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잎의 女子 - 오규원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女子, 그 한 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나는 정말로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女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女子, 詩集 같은 女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 女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女子.
♧ 오동나무 – 나병춘
오동나무 가얏고가
저러코롬
보랏빛 향기로 울리는 것은
다 까닭이 있으리라
오독오독
독한 오기로 앞강물 뒷강물
세월 네월 견디었을 것이므로
열두 줄에 새긴
열두 달의 기록들
고스란히 안은 채
속울음 풍경소리 되새 떼처럼 풀어놓을 때
봉황새도 어디선가 날아와
적막한 품에 고이 깃들었으리라
영혼의 상처들
오독오독 잘못 씹은
궁. 상. 각. 치. 우.
태곳적 현묘한 바람소리
허허실실 서리서리
명주실에 탱탱히 실려와
세반고리관 밀실에 부려놓았으리라
오동오동 너훌너훌
별무리 달무리 빙글빙글 둥기덩 덩기덩기
한밤 지새도록 꽃살문 한지창에
대숲바람 빗금소리
♧ 무심천 꿈길 - 민문자
무심히 흐르는 물길 따라 걷던 길
무심천에서 맺은 아름다운 추억들
생명을 일깨우는 명암지 천연탄산수
백합화 노래하던 청명원 꽃길에서
네 잎 클로버 찾아 행운이라고 좋아하던
꿈 많던 그 시절 지금도 눈에 어리네
수줍던 얼굴들은 다 어디로 갔나
그토록 희망하던 서울로 떠나왔는데
그 시절 이상은 자취 없이 사라지고
꽃다운 내 청춘 젊음도 간 곳이 없네
어릴 제 꿈꾸던 부모산 아래 내 고향
아름다운 추억이 서려있는 곳 그리워라
♧ 이방인 시편 - 장성호
-깊은 밤 내리는 비는
서초 고속도로변 오솔길
천 개의 머리칼 흩날리는 키 큰 여인의 가슴에 하염없이 비가 내리고 있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비추는 숲길엔 인적은 없고 빗소리만 들려온다
늘 그녀 곁에서 다정한 눈빛으로 한가로운 밀어를 속삭였던 그 사람
깊은 밤 비가 내리면 서로 여린 가슴을 포개고 뜨겁게 정을 나누던 그 사람
함께 있으면 가슴 뛰고 영원히 사랑한다고 언약하던 그 사람
어느 날 그 사람이 먼 길을 떠났다
그녀 가슴에 한없이 비가 고이고 있다
이미배가 부르는 노래 ‘깊은 밤 내리는 비는’ 숲속에 끝없이 들려온다
깊은 밤 비 내리는 숲속
저기 키 큰 메타세쿼이아 몸통이 검붉게 젖고 있다
♧ 목련꽃 – 조경진
목련꽃 필 때 온다던 당신
세월가도 기다림의 꿈 접지 못하여
동천冬天에 꽁꽁 언 손 모아 꽃망울 맺고
봄 햇살 팽팽히 당겨
원망을 깨워 사랑으로 핀 꽃
그래도 오실 것만 같아
하늘 멀리 손 흔들어 길마중한다
기다림으로 피었다
회한의 덫 무게에 와르르 무너지는 꽃
내 할머니
♧ 시화낭송전 - 김혜천
배롱나무 두 그루가
일주문처럼 서 있는 계남공원
잣나무 숲을 따라 세워진 난간에
틈틈이 모은 시화 몇 점 내다 걸었다
까치이장이 깍깍깍 온 동네에 소식을 전하자
태양이 보낸 화환들이 여기저기서 배달되고
바람이 첼로의 낮은음으로 배경음악을 연주한다
잠시 후 산토끼 부녀회장이
다람쥐 청설모와 함께 도착하고
포로롱 날아와 나뭇가지에 앉은 산새가 낭송을 자청한다
산토끼는 턱에 손을 괴고 깊은 생각에 잠기고
청설모는 신바람 나서 오르내리기 바쁘다
산새의 낭랑한 낭송이 끝나자
손뼉을 치며 환호하는 다람쥐와 친구들
나뭇잎 풀잎 관객들도
그 시화낭송전 한번 썩 괜찮다며
끄덕끄덕 수런수런 와와와
흐르던 물도 잠시 길을 멈추고
♧ 올레ole* - 호월
내 주변은 항상
밝고 신나야 한다
올레, 올레, 올레
머리 싸매고 고민에 싸여야
깊은 삶이 아니니
모든 것 드러내 놓고
가볍고 신바람 나게
음악도 신나는 것 듣고
시도, 글도 신나는 것들만 읽는다
신나는 사람들과 사귀고
신나는 일을
신바람 나게 처리한다
우울은 저리 가라
고민, 고뇌도 자리 없다
지금 살고 있는 것
신나는 올레 아닌가?
세상은 올레다
올레. 올레. 올레!
오~ 야(Oh 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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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레(Ole) : 좋아! 됐어!(찬성·기쁨을 나타내는 감탄사)
♧ 유리문 - 정재원
내가 가지고 있는 자의
눈금 위를
맨발인 채 걸어갑니다
걷다 보면 내 발자국이 눈금이 됩니다
아프기도 하지만
유리문도 문설주와 돌쩌귀와
사이에 틈이 있어 열립니다
그리고 보입니다
투명하게 혹은 더 투명하게
수많은 도착지를 지나
아스팔트 위에
그림자를 내려놓는 도시 건물
머뭇머뭇
빙글빙글
제자리를 돌며 내 눈금 위를
유리문이 지나갑니다
-월간『우리詩』2019년 10월 376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