되었다. “누가 벌금을 걷는가?”는 의논할 필요도 없이 안식년으로 미국에서 체류중이신 이천휘 목사님께서 또 한번(2004년에 이어서)의 악역(?)을 친히 맡으시겠다고 나서셨다. 이제부턴 '자나 깨나 벌금 조심!’
밥을 맛있게 먹었지만 차를 타고 앉으니 눈이 저절로 감겨왔다. 시차도 시차지만 식사를 통한 포만감이 밀려들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가이드의 설명도 그냥 자장가로 들리는 듯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백악관이었다. 미국 대통령의 관저로 알려진 백악관은 워싱턴D.C. 펜실베이니아가에 위치하고 있으며 1800년 제2대 대통령 J.애덤스 때 완성되어 1814년 대영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재건 후 외벽을 하얗게 칠한 데서 지금의 화이트 하우스라는 명칭을 얻었고 제26대 대통령인 테오도르 루스벨트 때 정식 명칭이 되었다.
대통령은 가족과 함께 백악관의 2층에서 살고 있으며 대통령집무실은 타원형이어서 오벌 룸(Oval Room)이라 부른다. 방문객을 대부분 이 방에서 접견하고, 방의 수는 130개가 넘고 댄스파티와 리셉션 등이 열리는 동관(East Wing)을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다고 한다.
빌 클린턴이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을 때 고등학교 시절 보이스카웃의 일원으로 백악관을 방문하여 J F 케네디 대통령과 악수하는 사진을 신문에서 본 일이 있었다. 빌 클린턴은 부모의 이혼과 재혼 때문에 불행한 유년시절을 보냈던 자신이 백악관을 방문하여 케네디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는 그 순간 나도 케네디와 같은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다는 꿈을 가졌다고 말했다. 우리 학생들에게도 청와대가 개방되어 대통령을 접견할 수 있는 그런 프로그램이 있게 된다면 많은 학생들에게 위대한 비전을 심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우리가 간 곳은 백악관 정면이 아니라 뒤편으로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많은 관광객들로 북적거렸다.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 사이로 정복을 입은 결찰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청와대를 생각하면 늘 국민들과 격리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국민들과 가까이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가이드가 백악관 앞에서 25년을 혼자 데모를 하고 있는 피시노브라는 한 할머니를 소개해주었다. 그 할머니는 허술한 천막을 치고 앉아서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온갖 피켓을 세워놓고 반핵과 반전을 소리 없이 외치고 있었다. 이제 유명인사가 된 그녀의 주위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둘러서서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우리 일행 가운데서 홍성문 목사님께서 할머니를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사진에 담을 수 있었다.
그녀는 미국의 정책과 대통령에 대한 강력하고도 집요한 1인 시위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언론에도 기사화 된 바 있는 올해 62세의 피시노브여사는 스페인 출신의 여성으로서 25년동안이나 백악관 집무실을 바라보면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24시간 침묵시위 중이라고 한다. 이젠 국제적으로 유명하여 펜클럽도 있고 후원자도 생겼지만 그 때문에 가정을 잃는 아픔도 겪었다고 한다. 그녀가 세워놓고 있는 피켓 가운데는 한글로 씌여진 ‘한국은 곧 통일 됩니다’란 피켓이 눈에 확 띄었다. 혹시 한국 관광객들이 많기 때문에 한국인들의 관심을 끌려는 의도는 아니었을까?
재미있는 것은 백악관 앞에서는 절대로 누워서 시위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녀는 앉은 채로 잠을 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그녀의 삶의 여정을 나타내듯이 그녀는 나이보다 훨씬 더 늙어보였고, 연약해 보였다. 우리가 한국인임을 알아보고는 한국 신문에 자신이 소개된 기사를 복사한 종이 한 장을 내밀며 후원을 하라고 했다. 그 종이 한 장의 값은 1달러였다. 그녀의 신념을 높이 사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사람이 자기의 신념을 표시하는 것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음식을 먹지 않으며 투쟁하는 단식투쟁부터, 자신의 몸에 불을 질러 태우는 분신, 건물 옥상에 올라가 뛰어내리는 투신, 가끔은 한강 다리 위에 올라가 교통을 혼잡하게 하는 협박용 시위도 있다.
특별히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사표시는 극단적인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그 모든 방법들을 생각하기 전에 가장 먼저 자신을 살피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공자는 수신제가치국 평천하라고 했다. 큰 뜻을 펼치기 위해서는 작은 일에 대한 성실한 지킴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뜻일 게다. 그녀가 신앙인인지는 알수 없지만 자신의 가정과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뜻에 대한 고민 없이 쉽게(물론 쉽지 않았겠지만 상식적으로 생각을 한다면) 가정과 목숨을 버리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니다.
나는 모든 일에는 기본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기본 없이 세워진 것들은 언제든지 쉽게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가정은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기초 가운데 하나고,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신앙 또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토대가 아닌가?
