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0. 2
세종은 몇번이나 화를
냈을까?
리더도 사람이다. 때론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부하들에게 화를 내기도 한다.
관련해서
<조선왕조실록>에서 국왕들이 '화를 낸 경우와 그 횟수'를 살펴본 적이 있다. '왕이 화를 내다'는 뜻의
'上怒, 上大怒, 또는 上震怒'라는
말을 검색해보면, 세종의 경우 총 21회로 나타난다. 이것은 성종이나 정조보다는 높고,
태종이나 영조에 비해서는 훨씬 낮은 수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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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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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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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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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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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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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낸횟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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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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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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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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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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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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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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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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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9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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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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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8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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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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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평균 화낸횟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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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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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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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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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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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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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수치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왕이 화를 (크게) 내다”라는 뜻의
“上怒”와 “上大怒” “上震怒”라는 원문을 기계적으로 검색하여 재위월수로 나눈 것이다. 따라서 화내는 상황을 모두 반영했다고 볼 수는 없고,
다만 전체적인 경향을 이해하는 데 일정한 지침을 줄 수 있다.
화를 내는 상황을 볼 때,
세종은 여진족의 국경침입(세종실록 14년
12월9일, 이후 표기 14/12/9)이나
환관들의 의사소통 왜곡(세종실록 22/6/8)
등 주로 공적인 일로 화를 냈다.
이것은 조선 국왕 중에서 가장 화를 많이 냈던 태종이
언관의 불손한 태도나 세자 양녕의 불순종 등
주로 개인적인 관계에서 진노한 것과 대조를 이룬다.
그럼 가장 화를 내지 않았던 임금은 누구일까? 바로
정조이다.
그는 세손 시절부터 힘든 고비를 많이 넘겨서 그런지,
거의 초인적인 자기 통제력을 보여 주었다.
정적들 앞에서 화를 낸다는 것은 곧 자기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조금도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 왕 노릇도 결코 녹녹치 않은 일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세종이 화를 삼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신하들로 하여금 허심탄회하게 속마음을 털어놓게 하기 위해서였다.
세종은 회의시간에 신하들의 무지가 드러나더라도 꾸짖기보다는 오히려 용기를 북돋아 주곤
했다.
세종은 또한 신하들의 말하는 방식이 서툴러서,
좋은 일만 말하거나 반대로 나쁜 일만 말하는 경우가 있다면서,
"상서(祥瑞)로운 일을 만나면 상서로운 일을 말하고,
재변(災變)이 생기면 재변을 말하는 것이 옳다"(세종실록 1/7/25)고 말했다.
리더의 눈치를 살펴서 듣기 좋은 이야기만 말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다.
그런데 세종의 감정관리와 말하는 방식을 보면
취임사에서 그가 한 말이 새롭게 느껴진다.
세종은 취임사인 즉위교서에서
"施仁發政, 인을 베풀어 정치를 일으키겠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재위기간 내내 바로 이 어질 인자, 인(仁)의 리더십을
펼쳤다.
그것은 한마디로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나랏일을 대하는 태도이다.
그러한 태도를 맹자는 이렇게 비유한 적이 있다.
"옛날 제선왕이 제물로 끌려가는 소의 울음소리를 듣고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생겨 소를 살려주라며 양을 제물로 바치게 했다."
그 당시 제선왕은 모른 척 소를 희생으로 삼거나,
아니면 아예 제사 자체를 지내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것은 제3의 방안, 즉 양을 희생 제물로 삼는 것이었다.
얼핏 보기엔 말장난처럼 보일 수도 있는 맹자의 이 구절에 깊은 뜻이 담겨 있다.
그것은 양 극단을 피하는 "중용"의
철학이다.
세종은 회의할 때, 때로는 감정이 상하고 화가 나더라도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말을 줄임으로써 신하들의 입을
열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신하들의 말에 끌려가서 잘못된 결정을 내리지도
않았다.
북방영토개척이나 수령의 장기근무제, 세제개혁 등은
"여러 사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단을 하고 추진했다.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그리고 황희를 정승으로 발탁할 때 신하들의 반대는 얼마나 거셌었을까?
하지만 그는 신하들의 말을 충분히 들은 뒤에 스스로 결단을 내리고 행했다.
사실 세종은 자기가 똑똑한 왕이었기 때문에,
회의시간의 대부분을 자신의 말로 채울 수
있었다.
아니면 입을 꼭 다물고 신하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지켜보고만 있을 수도 있었다. 그가
택한 길은 그 사이에 있었다.
회의의 안건을 제기하고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라고 질문을 던지고 신하들의 말을
기다렸다.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말을 줄임으로써 신하들의 입을 열게 만들었다.
물론 그 중에는 좋지 않은 말들도 있었지만,
그것은 왕이 현명하게 가려내어 선택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세종실록>에 보이는 수많은 '질문형 화법'은
침묵과 과도한 발언의 중도에 서서 신하들의 말을 경청하는 세종의
중용의 말하기였다.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말을 하여 회의를 활성화하는
전략'이었다.
그는 최고지도자가 화를 내는 순간
회의는 엉망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철저히 감정을 절제했다.
화를 내는 경우라도 속마음은 평정심을 잃지 않고
사사로운 신하들을 경책하는 수준에서만
꾸짖었다.
감정관리는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다.
하지만 세종은 리더로서 그 힘든 일을 감내하는
도량과 기술이 있었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고도 창의적인 토론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었고,
역사상 유례없는 국가적 성과가
창출되었다.
<출처: SERICEO, 세종리더십 中,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