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 - 영국의 정치가, 인도주의자 샤프츠버리(Shaftesbury, The Earl of) 출생
샤프츠버리 [Shaftesbury, Anthony Ashley Cooper, 7th Earl of, 1801.4.28~1885.10.1]
별칭 Cooper, Anthony Ashley.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하고 1826년 하원의원이 되어 토리당에 소속하였으나, 1847년 휘그당으로 이적, 1851년 7대 백작을 계승하여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산업혁명과 함께 급변한 노동자계급의 생활상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노동자의 대우개선에 노력하였다. 공장법, 10시간 노동법 등 일련의 노동입법의 제정과 구빈학교의 설립, 복음운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naver
1795 - 오스트레일리아의 탐험가 스터트(Sturt, Charles) 출생
스터트 [Sturt, Charles Napier, 1795.4.28~1869.6.16]
1829~30년 그가 수행한 머럼비지 강과 머리 강 탐험은 오스트레일리아 개척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탐험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가 집중적으로 탐험한 지역은 후에 뉴사우스웨일스와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지역으로 개발되었다.
영국에서 교육을 받은 스터트는 18세에 영국 군대에 입대했으며, 그후 13년간 스페인·캐나다·프랑스·아일랜드에서 복무했다. 1827년 뉴사우스웨일스의 총독이었던 랠프 달링 경의 군사보좌관이 되었다. 1828~29년 매콰리·보건·캐슬레이 강을 따라 그의 첫번째 탐험을 수행했는데, 이때 달링 강을 발견했다. 그뒤의 탐험에서 머럼비지 강을 따라 내려가 머리 강을 발견했고, 애들레이드 근처에 있는 머리 강의 발원지를 찾아 탐험을 하는 과정에서 주변의 오스트레일리아 인디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도 했다. ... /브리태니커
1774 - 영국의 천문학자 베일리(Bailey, Francis) 출생
베일리 [Bailey(Baily), Francis, 1774.4.28~1844.8.30]
1836년 5월 15일 금환일식 동안 ' 베일리의 목걸이'라고 불리는 현상을 관측했다. 일식에 대한 그의 생생한 묘사는 일식 연구에 관한 새로운 흥미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베일리는 1825년 번창하던 사업을 그만두고 그의 정력을 과학에 쏟았는데, 이미 1820년에 왕립천문학회 설립을 위한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1827년에는 2,881개의 별에 관한 이 학회의 목록작성을 준비한 공로로 금메달을 받았다. 베일리는 당시 정확하지 못했던 〈영국 항해력 British Nautical Almanac〉에 이의를 제기하여 개선할 계기를 만들었고 몇몇 별목록을 개정했다. 또한 헨리 캐번디시 실험을 재현하여 지구의 밀도를 계산하고 지구 타원체를 측량했다. ... /브리태니커
1758 - 미국의 제5대 대통령 먼로(Monroe, James) 출생
먼로 [Monroe, James, 1758.4.28~1831.7.4]
버지니아주(州) 웨스트모어랜드 출생. 윌리엄앤드메리대학교 재학 중 미국독립혁명전쟁에 참전하였고, 버지니아 주의회 의원, 연합의회 의원, 상원의원, 프랑스 주재 공사, 버지니아 주지사를 거쳐서, 1803년 루이지애나 구입 교섭을 위해 프랑스에 특파, 이어 런던에 건너가 대통령 T.제퍼슨의 중립정책유지를 위해 노력하였다. 1811년 다시 버지니아 주지사를 역임한 후, J.매디슨 행정부 국무장관이 된 후 1816년과 1820년 두 차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 재임시 내정면에서는 지역 간의 화해에 노력하였고, 외교면에서는 에스파냐로부터 플로리다를 매수하여 미주리협정을 맺었고, 캐나다와의 국경 확정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1823년 먼로주의를 선포하여 미국 외교의 기본정책으로 삼음으로써 유럽 제국의 신대륙에 대한 간섭을 저지하였다. 임기 만료 후 1826년 버지니아대학교 이사장으로 추대되었고, 1829년 주헌법개정회의에 참여하였다. /naver
- Marggraf, Achard, Scheibler
1753 - 독일의 화학자, 제당기술자 아카드(Achard, Franz Karl) 출생
아카드 [Achard, Franz Karl, 1753.4.28~1821.4.20]
백금도가니 개발하고 사탕수수에서 설탕 추출 공정 개발해 최초의 설탕 공장을 설립.