그녀에게 가정보다 자신의 신념을 표현하는 반전,반핵 운동이 더 소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가진 생각으로는 가정을 지키면서도 그녀가 자신의 신념을 표현할 수 있는 지혜가 부족했다고 생각해본다. 그녀가 그 시위를 통해서 어떤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또 그녀가 그 운동을 통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유엔본부가 있는 뉴욕에는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그녀 못지 않게 일하고 있는 수없이 많은 반핵운동자들이 있다.
몇 년후 그녀가 자신이 하던 일을 평화를 위해서 노력하는 단체에게 맡기고 자신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다는 그런 뉴스를 들을 수 있을지 한번 기대해 본다.
사람들은 네 잎클로버를 찾기 위해서 세 잎 클로버를 마구 밟고 다닌다. 행운을 찾기 위해서 꽃말이 행복인 세 잎 클로버를 밟는 것이다. 사람들은 특별한 것을 얻기 위해서 일상의 행복과 소중함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백악관을 빠져 나오면서 우리는 백악관에서 가장 가까운 교회로 알려진 ST Johns church를 지나갔다. 사진을 보니 감독파의 개신교회였다. 'Protestant Episcopal' 성공회 전통에 속한 교회로서 감독파 교회는 Bishop, priests, decons의 전통을 갖고 있는 교회이다. 역시 감리교와 비슷하지 않은가? 감독, 정회원 목사, 준회원 목사(전도사)! 게시판을 확대해 보니 오전 7:45분과 10:30분에 두 번의 성찬(Eucharist)이 있는 예배를 주일에 드린다고 했다.
국회의사당
우리 일행의 발걸음은 미국 국회의사당으로 이어졌다. 국회의사당 건물은 내셔널 몰(Nation mall)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의 국회의사당 근처에 여의도 공원이 있다면 워싱턴DC에는 내셔널 몰이 있다. Mall이란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는데 일종의 공원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면 될 것 같았다. 워싱턴DC는 이 Mall을 중심으로 7개의 기념관과 박물관들이 넓게 퍼져 있는 것이다. 실제로 내셔널 몰의 지도를 보신 분들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국회 의사당은 '캐피톨(The Capitol)'이라고 불린다. D.C.의 캐피톨 언덕에 있는 국회 의사당은 높이 94m, 길이 약 250m의 대형 건축물이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물 중의 하나로 의사당의 돔은 마치 건물이 왕관을 쓰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건물의 초석은 1793년 조지 워싱턴이 세웠고, 링턴 때 지금의 모습으로 형태를 갖추었는데 약 60년정도의 건축기간을 가졌다고 한다. 가이드는 워싱턴 자체가 약 100년에 걸쳐서 형성된 도시라고 했으니 놀랄 일도 아니다. 독일에 갔을 때 유명한 퀼른 대성당의 경우는 수백년에 걸쳐서 짓고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도 순식간에 지었다가 허무는 건물이 아닌 역사의 증거가 되는 건물(교회도)을 짓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의사당을 임기 6년의 상원(좌측)과 임기 2년의 하원(우측)이 함께 사용하고 있다. 미국 국회에 재미있는 것 가운데 하나는 각 주마다 상원의원을 2명씩 선출한다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기도 하다. 인구를 비례해서 대통령 선거인단이나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하원과 달리 왜 상원은 각 주마다 공평하게 2명씩을 선출하는 것일까?
가이드는 그것이 미국이 독립 때부터 각 주의 대표성을 공평하게 인정하는 전통이라고 했다. 어느 주 하나도 국가적인 결정을 함에 있어서 다수의 횡포에 희생당하지 않도록 하자는 뜻을 담고 있는 제도라고 했다. 국회 의사당의 정 중앙의 기둥의 높이는 약 77m이고, 그 꼭대기에 자유의 여인이 서 있다. 리버티 섬에 있는 자유의 여인(Liberty)과는 달리 이 여인의 모습은 인디언이고 공식적인 명칭도 ‘Statue of Freedom'이라고 했다. 그리고 기둥의 제일 아래 로돈다(Rotunda:돔아래 부분)의 벽에는 미국이 자랑하는 위인들과 콜롬부스의 신대륙 상륙, 독립선언 등의 미국역사에 대해 그린 유화가 전시되고 있다. 국회의사당 앞쪽에는 미국의 18대 대통령인 그란트 대통령의 동상이 서 있었고 그 앞쪽으로는 작은 호수가 있었다. 미국과 캐나다를 다니면서 도시 한 가운데 작은 인공적인 호수를 만들어 놓은 것을 보고는 좋은 생각이라고 느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인천에도 주민들이 숨쉴 수 있는 그런 공간들이 많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우리 일행은 국회의사당 안으로 들어가는 투어 대신에 의사당을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었고, 동주는 너무나 좋아하는(동주는 제복을 입은 사람들을 좋아한다.) 선 그라스를 낀 채 총을 들고 서 있는 군인과 기념촬영을 했다.
