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만난 연꽃
제주에서 하루 피정 지도하러 갔을 때, ‘다래산장’을 찾아가다가 우연히 하가리에 있는 연꽃마을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다래산장’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서 이른 아침에 그곳에 가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외로운 연
몇 해 전 미국에서 오신 어느 교우 부부와 함께 해미 성지에 순례 갔다가 그곳에서 가까운 개심사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리 크지 않은 절이지만 ‘개심사’라는 이름도 좋고, 자연 그대로 구불구불한 나무로 절을 지어 제 마음에 드는 몇 안 되는 사찰 중의 하나입니다. 개심사, 마음을 여는 절이라는 뜻입니다. 때로 마음이 닫히는 일이 생길 때, 개심사에 가서 한 바퀴 돌고 오면 마음이 열리는 느낌을 받지요. 개심사 입구에 장터처럼 많은 연꽃을 펼쳐놓고 팔고 있었습니다. 실은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연꽃이 아니라 수련이었습니다. 그냥 일반적으로 연꽃이라고 하지요. 제가 막 봉오리를 터트린 연꽃의 아름다움에 취해 넋을 잃고 연꽃들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그 부부가 제게 연꽃 몇 그루를 사 주시겠다고 하여 처음에는 사양하다가 결국 못 이기는 척 받았습니다. 그 해 6월 초였는데 놀랍게도 10월까지 계속 꽃을 피우더군요. 매일 저녁이면 꽃잎을 접었다가 아침이면 봉우리를 여는 모습을 보며 저는 그 해 여름, 가을 내내 행복했습니다.
꽃잎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연
이번 제주에서 만난 연과 연꽃은 특별히 삶과 죽음, 아니, 태어남과 삶과 돌아감에 대해 많은 묵상거리를 던져 주었습니다. 그 모든 일을 동시에 볼 수 있었습니다. 죽음, 바로 그 곁에 생명에 태동하고 있었습니다.
죽음, 그 바로 옆에서 생명이 태동
연은 진흙 속에서 어찌 그리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는지 경이롭습니다. 연에는 열 가지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 연의 특징을 닮을 수 있다면 우리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리라는 생각에 여기 그 특징을 소개하며 제 나름대로 그 의미를 헤아려 봅니다.
왼쪽부터 태어남, 만개, 떨어짐
첫째, 이제염오(離諸染汚)라고 합니다. 연은 진흙탕에서 자라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열악한 환경, 진흙 속에서 자리하고 있지만 그 진흙 때문에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흙으로 인해 더 아름답고 깨끗하고 고고하게 꽃피웁니다. 때로 우리가 바르고 기쁘고 선하게 살지 못하면서 환경 탓을 하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어려운 환경과 열악한 조건에서도 아름다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당시 읽은 이야기입니다. 대전에 사는 최인남(51·여)씨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오토바이를 타고 도시락을 배달한다고 합니다. 몸에 마비 증세가 찾아오는 '바스타신드롬' 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지만, 매일 중구 소재 무료급식소에서 도시락을 받아 홀로 사는 노인들에게 '사랑'을 전달하는 일을 합니다. 도시락 배달을 하며 외로운 노인들의 손을 꼭 잡아주고 말동무가 되기도 하고, 설거지와 집안청소를 돕기도 한답니다. 몸이 성하지도 못하지만 "서로 기대고 서로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이 바로 인간이 살아가는 길"이라는 생각이 육체적·경제적 한계를 뛰어넘는 사랑을 실천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정말 연꽃 같은 사람이지요.
연잎 위에서 구르는 물방울
둘째, 불여악구(不與惡俱)라고 합니다. 연잎 위에는 한 방울의 오물도 머무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물이 연잎에 닿으면 그대로 굴러 떨어집니다. 연잎 위에 물방울이 지나가지만 그 흔적도 전혀 남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때로 우리에게 원하지 않는 악이나 악재들이 마치 비 오듯 쏟아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오래 우리에게 머물지 않고 흘러가도록 해야 하지요. 그러기 위해서 연잎처럼 아래로 향해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봉우리
셋째, 계향충만(戒香充滿)라고 합니다. 연꽃이 피면 물속의 시궁창 냄새는 사라지고 향기가 연못에 가득하다는 뜻이랍니다. 마치 한 자락 촛불이 방의 어둠을 가시게 하듯 한 송이 연꽃이 진흙탕의 연못을 향기로 채웁니다. 바로 최인남씨 같은 사람이 매일 뉴스에서 듣는 온갖 사회악으로 금방 망해버릴 것 같은 이 세상을 연꽃 같은 향기로 채웁니다.
