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에 가면 널찍한 공간에 아기자기한 건물이 들어서 아이들 술래잡기에 꼭 좋을 듯도 합니다.
평생토록 한 남자를 사랑했던 여인의 지극한 정성으로, 요정에서 청정한 절간으로 옮겨 간 길상사, 그렇지요. 상서롭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고즈넉한 분위기가 향기롭지요. 박경리 선생의 [토지]에서는 여주인공 서희의 남편이 길상이고요.
김영한보살의 시주 덕분에 그의 사랑 백석 시인도 어쩌면 이념의 굴레를 벗고 우리에게 다가왔을 겁니다.
섭벌같이 나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도라지꽃이 필 무렵, 돌무덤으로 어린 딸을 보낸 어미의 심정이 절절하지만 그건 한 번 걸러진 감정일 겁니다. 아무래도 객관적이니까요. 그렇다고 가슴 무너지지 않는 구절은 아니지만요. 수업시간에 어떤 학생이 울면서 외우던 단락이었으니까요.
백석의 <여승>이 객관적 상실을 그려낸 것에 비해 세 살 먹은 딸을 놓친 다산 정약용선생, 그 절절함으로 아이의 행장을 쓰다니. 가슴을 치도록 쓰리고 아픈 글입니다.
<자장가>라도 불러줄 수 있다면, 일찍 떠난 딸아이를 기렸을까요.
꽤 한참 전 여름방학에 [다산 산문집]을 손에 잡았습니다. 이리저리 뒤적거리다 한 꼭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다산선생은 차를 좋아하셨지만 자식 두는 데도 남에게 뒤지지 않으셨는지 그 또한 다산(多産(다산))이셨나봅니다. 아들 딸 합쳐 아홉이나 낳으셨지만 중간에 많이 잃어 겨우 셋만 키우셨다지요.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 긴 나날 홀로 보내시는 와중에 막내딸이 세상 떠났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그 어린 딸을 위해 행장(行狀(행장))을 쓰신 글입니다.
세 살 먹은 딸은 아버지가 무엇 때문에 떠나야하는지 알지 못한 채 ‘아버지 언제 돌아오실 거냐?’고 물었다지요. 그게 아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과의 마지막 대화였을 겁니다.
얼마 전 어떤 어린이 집에서 부모를 위한 오리엔테이션에 짧은 강의요청이 왔습니다.
뭐 대단하게 할 말이 있을까요, 첫 마디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치원에 갈 수도 없이 어린 아이들, 그런데 이 나이를 옛날 어른들은 인화초(人(인)花(화)草(초))라고 하셨지요. 꽃 같은 나이란 말이지요. 그런데 이 인화초들의 직업은 ‘말썽부리기’입니다. 그러니 부모들은 남의 직업 가지고 이러저러한 불평은 삼가셔야합니다. 좌중이 와르르했지만 ‘인화초’라는 말을 처음 들은 젊은 부모들은 한 편으로 감탄하는 눈치였습니다. 쉽게는 ‘이쁜 세 살, 미운 일곱 살’이라고도 하지요.
그 이쁜 세 살, 더군다나 종알종알 말 잘하는 계집아이는 쳐다보기도 아까운 때인데 그 어린 것이 귀양이 풀려 집에 가도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곳으로 갔다니 그 심정을 뭘로 표현할까요.
지겹게 더운 날씨, 거기에 꼭대기 층이라 열기 쏟아지는 그 여름, 방바닥으로 내려앉아 두 다리 뻗고 엉엉 소리 내며 울었습니다. 안 울면 어쩌란 말입니까?
그 애기도 돌무덤으로 갔을까요? 아홉이나 낳아 자그마치 여섯을 놓친 다산의 아내 심정을 도대체 어떻게 짐작을 하란 말인가요. 언제 올지 모를, 남편도 없는 상황에서 점잖게 말해 참척을 당한 그 가슴을 말입니다. 누가, 무슨 말로 위로한들 그 마음이 어떨지 사는 게 죽음이었을 겁니다.
훌륭한 인물이 세상 뜨면 당대의 명문장가들이 다투어 떠난 인물의 행적이나 공로를 적어 바치는 글이 행장이건만, 다산에게 그 어린 딸은 어떤 훌륭한 사람보다 뼈아프게 사랑스러운 존재였고 그러기에 막내딸 잃은 아픔을 관한 행장 형식으로 쓴 것이겠지요. 막막한 귀양처에서 다산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글 쓰는 사람으로 무너진 온 가슴으로 한 글자씩 써내려간 행장, 세상에서 가장 슬픈 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진도 앞바다에서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는 자식들 기다리는 부모의 마음 생각하면 <자장가> 조차도 부를 수 없겠지만. 그래도 꼭 들어야한다면 부모 마음으로 그것 말고 달리 무슨 노래를 생각할까요.
작년 이맘 때 아이 놓친 어미들의 통곡이 하늘에 사무칩니다. 그 어미, 아비들이 살아있는 걸까요? 작년부터 느닷없이 닥친 가려움증에 간밤에도 자다 깨어 항히스타민제를 삼키고 겨우 눈을 붙였습니다.
그 어린 것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아무 것도 없는 걸지요.
슬프고 아프면 차라리 아픔에 몸을 맡기는 게 나을 것 같군요. 섣불리 하나마나한 위로 나부랭이로 괜히 생색내지 않고 침묵하지 않는 행동이 그나마 조금 나을 겁니다.
그래서 그 애기들, 어린 딸이거나 청소년에서 곧 어른이 될 그 애기들(전라도 사람들은 자식을 언제까지나 ‘애기’들이라고 하더군요.)을 가슴에 묻은 어미들이 할 수 있는 것 가운데 ‘자장가’ 불러주기는 어떨지요.
백석의 <여승>은 딸을 잃고 비구니가 되었고 다산의 아내는 피눈물 참고 혼인날 입었던 붉은 치마를 남편에게 보냈지요. 안산과 그 밖에 항구에서 목 놓아 자식을, 식구를 부르는 외침에게 아프지만 애기들을 위해, 잊지 않기 위해 토닥거리던 ‘자장가’를 바칩니다.
어떤 사람이 쓴 곡이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세상에 없는 내 애기를 제울 자장가면 말이죠. 눈물이 솟습니다. 참척 당한 부모들에게 미안하고 염치없어서 그런가봅니다. 여전히 모자에서 떼어내지 못하는 노란리본과 ‘잊지않겠습니다.’는 언제까지라도 가슴에 저장하렵니다.
ps 무려 삼십 년이나 얼굴 봐 온 아무개씨, 우리 모두 [귀천]의 식구였으니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는 구절에 “왜 불경이 서럽냐”고 버팅기고 제게 따지듯 묻지 마시길. 저는 그 눈물 나고 기막힌 표현 때문에 흘끗이라도 읽어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써 준 것이니 정 궁금하면 저세상으로 일찌감치 떠난 백석을 나중에 만나거든 물어보세요.
이렇게라도 마음을 돌려야 그나마 숨이 쉬어지기에 하는 말이거든요. 참 좋은 분이니 언짢아하지 않으시리라 믿고 하는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