스미소니언 박물관
그리고 우리는 숨쉴 틈도 없이 그 유명한 스미소니언 박물관을 향해 출발했다. 스미소니언 박물관(Smithsonian Institution)은 영국인 과학자 제임스 스미손(James Smithson)의 기부금으로 1846년 설립된 종합박물관이다. 재미 있는 것은 스미손 그 자신은 미국에 온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1829년 그가 죽으면서 55만달러의 유산과 "인류의 지식을 넓히기 위한 시설을 워싱턴에 세우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고 후손들이 그의 유언을 신실하게 지킨 열매가 오늘날의 스미 소니언 박물관이었다. 우리나라의 박물관 하면 한 채의 건물을 생각하겠지만 스미소니언 박물관은 여러 개의 다양한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총 16개의 박물관과 갤러리, 동물원, 리서치 센터가 있으며 리서치 센터는 오후 5:30분까지만 운영된다.
박물관에는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의 수공예품과 각 분야의 수많은 견본들이 전시되고 있다. 그 가운데에는 라이트 형제와 린드버그의 비행기, 달착륙선 등이 전시되어 있는 항공·우주관(National Air And Spa Ce Museum)과 미국의 오늘을 만든 많은 발명품과 대통령 부인들의 특수목적의 의복 등이 전시되어 있는 역사·기술관 (Museum Of History And Technology), 자연사 박물관(Natural history Museum)등이 유명하다. 얼마 전에 타계한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며 권위자인 백남준씨의 작품도 이 박물관에 전시될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독립기념일인 오는 7월 4일 스미소니언박물관 내 현대미국미술 전시관 입구에 전시될 예정인 작품은 ‘US 맵(map)’과 ‘메가트론 매트릭스(Megatron/Matrix) 두 개의 작품이다. 후에 다시 이 박물관을 찾을 기회가 있다면 꼭 들러보아야 할 것이다.
항공우주박물관
원래 이 항공 우주 박물관은 1946년, 국립항공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됐었다가, 1976년 대대적인 시설 확충과 함께 현재의 모습으로 개장된 세계 최대의 항공역사박물관이라고 한다. 사실 나는 항공우주에 대한 흥미가 별로 없었다. 과학에 별 다른 흥미를 갖지 못한데다가 좀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주는 굉장한 관심을 보이면서 자기가 갖고 있는 호기심을 엉뚱한 질문으로 쏟아 놓기 시작했다. 나를 가장 허탈하게 만든 질문은 아폴로 앞에서 ‘왜 달나라에 갔는데?’였다. 생각해 보니 적당하게 대답할 말이 없는 질문이었다.
박물관 내부 자체가 어린아이들에게는 정말 흥미로운 곳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수많은 어린 학생들이 부모들과 함께 전시관 안에는 가득했다. 아이들 대부분이 비행기를 조립해 보았거나 적어도 한 두 개쯤의 자신의 장난감 비행기를 소유하고 있으니까 할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동주의 질문이 계속되었다. ‘우리가 타고 온 비행기는 여기 없어?’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를 보고는 ‘비행기가 자전거야? 왜 발로 밟아?’ ‘헬리곱터도 비행기 맞지?’ ‘하늘을 날면 비행기야’(이건 내 대답) ‘잠자리는? (묵묵부답) ‘그럼 새도 비행기야?’ 으~;;;
박물관은 한가지씩 설명을 듣고, 전시된 것들에 대한 내용을 자세하게 살피면서 보려면 족히 반나절은 걸릴만한 여러 개의 방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중에서 인상 깊었던 것 가운데 하나는 인류가 새처럼 날고자 하는 꿈을 현실로 만든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가 전시된 방이었다. 1층 입구에는 라이트 형제의 최초의 비행기인 '1903 플라이어(Flyer)'와 최초로 대서양을 횡단한 찰스 린드버그의 '스피릿 어브 세인트 루이스(Sprit of St. Louis)' 등이 전시되어있었다. 그래도 내가 동주와 함께 비교적 자세하게 살핀 곳은 아폴로 우주선에 대한 자료가 들어있는 방이었다.
미국은 소련(지금의 러시아)과의 우주경쟁에서 지고 말았다. 냉전시대에 체제 경쟁을 하던 미국과 러시아는 항공우주에 관한 영역에서도 다를 바가 없었다. 1961년 4월12일 소련은 보스토크 1호에 인류 최초의 우주인은 가가린(Gagarin, 1934-1968)을 태우고 1시간 29분만에 지구의 상공을 일주함으로서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에 성공하였다. 러시아의 스몰렌스크주에서 출생한 그는 오렌부르크의 항공학교를 졸업한 뒤 공군에 입대하여 우주비행사가 되었으며 우주에서 지구를 보며 "지구는 푸른빛 이었다"라고 한 말은 유명하다.
이에 자극을 받은(열받은)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5월25일 국가적인 급한 임무가 있다는 특별교서를 발표하고 1960년대가 끝날 때까지 달에 인간을 착륙시켰다가 무사히 지구로 귀환시킨다는 목표를 가진 아폴로 계획을 준비하게 한다. 이 계획 전체에는 무려 250억달러가 소요되었으며 11호부터 17호까지(13호는 제외) 모두 6번 달에 다녀오게 된다.
