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장안사- 수도하신곳
화엄경 통하여 부처님 공경심을 배운다 - 백성욱 박사님 법문
- 부처님 향한 절대 공경심으로 밝아진다 -
마음 닦는 수도를 하는 사람들은 마음을 닦는 과정에서
차츰 자신의 희노애락의 감정이 둔해짐을 보고는
자신이 목석처럼 변해가는 것이 아닌가 하고 두려워한다.
그러나 마음에 분별심이 차츰 소멸해 간다면 목석처럼 될 리가 있겠는가?
도리어 의심스러운 것이 점차 사라지면서 매사가 분명해 진다.
惺惺寂寂이란 -<마음은 고요하되 모든 것은 분명하다>-는 뜻이라 할 것이다.
금강산 수도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 나는
-<더욱 분별심을 소멸해가는 공부를 계속함에 따라>-
자신의 여러 생전의 모습을 알 수 있게 되었고 또 다른 사람들의 전생의 모습도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나는 여러 생 화엄경을 공부한 사람이었고
많은 사람으로부터 화엄경의 대가라는 소리를 들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놀랄 일은 나를 따라 화엄경을 공부하던 사람들이
대부분 그 후생에 고통을 받는 사실이었다.
어째서 모든 불법의 대의를 다 담고 있는 최상승경전인 화엄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가? 물론 경의 잘못은 아니다.
화엄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用心이 문제였던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화엄경은 마음 닦는 방법을 가장 완벽하게 잘 설명한 경이다.
또 부처님의 웅대한 살림살이를 잘 나타낸 경이기도 하다.
그러나 화엄경을 읽는 사람들은 화엄경 가르침대로 마음을 닦으려 하기 보다는
부처님의 웅대한 살림살이에 취하기 쉽다.
화엄경의 웅대한 살림살이를 읽은 사람들은
-<아 ! 부처님 훌륭하시구나!>- 라고 부처님에 대한 공경심을 내기 보다는
-<자신이 부처님이 되어버린 것처럼 하기 쉬운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마음은 부처님처럼 커지는데 몸은 여전히 하찮은 중생이라면
그 후생은 당연히 고통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마음 닦아 밝아지고자 한다면 자신의 業障이 泰山 같은 줄 알고
-<부처님께 절대 공경심을 내는 것>-이 필요한 것임을 깨치게 되었다.
-[모든 것을 바쳐라]- 백성욱박사님 볍문에셔
우리가 불교를 신앙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부처님이 되려는데 있습니다.
또한 석가모니 부처님이 사바 세계에 출현하신 큰 뜻도,
고해에서 윤회하는 중생을 제도하여 부처님을 만드는 데 있었습니다.
부처님이 되면 중생이 가지는 일체의 번뇌와 고통과 부자유에서
벗어나 원융과 원만과 자유자재롭게 됩니다.
그래서 성불은 곧 해탈인 것입니다.
그러면 성불은 어떻게 해야하며 해탈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여기에 대하여
모든 것을 버리시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버리고 탐심과 진심과 어리석음을 버리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아만과 집착과 아집을 버리고 아상을 떨어버려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매에게 쫒기는 비둘기의 생명을 위하여 자신의 육체를 그 매에게 던져주던
부처님처럼 모든것을 버릴수 있어야 성불은 가능하고 해탈의 길은 열린다고
하였습니다. 모든것을 버리지 아니하고는 윤회의 구레를 헤어날 수도 없고
또한 피안의 길은 요원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성불과 해탈을 위하여
모든 것을 부처님께 바치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부처님 앞에 바칠 줄 알아야 합니다.
나의 마음도 나의 몸도, 탐욕과 진심과 어리석음도 부처님께 바쳐버리고
기쁨도 슬픔도 근심도 고통도 모두 바쳐야 합니다.
모든것을 부처님게 바칠 때 平安이오고 일체를 바치고 날때
법열이 생기는 것입니다.
五욕도 바치고 八苦도 바쳐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바치는 모든 것을 기꺼이 받아 주십니다.
또한 이 모든것을 바침으로써 불타의 가르침은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중생의 원인이 되는 無明을 바쳐 버리면 불타의 지혜가 비춰옵니다.
불타의 광명이 나에게 비추일 때 거기엔 윤회의 바다를 벗어납니다.
생사를 바쳐 버리면 거기엔 불생불멸의 영원한 삶이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바치지 아니 하고 자기의 소유로하려는 마음에서
일체의 고통이 따르고 번뇌가 발생합니다.
명예를 자기의 것으로 하고 재물을 자기 것으로 하고
女子를 자기의 것으로 하고 자식을 자기만의 자식으로 하려는데
중생적인 고뇌가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영원한 자기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명예가 어찌 완전한 자기와 같이 할 수 있으며
남녀의 사랑이, 재물이,자식이 어찌 완전한 자기의것이 될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런 중생적인 것은 부처님께 바치고 무상치 않은 즉
영원히 자기의 것일 수 있는 불타의 지혜와 진리를 얻을수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께 모든 것을 바친다함은,
우리가 부처님과 항상 같이 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잠시라도 떨어져 있게 되면
번뇌와 망상이 생기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
몸과 마음을 부처님께 바친 자리,
그 텅 빈 자리가 바로 부처의 자리입니다 ..... (중략)
백성욱 박사님 약력: 1981년 9월15일 84세 입적
독일서 국내 첫 불교학 박사, 내무부장관·역임
동국대 총장,이사장 역임 , 금강경’ 독송 수행
▲백성욱 박사
독립운동가. 수행자, 정치인,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백성욱 박사가
1981년 9월15일(음력 8월19일) 84세로 입적했다.