Franz Karl Achard (April 28, 1753, Berlin - April 20, 1821, Wohlau-Cunern) was a German (Prussian) chemist, physicist and biologist. His principal discovery was the production of sugar from sugar beets.
http://en.wikipedia.org/wiki/Franz_Achard
1686 - 뉴턴, 만유인력 법칙 발표
1679년 경 뉴턴은 행성 운동과 연관하여 역제곱 법칙을 언급하는 편지를 후크로부터 받았다. 뉴턴은 이 편지를 받고 이런 내용이 자신이 젊었을 때 가졌던 생각과 유사하다고 느꼈고, 이 역제곱 법칙을 행성운동을 해결하는 데 본격적으로 이용할 생각을 하게 된다. 당시 핼리 (Edmond Halley, 1656-1742)는 후크와 함께 역제곱 법칙을 이론적 바탕으로 해서 행성의 운동을 해결하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작업을 성공시킬 수 없었다.
뉴턴이 역제곱 법칙을 바탕으로 해서 행성의 운동 문제를 해결했다는 소문에 접한 핼리는 1684년 8월 케임브리지의 뉴턴을 방문했다. 핼리는 뉴턴의 이 '발명'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이것을 작은 책으로 출판하도록 뉴턴에게 권유했다. 핼리의 권유를 받은 뉴턴은 처음에는 『운동에 관해서』라는 작은 논문을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왕립학회로부터 출판 약속을 받은 뒤 뉴턴은 이보다 더 긴 분량의 책을 집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뒤 18개월 동안 집필에 전념한 뉴턴은 1687년 고전역학의 완성판이라고 불리는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혹은 『프린키피아』 라는 3권의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
1686년 왕립학회에 『프린키피아』 제 1권의 완성된 원고가 접수되었을 때, 후크는 뉴턴이 자신의 생각을 표절했다고 주장했다. 아마도 당시 쇠락해가던 후크로서는 뉴턴이 자신의 책에서 후크도 역제곱 법칙에 관한 생각을 했다는 사실만을 인용해주는 정도로도 만족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광학에 관한 글에서 후크와 격렬한 논쟁을 한 쓰라린 경험이 있었던 뉴턴은 이 정도의 아량도 보여주지 않았다. 후크의 표절 주장에도 불구하고 뉴턴은 자신의 원고를 계속 집필해갔으며, 심지어 자신의 원고에서 후크에 대한 거의 모든 인용을 삭제해버렸다. 후크에 대한 뉴턴의 분노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뉴턴은 후크가 죽기 전까지는 자신이 이미 집필한 광학에 관한 책을 출판하지 않았으며, 왕립학회의 회장직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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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5 -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장군 탄생
이순신 [李舜臣, 1545.4.28(음력 3.8)~1598.12.16(음력 11.19]
조선 중기 무신. 자는 여해(汝諧). 본관은 덕수(德水). 서울 건천동(乾川洞;지금의 中區 仁峴洞 부근) 출생. 1576년(선조 9) 식년무과에 급제, 권지훈련원봉사가 되었고, 이어서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에 보직되었다. 이듬해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훈련원참군 등을 지내고 1586년 사복시주부가 되었다. 이어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 겸 녹도둔전사의(鹿島屯田事宜)가 되었는데, 이때 호인(胡人)의 침입을 받고 적은 군사로 막아낼 수 없어서 부득이 피하게 되어 이 일의 책임을 물어 해임되었다. 그 뒤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 등을 지내고, 1589년 유성룡(柳成龍)의 추천으로 고사리첨사(高沙里僉使)로 승진, 이어 절충장군으로 만포첨사(滿浦僉使)·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1591년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그는 왜침을 예상하고 미리부터 군사를 훈련하고 장비를 갖추었으며, 특히 거북선을 제조하는 등 전쟁에 대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선·협선·포작선(鮑作船)을 합쳐 모두 85척의 대선단을 이끌고 출전, 옥포(玉浦) 앞바다에서 최초의 승리를 거두었다(옥포대첩). 