1969년 7월 16일 아폴로 11호는 N.A.암스트롱, E.E.올드린 2세 및 M.콜린스를 태우고 달을 향해 출발했다. 그리고 1969년 7월 21일. 오전 11시 56분 20초에 드디어 암스트롱과 올드린은 달의 '고요의 바다'에 착륙하는 데 성공하였고, 인류의 역사에 새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나도 초등학교(1,2학년)때 이 장면을 본 기억이 난다. 선장이었던 N.A.암스트롱은 달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나 한 사람이 내딛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 전체에 있어서는 위대한 발걸음이다." 그것이 국가간의 경쟁에서 비롯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일을 위해서 기꺼이 도전했던 수많은 우주인들의 도전정신이야 말로 미국의 정신임을 미국인들은 지금도 자부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케네디 대통령을 좋아하는 이유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우리 젊은이들도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아니 우리 목회자들도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새 역사를 위해서 도전해야 한다고 다짐해 본다. ‘아 도전하는 인생이 아름답다.’
그러나 이렇게 동주하고 샅샅이 살피면서 돌아다니다가 귀환 시간을 착각함으로서 드디어 벌금 2달러(아 벌금엔 미성년자 할인도 없었다.)를 내야 했다.^^*
자연사박물관
박물관 앞에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 화석이 전시되어 있었다. PETRIFIED WOOD라고 불리우는 애리조나에 있는 국립 PETRIFIED FOREST 공원 가까이에서 발견된 이 화석은 화석연대 측정으로 약 200억년 전의 나무라고 한다. 들고 왔으면 좋겠는데 방법이 없었다.^^*
이 박물관에 들어가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이제까지 발견된 세계최대의 아프리카 코끼리의 박제다. 이 앞에서 코끼리 코를 하고 사진을 찍는 분들도 있었다.
가이드는 2층에 있는 보석(광물) 전시관에 유명한 호프 다이아몬드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우리는 1층부터 차례로 둘러보기로 했다. 동주가 좋아하는 공룡 뼈가 가득한 곳으로 들어서자 동주의 눈이 커졌고 동시에 목소리도 커졌다. 적어도 공룡에 관한 한 이 녀석은 자기 아빠보다 훨씬 더 전문적이고 상세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한 뼈만 남은 놈을 가리키면서 ‘이 놈이 티라노 사우르스’라고 했다. 아이는 신이 나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 자연사 박물관은 주제별로 전시하면서도 동시에 시대별로 전시하고 있었다. 인류의 선조 가운데 하나라고 알려진 네안데르탈인의 생활 모습 가운데 매장문화를 볼 수 있었고 계속해서 1층을 돌면서 미국에 살던 원주민인 인디언들의 생활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 벽화들과 그들의 의복을 전시한 곳을 지나 인도의 문화적인 유산을 모형으로 만들어 놓은 곳 앞에서도 사진을 찍었다. "오늘날의 Darbar Sahib"이라고 적힌 명패는 시크교도들에게 있어서 황금 사원으로 알려져 있는데 ‘다르바르 사힙’이라는 말은 ‘알라’(Darbar Sahib)의 궁전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시크교도들은 이 궁전 안에는 영원한 평화가 있고 ‘알라’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가능성이 가득한 곳이라고 믿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1층의 한쪽으로 가서 동물들의 박제와 생활에 대한 비디오도 시청을 했다. 우리와 함께 많은 미국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메모를 하면서 주의 깊게 시청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최근에야 자연사 박물관이 생겼다고 한다. 물론 규모를 단번에 크게 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 어린이들이 우리나라의 자연에 대해서 깊이 알 수 있는 멋진 박물관들이 많이 생겨나기를 기대해 본다. 이 박물관 안에는 모두 5천만점에 달하는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고 하니 하루 종일 본다고 해도 다 못 볼 것 같아서 다른 전시관을 포기하고 ‘호프 다이아몬드’를 보기 위해서 2층으로 올라갔다. 호프 다이아몬드는 1640년 인도에서 발견된 44.5캐럿의 블루 다이아몬드 였다. 그러나 이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있던 주인이 이 보석으로 인해 차례차례로 불행한 운명을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행복이란 값비싼 보석을 소유하는 사람이 누리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다행인가? 보석을 사주지 못하는 내겐 아내 앞에서 기죽지 않을 수 있으니 말이다.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소장되고 있는 것은 타이타닉호에서 건져 올린 "Blue Diamond"로서 오랜 세월동안(약 10억년 이상) 만들어져 300년전에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후 이 보석을 소지한 모든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비국의 보석이라고 한다. 이 보석의 마지막 소유자는 1912년 1,513명의 사망자를 내고 북대서양으로 가라앉았던 초호화 여객선 타이타닉 호와 같이 바다에 수장되었다고 한다.
