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그리스도인의 야망; 자신을 위한 야망인가 하나님을 위한 야망인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아무리 ‘세속적’으로 보일지라도 (입는 것, 쇼핑, 여행 등)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해진다는 의미에서 ‘종교적’이다. 예수님께서 이장에서 강조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이 점, 곧 하나님은 우리 삶의 두 영역, 곧 개인적인 영역과 공적 영역, 종교적 영역과 세속적 영역에 똑같이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것이다.
또한 두 영역 모두에서 예수님은 똑같이 집요하게 명하신다. 대중문화와 다르게 되라는 명령이다. 종교적인 사람들의 위선과 다르게 되고 (1-18절), 비종교적인 사람들의 물질주의와 다르게 되라는(19-34절)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모든 단계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제시하신다. 두 보물 (땅에 있는 것과 하늘에 있는 것, 19-22절), 두 육체적 조건 (빛과 어둠, 22-23절), 두 주인 (하나님과 재물, 24절), 두 관심사 (우리의 육체와 하나님의 나라, 25-34절), 중립적 태도를 취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 세상적인 야망은 대단히 매력적이다. 물질주의 마력은 끊기가 어렵다. 이에 여기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잘 선택하도록 도와 주신다. 그는 잘못된 길의 어리석음과 올바른 길의 지혜로움을 지적하신다. 경건과 기도에 대해 나온 앞부분과 마찬가지로, 야망에 대한 이 부분에서도 예수님은 거짓된 것과 참된 것을 대비시켜 스스로 그 둘을 비교하고 깨닫도록 가르치신다.
이 주제는 우리 세대에 매우 절박하게 다가온다. 국가간의 경제적 이슈가 더욱 복잡하고 혼탁해지면서, 부자는 계속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이 사실을 못 본체 무신경하게 외면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하나님이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들 편이라는 것을 새롭게 발견했다. 책임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풍요를 마음 불편하게 여기며 검소한 생활방식을 개발하려 애쓰고 있다. 이런 생활방식은 주님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것이다.
보물의 문제 (19-21절)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 네 마음이 있느니라.
여기에서 예수님이 주의를 집중시키는 점은 두 보물의 상대적 내구성이다. 땅에 쌓아둔 보물은 썩을 수 있어 안전하지 못한 반면, 하늘에 쌓아둔 보물은 썩지 않으므로 안전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땅에 보물을 쌓아 두지 말라고 하셨을 때 무엇을 금하신 것일까? 먼저 금하지 않으신 것을 열거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소유 자체에 대한 금지는 없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사유재산을 금하지 않는다.
둘째,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저축’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금지되어 있지 않다. 성경은 개미가 여름날에 겨울에 필요한 양식을 장해 놓은 것을 칭찬하며 (잠 6:6),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않은 신자는 불신자보다 더 악하다고 단언한다 (딤전 5:8).
셋째, 우리는 창조주께서 풍성하게 주신 좋은 것들을 멸시하지 말고 오히려 누려야 한다 (딤전 4:3-4). 그러므로 재산을 가진 것도 미래를 대비하는 것도, 좋으신 창조주의 선물을 누리는 것도 땅에 보물을 쌓아놓지 말라는 말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그의 제자들에게 금하시는 것은 재물을 이기적으로 쌓아 놓는 것, 낭비적이고 사치스러운 삶, 혜택 받지 못하는 전세계 사람들의 엄청난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몰인정함, 삶이 재산의 풍성함에 좌우된다는 어리석은 공상 (눅12:15), 그리고 우리 마음을 땅에 붙박아 놓는 물질주의 등이다. 상상수훈은 ‘마음’을 반복해서 언급하고 여기에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우리의 보물을 따라서 땅으로나 하늘로 간다고 단언하신다 (21절).
땅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은 저축으로 장래를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탐욕스러운 것 (계속 비축해 놓기만 하는 수전노와 언제나 더 많은 것을 원하는 물질주의자들)을 의미한다. 이것이 예수님이 여기에서 경고하시는 진짜 함정이다. “복음을 가르치고 사람들이 그에 따라 살려고 할 때마다, 언제나 생겨나는 두 가지 끔직한 재앙이 있다. 가르침을 망치는 거짓 설교자들과, 올바르게 살려고 하는 것은 방해하는 탐욕이라는 존재다”라고 루터는 말했다.
예수님은 보물을 이 땅에 아닌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셨다. ‘하늘에 쌓아 둔 보물’은 썩지 않기 때문이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둔다는 것”은 영원토록 영향력이 지속되는 무엇인가를 이 땅에 하라는 의미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은 이 땅에서 선행을 함으로 하늘에 우리 혹은 다른 사람들이 꺼낼 쓸 수 있는 일정의 외상거래 계정을 쌓는 것처럼 생각하는 공로의 교리나 ‘공로라는 보물’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가 말하듯)이 아니다.
그럼 ‘하늘의 보물’의 뜻은?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을 개발하는 것(우리가 하늘나라에 가져갈 수 있는 것이라곤 우리 자신뿐이므로), “항상 있을” (고전13:13)것인 믿음과 소망과 자비를 키우는 것, 언젠가 우리가 얼굴을 맞대고 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해서 그들 역시 영생을 유업으로 받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 영원한 배당금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투자, 곧 기독교적 대의를 위해 우리의 돈을 사용하는 것 등이다.
시각의 문제 (22-23절)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더 하겠느냐
“눈은 몸의 등불이니” 몸이 하는 거의 모든 일은 보는 능력에 좌우된다. 성경에서 ‘눈’은 ‘마음’에 해당한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어떤 것에 ‘마음을 고정시키는 것’과 ‘눈을 고정시키는 것’은 동의어다. 여기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우리 마음을 올바른 곳에 두는 것의 중요성에서 우리 눈을 건전하고 건전하게 하는 것의 중요성을 넘어간다. 이에 논지는; 눈이 온 몸에 영향을 끼치는 것처럼 야망(우리 눈과 마음을 고정시키는 곳)은 삶 전체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보는 눈이 몸에 빛을 주는 것과 같이,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고자 하는 고상하고 한결 같은 야망은 인생에 의미를 더해주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빛을 비춰준다. 또한 눈이 멀면 어둠에 이르게 되듯, 비열하고 이기적인 야망(예를 들면, 우리의 자신을 위해 땅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은 도덕적 어둠에 빠지게 된다. 그것은 우리를 아량이 없고, 비인간적이고, 무자비한 존재로 만들고, 인생에서 모든 궁극적 의미를 빼앗아 간다.
오늘도 하나님과 이웃사랑을 실천하게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도 하나님 이름으로 주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저와 우리 기독인들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