그해 5월 말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으로부터 사천(泗川) 등지로 왜군이 진출하였다는 연락을 받고 최초로 거북선을 이끌고 출항, 노량(露梁) 앞바다에서 왜선 12척을 격파하는 등 그 위력을 과시하였다. 또 당포(唐浦)에서는 일본수군장과 싸워 이기는 등 연전연승을 거두어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자헌대부에 승품되었다. 7월 견내량(見乃梁)에 정박하고 있는 일본의 수군을 한산도(閑山島) 앞바다로 유인, 학익진(鶴翼陣)을 쳐서 격파하였다(한산도대첩). 이 공으로 다시 정헌대부에 승계되었다. 1593년 부산 등지에 있던 일본 수군을 소탕, 남해안 일대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겼으며, 최초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1596년 원균 일파의 상소로 인하여 서울로 압송되어 죽음에 처하기 직전, 우의정 정탁(鄭琢)의 변호로 목숨을 건지고 도원수 권율(權慄)의 막하로 들어가 백의종군하였다. 이듬해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적의 유인전술에 빠져 거제(巨濟) 칠천량(漆川梁)에서 전멸하자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기용하게 되었다. 그해 8월 명량(鳴梁)에서 12척의 전선으로 10배 이상의 적을 대파하여 다시 제해권을 장악하였고(명량대첩), 1598년 퇴각하기 위해 집결한 적선 500여 척을 발견, 싸움을 기피하려는 명(明)나라 수군제독 진린(陳璘)을 설득하여 함께 노량 앞바다에서 섬멸하였다(노량해전). 그러나 이 때 선두에 나서서 군사를 지휘하던 중 왜군의 유탄에 맞아 전사했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녹훈되었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좌의정에 추증되었고, 1613년(광해군 5)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묘는 충청남도 아산(牙山)에 있고, 충무(忠武)의 충렬사, 아산의 현충사 등에 배향되었다. 《난중일기》와 시조 등이 전한다. 시호는 충무. /yahoo
1467 - 원각사지 십층석탑 완성
서울특별시 종로구 탑골(파고다)공원에 있는 원각사지 십층석탑(圓覺寺址十層石塔)은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2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약 12m이다. 이 탑보다 약 120년 전에 만들어진 고려시대 경천사(敬天寺) 십층석탑(국보 86)을 모방하여 만든 탑이다. '아(亞)' 자형의 3층 기단, 이와 같은 평면의 3층 탑신, 네모꼴로 된 4층 이상의 탑신이 경천사 십층석탑과 기본적으로 같다.
탑신부는 층층이 아름다운 기와집을 모각하여 기둥·난간·공포(? 包), 지붕의 기와골까지 섬세한 수법이다. 옥신(屋身)에는 수많은 부처 ·보살상 ·천인(天人) 등과 구름·용·사자·모란·연꽃·인물·새·선인(仙人) 등이 새겨져 있다. 조선시대 석탑으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우수한 조각솜씨를 보여주는 세련된 석탑이다.
1465년(세조11) 현재의 탑골공원 자리에 원각사가 세워졌으며 1467년(세조 13)에 십층석탑이 건조되었다. 맨 위 3층은 오랫동안 무너져 내려져 있던 것을 1947년에 원상태로 복구하였다. /naver
1442 -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 4세(Edward IV) 출생
에드워드 4세 [Edward IV, 1442.4.28~1483.4.9]
프랑스 루앙 출생. 제3대 요크공 리처드의 맏아들이다. 왕위계승권을 주장하고 국왕 헨리 6세를 배반, 장미전쟁을 일으켰다. 국왕파(랭커스터파)를 무찌르고 '국왕 제조자(製造者)'라고 불린 워릭 백작(뒤의 노섬벌랜드공작)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라 요크왕조를 세웠다. 한때 워릭과의 불화로 네덜란드로 망명, 헨리 6세가 복위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서 귀국하여 워릭을 무찌르고 복위, 헨리 6세를 살해하고 권력을 안정시켰다. 내정면에서는 도시와 지방의 중산층과 제휴하여 제후(諸侯)의 세력을 견제하는 한편, 재정기구를 정비하여 왕실 재정을 튼튼히 하는 등 왕권의 신장에 주력하였다. /na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