그 후 1986년 인양되어 주인을 찾다가 죽음을 더 이상 초래하지 말자는 취지에서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기탁되어 그 이름까지 "Blue Diamond"에서 "Hope Diamond"로 바꾸었다고 한다. 죽음의 다이아몬드가 희망을 주는 보석이 되다니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무슨 희망인가? 누가 뭐래도 이 세상의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1:1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사도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소망 그 자체였다. 예수님야 말로 인류의 소망되시는 보석이신 것이다. 보석은 그것 외에도 많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유난히 예쁜 목걸이들이 많았다. 한쪽에는 330캐럿의 ‘스타 오브 아시아’라고 불리는 스타사파이어도 전시되어 있었다.
지난 2005년도에 한국관이 생기기 전에 스미소니언박물관 1층 한쪽에 아시아 아프리카관에 약 8평 규모의 한국관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을 방문한 한국 사람들의 인상을 찌푸리게 만든 대표적인 사례였는데 유물이라고는 고작 33점 가량의 도자기가 전부였다는 것이다.
드디어 2005년 스미소니언 박물관은 구한말부터 현재까지의 유물 3천여점을 전시하는 약 50평 가량의 한국관을 마련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디 있었지? 호프에 눈이 팔려 한국관을 놓치다니....홈페이지를 찾아서 한국관(Korea gallary)을 검색해봤지만 열리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거의 대부분의 우리 일행들은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오늘은 거의 대부분 걸어서 관람하는 곳이 많았기 때문이다. 잠깐 눈을 붙였는가 싶었는데 다시 눈을 떠야 했다. 제퍼슨 기념관 앞에 버스는 도착해 있었다.
제퍼슨 기념관
제퍼슨은 미국의 제3대 대통령으로서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만든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버지니아주 출신으로서 1800년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804년 재선되었다. 그는 정치뿐만 아니라 철학·자연과학·건축학·농학·언어학 등에 재능을 갖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쳤으며 '몬티첼로의 성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몬티첼로는 그가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 돌아간 버지니아의 고향 마을이다. 그는 이곳에 버지니아 대학을 세우기도 하였다.
제퍼슨 기념관은 지붕이 이오니아식 돔 구조로 된 원형 건축물로 신고전 낭만주의 양식의 표본이다. 워싱턴을 대표하는 유명 건축물 중의 하나로 국립미술관을 만든 건축가인 존 러셀 포프(John Russell Pope)가 만들었다. 루즈벨트 대통령때 착공해 1943년에 완공되었다. 이 건물로 올라가면서 우리는 버찌를 먹을 수 있었다. 검은 빛깔의 잘 익은 버찌는 약간의 시장기를 느낀 나에게는 좋은 간식이 되었다. 알아보니 1912년에 일본인들이 약 3천 그루의 벛나무를 기증했고 그후 워싱턴 DC에는 4월 첫 주를 전후해서 벛꽃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사진으로 보니 올해 92주년이 되는 축제는 장관이었다. 그리고 제퍼슨 기념관 좌편과 정면으로 인공적으로 만든 큰 호수가 보였는데 그것을 ‘Tidal vasin'이라고 한다. 그리고 호수 저편으로 오벨리스크가 선명하게 보였다. 건물 안에는 대륙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는 제퍼슨의 동상이 있다. 벽면에는 그의 정치적인 철학과 신앙심을 볼 수 있는 글을 새겨 놓았고 한쪽에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이런 글귀였다. “WE HOLD THESE TRUTHS TO BE SELF-EVIDENT : THAT ALL MEN ARE EQUAL." 결국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생각은 노예를 해방한 링컨 대통령만의 생각이 아니라 미국을 세운 조상들의 생각을 실천한 것이다.
제퍼슨은 특별히 깊은 통찰력을 보여주는 명언을 남긴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의 명언 가운데는 ‘나는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는 말이 있다. 언론의 자유야 말로 민주주의의 기초라고 철저하게 믿었던 그의 신념을 볼 수 있다.
그의 명언록에서 감동을 받은 한마디를 소개한다.
“전기불이 나간 어두운 방안에서 초가 있으면서도 초를 아끼며 켜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마찬가지로 한두 마디의 상냥한 말이면 상대방의 마음을 밝게 해주고 유쾌한 분위기를 만들 수 있는데 그러치 않는다면 그것은 마치 초를 아끼기 위해 어둠 속에 있는 것과 같다. 한 마디의 말이 날카로운 칼이 되기도 하고 혹은 솜처럼 따뜻하고 부드럽기도 하다.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는 우리의 마음에 달려 있다”
이 제퍼슨 기념관은 그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졌다고 하니 1943년에 세워졌다. 제퍼슨기념관은 로마의 신전 판테온과 비슷한 여러 개의 이오니아 양식의 원기둥이 돔형의 둥근 건물을 바치고 있다. 이 동상을 제대로 보려면 동산의 정면이 아니라 뒤편 옷자락 밑을 보면 그의 업적을 기록한 글들이 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것을 놓치고 만다.
제퍼슨의 동상은 국회의사당을 쳐다보고 있다고 했다. 국회의원들의 뒷통수가 좀 따끔하리라 생각해 본다. 지각하지 않으려고 버스로 부지런히 가는 우리들에게 감리사님께서 아이스크림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셨다. 덕분에 아이스크림 장사군은 횡재(?)를 했다.