그는 우리나라 불교학자로는 처음으로 유럽 유학을 떠나 불교학 1호 박사가 됐고,
해방 이후 내무부 장관을 거쳐 정치인으로도 활약했으며
동국대 총장, 동국학원 이사장 등을 맡아 교육행정가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인물이었다.
1897년 서울에서 태어난 백성욱 박사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1910년 7월 정릉 봉국사에서 최하옹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11년부터 불교전문강원에서 불교경전을 배웠던 백 박사는
1917년 동국대의 전신인 경성 불교중앙학림에 입학했다.
당시 불교중앙학림은 불교계가 설립한 근대 고등교육기관으로
예과 1년과 본과 3년으로 총 4년 과정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불교중앙학림 강사였던 만해 스님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고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특히 백 박사는 중앙학림 학인들과 더불어 3·1운동을 주도했으며
이후 지방 사찰을 돌며 청년운동 조직을 만들어 나갔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는 등 더 이상 국내에서 활동하기가 어려워지자
중국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이곳에서 이승만 등 당시 임시정부의 주요 인사들과 교류했고,
이는 해방 이후 내무부 장관으로 발탁되게 된 계기가 됐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백 박사는 그로부터 얼마 뒤 유럽 유학을 결심했다.
‘선진학문을 익혀 대중들을 계몽하고 변화시키는 것이
조국광복을 앞당기는 길이 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백 박사가 생소했던 유럽 유학을 택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는 당시 중국 지식층을 중심으로 진행됐던 ‘근공검학(勤工儉學)’운동의 영향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김영진 동국대 HK연구교수에 따르면 1920년대 프랑스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전후 복구를 위해 외국인노동자를 받아들이는 정책을 폈다.
중국 지식인들은 청년을 모집해 노동자로 파견, 그곳에서 학업을 병행하도록 했다.
훗날 중국 공산당을 이끈 덩샤오핑도 근공검학 운동 출신이었다.
결국 백성욱 박사의 프랑스 유학은 중국청년들과 함께 근공검학 운동에 참가하면서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김 교수의 설명이다.
어찌됐든 1920년 프랑스에 도착한 백 박사는 파리 보베고등학교에 입학해
그곳에서 독일어와 라틴어 등을 배웠다.
그리곤 1922년 다시 독일로 건너가 뷔르츠부르크 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고대 희랍어는 물론 독일 신화사와 천주교 의식 등을 공부하며 학문의 폭을 넓힌 그는
1925년 10월 ‘불교순전철학’으로 국내 첫 불교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내로 돌아온 백 박사는 1928년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해 학인들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백 박사는 얼마 되지 않아 교단을 떠나 금강산으로 단신수도에 들어갔다.
평소 후학들에게 ‘제 아무리 부처님 아들이라도 부처님의 지혜를 상속 받을 수는 없다.
수행하는 것을 미루지 말라’고 했던 말들을 스스로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백 박사는 금강산 장안사, 안양암, 지장암 등을 거쳐 오대산 적멸보궁 등에서
해방이 될 때까지 10여년간 수행정진을 했다.
해방과 동시에 국가재건에 앞장섰던 백 박사는 1950년 내무부장관에 발탁돼 국가치안을 담당했으며,
1952년과 1956년 부통령 후보로 입후보했다가 낙선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1953년 모교인 동국대 총장과 1954년 동국학원 이사장을 맡아
동국대학교가 종합 대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출 수 있도록 이끌었다.
이후 4·19혁명과 5·16군사쿠데타 등 격변의 세월을 지켜본 백성욱 박사는
1962년 돌연 모든 공직을 내려놓고 부천 소사동에 현대식 법당을 신축해
‘백성목장’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후학 양성과 대중교화에 매진했다.
특히 그는 공부의 기본을 ‘금강경’으로 삼고,
아침저녁으로 ‘금강경’ 독송을 강조하면서 수행 모임으로 이끌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 ‘경전이 있는 곳에 부처님이 계시다’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것이 곧 제 마음을 닦는 것’ 이라는
그의 가르침은 이후에도 '청우불교원 금강경독송회’, ‘바른법연구원’ '용인 백성농장' 각지방 분원과
해외분원 등을 통해 대표적 제자로 포항,경주에 계신 김재웅법사님, 서울 마포 하심정을 운영하시는
일산의 김원수법사님 ,용인에 계신 김영사 대표 ,회장으로 계신 김정섭사장님,과 이 광옥선생님,
서울 상계동에 계시는 김동규법사님, 단양에 계신 손양보선생님 등 각 지방 분원을 맡아서 해외까지
금강경 독송을 통한 " 닦는마음 밝은마음" 수행으로 백성욱 박사님 지도 가르침을 실행 받들며
부처님의 밝은 정법을 활발히 펴 나가고 있다.
사진 출처 不二家 동해 일출
첫댓글 법문 잘 읽어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정진하겠습니다
최상의 법문 입니다
이런 바른 법문이 중생을 현혹 하지 않으며
바른 가르침으로 인도하여
중생의 업을 들어 주게 됩니다
전생에 경전 만을 본다 하여 업의 고통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아라는 상이 떨어져야
비로소 고통에서 벗어 납니다
좋은 분의 가르침 감사 드립니다
네 스님 지도 말씀에 깊이 감사드림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