만개
넷째, 본체청정(本體淸淨)이라고 합니다. 연꽃은 어떤 곳에 있어도 푸르고 맑은 줄기와 잎을 유지한다는 뜻입니다. 연못의 바닥에 더러운 오물이 즐비해도 그 오물에 뿌리를 내린 연꽃의 줄기와 잎은 그 푸르고 우아한 자태를 잃지 않습니다. 주변의 어떤 악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늘 맑고 푸른 눈을 지닌 사람들을 만나면 그 사람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치 대나무 숲의 바람소리처럼 우리의 가슴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끼게 되지요.
떨어지는 연잎
다섯째, 면상희이(面相喜怡)이라고 합니다. 연의 모양은 둥글고 원만하여 그 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절로 온화해지고 즐거워진다는 뜻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그냥 그 사람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푸근해지는 사람이 있지요. 우리가 늘 얼굴에는 평화로운 미소를 지니고 있고, 부드럽고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넬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돌아갈 준비하는 연
여섯째, 유연불삽(柔軟不澁)이라고 합니다. 연의 줄기는 부드럽고 유연하기 때문에 좀처럼 바람이나 충격에 부러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진짜 강함은 딱딱함이 아니라 유연함에 있습니다. 휠 줄 알기 때문에 바람에 부러지지 않는 것이 세상을 사는 지혜이고 슬기일 때가 있습니다. 너무 곧으면 부러지기 마련입니다. 때로 융통성이 함께 있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합니다.
수줍어서 숨은 연
일곱째, 견자개길(見者皆吉)이라고 합니다. 연꽃을 꿈에 보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을 만나는 날은 괜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 있지요. 누군가가 우리에게 “오늘 너를 만나게 되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라고 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복된 사람이겠습니까?
온전히 벗어 버린 연
여덟째, 개부구족(開敷具足)이라고 합니다. 연꽃은 피면 필히 열매를 맺는다는 뜻입니다. 제가 연꽃이 많이 피는 전라도 무안을 갔다가 연이 열매뿐만 아니라 뿌리, 잎 등이 모두 쓸모 있고 다양하게 쓰이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연꽃의 열매가 널리 쓰이듯이 사람도 마찬가지이지요. 최인남씨의 경우처럼 꽃피운 만큼의 아름다운 일들은 여러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줍니다.
다 내어 놓은 연
아홉째, 성숙청정(成熟淸淨)이라고 합니다. 연꽃은 활짝 봉오리를 다 열었을 때 그 맑고 깨끗함이 더 잘 드러난다는 뜻이지요. 연꽃처럼 활짝 핀 듯한 우아하면서도 고고한 인품이 느껴지는 사람들을 만나면 우리도 우리의 마음이 맑아지고 깨끗해지는 것을 느끼게 되지요.
다시 태어나는 연
마지막 열 번째, 생이유상(生已有想)이라고 합니다. 연꽃은 날 때부터 그 기품이 남다르다는 뜻입니다. 아직 꽃을 피우지 않은 연도 넓은 잎에 긴 대를 지니고 있습니다. 굳이 꽃이 피어야 연꽃인지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림자를 비추는 연
일반적으로 성모님을 장미로 그립니다마는 저는 오히려 연꽃 같은 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모님은 참으로 위의 열 가지 특징을 모두 지니고 계신 분이니까요. 우리 모두 성모님을 닮아 연꽃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연꽃이 피고 지는 시기입니다. 피고 지는 연꽃을 보며 생과 사에 대해 깊은 묵상을 하게 됩니다.
짧은 졸시 하나 나눕니다.
연꽃과 성모님
연꽃은 진흙탕에서 자라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고 연꽃 잎 위에는 한 방울의 오물도 머무르지 않네. 연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절로 즐거워지네.
연꽃은 늘 푸르고 맑은 줄기와 잎과 조화를 이루어 연꽃을 바라보면 평화의 모습에 마음이 푸근해지네. 연꽃은 싹틀 때부터 그 기품이 남다르기 때문이라네.
오월의 여왕이신 성모님은 한 송이 연꽃이시어라.
아름다운 계절 성모님의 달을 보내며 성모님을 닮아 연꽃 같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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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신부님께서 편찮으시기 전 제주에서 찍으신 사진과 함께 올리셨던 글을
제가 편집해서 올렸던 글과 사진을 나눕니다.
신부님께서는 아프시기 전 사진에도 전문성을 보여 주셨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