한국전쟁 참전 기념비
가이드가 우리를 링컨대통령 기념관으로 인도하면서 제퍼슨 대통령에 대한 뉴스를 한가지 전해주었다. 나도 언젠가 본 일이 있는 듯했는데 미국의 어떤 흑인들이 자신들도 제퍼슨 대통령의 자손이라는 주장을 해서 유전자 검사를 해보니 14명 가운데 6명의 유전자가 제퍼슨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이야기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로서 1853년에 이미 윌리엄 웰스 브라운 이라는 사람이 “클로텔, 대통령의 딸‘이라는 제목으로 제퍼슨 대통령이 흑인 노예와의 사이에 사생아를 낳았다는 설을 근거로 해서 소설적으로 구성한 픽션 르포를 쓴 일이 있었는데 이것이 1998년 영국의 네이처지가 허밍스라는 가족을 대상으로 유전자 검사를 한 결과 제퍼슨의 유전자와 일치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빌 클린턴도 막판에 참 추했는데, 아무튼 남자들이여 여자를 조심하고 또 조심할지어다.
가이드는 링컨 기념관 아래 한국전쟁 참전 기념비가 있다고 했다. 당연히 우리 일행은 참전비를 보고 링컨을 보기로 했다. 누가 뭐래도 한국전쟁이라면 바로 우리들의 역사가 아니겠는가? 미국의 수도 워싱턴DC 그것도 링컨 기념관 아래에 연합군의 한국전쟁 참전을 기념하고 있는 기념비가 있다는 사실에 왜그랬는지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우리들에게는 잊혀져가고 있는 한국전쟁을 미국 사람들이 기억한다는 사실에 약간의 고마움도 깃들었다.
링컨 기념관 옆쪽으로 자리 잡고 있는 이 참전비는 판초를 입은 19명의 용사들이 M1 소총을 메고 혹은 무전기를 들고, 승리의 V자 대열로 앞으로 행진하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만들어진 조각상(?)들은 실제의 사람보다 조금 더 큰 스테인리스로 만든 동상이었다. 그 동상을 감싸고 있는 검은 색이 전쟁의 비극을 생각하게 한다. 그 행렬 오른쪽에 길이 49미터의 검정색 대리석 벽에 2천5백여 명의 참전 용사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검정 대리석에 그 19명이 거울처럼 비치면 38명이 되어서 38선을 상징하고 있다.
1995년 7.27에 자유 우방을 위해서 엄청난 피를 흘리고도 잊혀져가는 것이 안타까워서 전쟁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것이다. 그 오른쪽에는 참전 16개 나라들의 이름을 대리석 위에 길게 새겨 놓았다. 6.25전쟁으로 미군 54,246명의 사망자와 부상자 103,284명 실종자 7,140명의 희생과 628,833명의 유엔군의 희생이 있었다. 참전비가 시작되는 앞부분 바닥에는 참전용사들을 기리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그들은 알지 못하는 나라와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국가의 부름에 응답한 국가의 영웅들이라’는 내용이다.
늦게나마 이런 참전비가 세워지고 한국전쟁의 의미가 조명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지나치게 이념편향적인 태도로 인하여 우리나라의 역사와 거기에 쏟은 희생을 과소평가 하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았다.
나로 하여금 깊은 묵상을 하게 만든 검은색으로 된 참전비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 “Freedom is not free" 자유란 결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미국이라는 나라가 내게 결코 좋은 이미지를 주는 나라는 아니지만 6.25전쟁 발발 56주년을 맞아 그들이 이 땅에 흘린 피의 의미가 이념 때문에 가리워지지 않고, 또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자유의 소중한 가치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님을 기억하는 6월이 되기를 바란다.
동시에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자유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값진 희생을 통해 주어졌음을 기억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되어야 하리라고 다짐해 본다.
히 10:19-20절이다.“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그렇다 우리의 삶의 하루 하루가 주님의 몸을 밟고 사는 것이다. 그분이 흘린 보혈의 길을 따라 살아가는 삶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이 얼마나 귀중한가? 그래서 바울은 갈 5:1절에서 이렇게 당부하고 있다.“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링컨 기념관
링컨 기념관으로 올라가면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라는 노래가 생각이 났다. 자유란 값진 가치는 늘 피흘림의 희생을 요구한 것 같다. 링컨의 노예해방 또한 남북전쟁이라는 미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내전을 통하여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동주가 다리가 아픈지 업어달라고 했다. 사진을 찍어도 찡그린 표정을 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꼬맹이에게 오늘 일정은 대단히 힘이 들었을 것이다. 목말을 태워서 힘이 더 들었지만 그래도 오늘 일정의 마지막을 잘 장식하고 싶었다.
링컨 기념관은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을 기념하고 '인간 정신이 갖고 있는 관용과 지조 및 정직의 미덕'을 기리기 위해 워싱턴 D. C.에 세운 기념관이다. 헨리 베이컨이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을 본떠 설계한 이 기념관은 콜로라도산 대리석으로 만든 36개의 기둥(각 기둥의 높이 13.4m)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 기둥은 링컨 시대에 미국 연방을 이루었던 36개 주를 상징한다. 조지아산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 테네시산 대리석 대좌에 앉혀놓은 거대한 링컨 좌상(높이 5.8m)은 다니엘 체스터 프렌치가 디자인하고 뉴욕의 피치릴리 형제가 조각한 작품이다. 이 상은 기념관 내부를 위압하면서 연못 너머 워싱턴 기념관과 국회의사당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기념관 남쪽 벽에는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이 새겨져 있고, 북쪽 벽에는 그의 재임 취임사가 새겨져 있다. 위에는 '재통일과 전진' 및 '인종 해방'을 표현한 쥘 게랭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1915년에 짓기 시작해 1922년 5월 30일 전몰장병기념일에 문을 열었다
그리고 기둥위로 보이는 위쪽은 1922년 완공을 기리며 미국 48개주의 이름이 새겨진 프리즈(조각을 한 소벽)로 꾸며져 있다. 그렇다면 현재의 50개주에서 빠진 두 개주는 어떻게 했을까? 링컨 기념관 앞쪽의 바닥에 알라스카와 하와이가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그들의 운명을 전적으로(온전히) 미합중국과 연합하여 미국의 주가 되었다.” 왜 지역주의가 없겠는가? 그러나 나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놀란다. 이라크 침공이 결정되고 시도되었을 때 여야 없이 모든 사람들이 미국민이 되는 것을 보았다. 국가적인 위기 앞에서 힘을 합하는 미국을 보는 것이다. 우리나라를 생각해 보면 답답해지는 것은 왜일까? 우리 국민들의 의식이 미국 이상으로 더 성숙하게 될것이다.
계단 맨위에는 높이가 19피트(1feet는 30.48cm)나 되는 제16대 대통령 링컨의 거대한 석상이 기념관안 중앙의자에 앉아 있고, 동쪽과 서쪽 벽에는 유명한 게티스버그 연설의 내용이 새겨져 있다. 여기에 그 전문을 싣는다.
Four score and seven years ago our fathers brought forth on this continent a new nation, conceived in liberty, and dedicated to the proposition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Now we are engaged in a great civil war, testing whether that nation, or any nation so conceived and so dedicated, can long endure. We are met on a great battlefield of that war. We have come to dedicate a portion of that field as a final resting place for those who here gave their lives that that nation might live. It is altogether fitting and proper that we should do this. But, in a larger sense, we cannot dedicate-we cannot consecrate-we cannot hallow-this ground. The brave men, living and dead, who struggled here, have consecrated it far above our poor power to add or detract. The world will little note nor long remember what we say here, but it can never forget what they did here. It is for us the living, rather, to be dedicated here to the unfinished work which they who fought here have thus far so nobly advanced. It is rather for us to be here dedicated to the great task remaining before us-that from these honored dead we take increased devotion to that cause for which they gave the last full measure of devotion-that we here highly resolve that these dead shall not have died in vain-that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지금으로부터 87년 전 우리의 선조들은 이 대륙에서 자유 속에 잉태되고, 만인은 모두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명제에 봉헌된 한 새로운 나라를 탄생시켰습니다. 우리는 지금 거대한 내전에 휩싸여 있고 우리 선조들 이 세운 나라가, 아니 그렇게 잉태되고 그렇게 봉헌된 어떤 나라가, 과연 이 지상에 오랫동안 존재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 받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모인 이 자리는 남군과 북군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졌던 곳입니다. 우리는 이 나라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에게 마지막 안식처가 될 수 있도록 그 싸움터의 땅 한 부분을 헌납하고자 여기 왔습니다. 우리의 이 행위는 너무도 당연하고 적절한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의미에서, 이 땅을 봉헌하고 축성하며 신성하게 하는 자는 우리가 아닙니다. 여기 목숨 바쳐 싸웠던 그 용감한 사람들, 전사자 혹은 생존자 들이, 이미 이곳을 신성한 땅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거기 더 보태고 뺄 것 이 없습니다.
세계는 오늘 우리가 여기 모여 무슨 말을 했는가를 별로 주목하지도, 오래 기억하지도 않겠지만 그 용감한 사람 들이 여기서 수행한 일이 어떤 것이었던가는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싸워서 그토록 고결하게 전진시킨, 그러나 미완으로 남긴 일을 수행하는 데 헌납되어야 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들 살아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 앞에 남겨진 그 미완의 큰 과업을 다하기 위해 지금 여기 이곳에 바쳐져야 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입니다.
우리는 그 명예롭게 죽어간 이들로부터 더 큰 헌신의 힘을 얻어 그들이 마지막 신명을 다 바쳐 지키고자 한 대의에 우리 자신을 봉헌하고, 그들이 헛되이 죽어가지 않았다는 것을 굳게굳게 다짐합니다. 신의 가호 아래 이 나라는 새로운 자유의 탄생을 보게 될 것이며,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이 지구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헨리 베이컨이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을 본떠 설계한 이 기념관은 콜로라도산 대리석으로 만든 36개의 기둥(각 기둥의 높이 13.4m)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 기둥은 링컨 시대에 미국 연방을 이루었던 36개 주를 상징한다. 조지아산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 테네시산 대리석 대좌에 앉혀놓은 거대한 링컨 좌상(높이 5.8m)은 다니엘 체스터 프렌치가 디자인하고 뉴욕의 피치릴리 형제가 조각한 작품이다. 이 상은 기념관 내부를 위압하면서 연못 너머 워싱턴 기념관과 국회의사당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기념관 남쪽 벽에는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이 새겨져 있고, 북쪽 벽에는 그의 재임 취임사가 새겨져 있다. 위에는 '재통일과 전진' 및 '인종 해방'을 표현한 쥘 게랭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1915년에 짓기 시작해 1922년 5월 30일 전몰장병기념일에 문을 열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거대한 링컨상은 다니엘 프렌치가 대리석 28덩어리로 4년의 세월을 들여 조각한 것이다. 링컨 동상은 워싱톤 기념탑과 국회 의사당의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그리고 북쪽과 남쪽벽으로는 두개의 커다란 벽화가 보인다. 노예해방선언을 주창했던 대통령을 기리는 곳에 어울리게 미국역사에서 기록될만한 시민운동행사가 열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마틴 루터킹의 연설이다. 링컨기념관 오르는 계단에 마틴 루터 킹 목사의 “I Have a Dream(나는 꿈을 가졌다)”이라는 마틴루터 킹 목사의 유명한 설교의 제목이 새겨져 있다. 1963년 링컨기념관 층계에서 25만 관중에게 마틴루터 킹 목사가 한 연설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그의 꿈은 모든 인종과 피부색이 다른 모든 국민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미국에서 함께 나누는 것이었다. 35세의 젊은 나이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인권 운동가 킹 목사는 월남전을 반대하다가 1968년4월4일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흑인 청소부들의 파업을 돕다가 링컨대통령처럼 발코니에서 암살되어 삶을 마감한다. 미국은 그를 기려 그의 생일인 1월 15일에 가까운 1 월의 세 번째 월요일을 공휴일로 정하고 있다.
링컨 기념관 안의 작은 규모의 전시관에서 링컨의 일생에 대한 자료들을 관람할 수 있다. 링컨은 9세 때 어머니를 잃었으나 계모에 의해 독학으로 변호사가 되었고 주 의회 의원, 하원의원에 당선된 웅변가다. "갈려서 싸우는 집은 설 수가 없다. 나는 이 정부가 반은 노예. 반은 자유의 상태에서 영구히 계속될 수 없다고 믿는다."는 유명한 말도 유명하지만 게티즈버그 묘지 설립 기념식에서 한 행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불멸의 연설은 세계인의 모두가 기억하고 있는 명연설이 되었다. 링컨 기념관 앞에는 직사각형으로 만들어진 호수가 있다. 이 호수는 포레스트 검프라는 영화의 배경이 되어 잘 알려져 있는데 검프가 이 물속으로 뛰어들어 여자친구 제니를 만나는 장면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링컨 기념관의 계단은 ‘사선에서’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르네 루소와 함께 앉아 있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기념관 속의 링컨은 마치 일직선상에 놓인 작은 호수를 넘어 오벨리스크와 그 뒤의 국회의사당을 근엄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는 듯하다. 이래저래 미국의 국회의원들은 앞통수와 뒷통수가 다 뜨겁겠다 생각하며 웃었다.
링컨은 남북전쟁이 남군의 항복으로 끝난 2일 후 워싱턴의 포드 극장에서 관람 중 남부인 존 윌크스 부스라는 사람에 의해서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모든 일정을 마쳤을 때 괘 힘든 하루였음을 모두가 느끼는 듯했다. 식당까지 이동하면서 동주는 이미 잠이 들어버렸다. 하긴 오늘 하루 걸어다닌 거리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이 친구는 저녁도 먹지 못하고 잠이 들었고 식당에서는 아이를 위해서 밥, 국, 반찬을 별도로 정성껏 싸주었다. 하지만 동주가 잠을 깨어 먹을 것을 찾는 것은 어려워보였다.
아마도 내일 새벽 피곤한 우리를 가장 먼저 깨우게 될 것이라는 불안한 예상을 해야만 했다. 저녁식사를 참 맛있게 했다. 특별히 상추는 얼마나 크던지 3번을 쪼개어 쌈을 먹을 만큼 컸다. 그러나 그 상추 특유의 고소함은 없었다. 먹거리 만큼은 국산이 최고다.
지친 몸을 씻고 자리에 누워 쉬면서 오늘 하루 가운데 내게 잊혀지지 않은 한 장면을 떠올렸다. 홀로코스트 Rememberance Hall에 있던 꺼지지 않는 불 위의 벽에 새겨진 신명기의 말씀이었다.
“Only be careful, and watch yourselves closely so that you do not forget the things your eyes have seen or let them slip from your heart as long as you live. Teach them to your children and to their children after them.”(NIV)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신4: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