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Nm1a-IdZLnQ
* 찬송 :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베드로전서 5:7>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염려라는 것은 내가 해결할 수 없거나 해결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여겨질 때에 다가옵니다. 내가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면 염려가 생기지도 않지요. 염려 중에는 일상에서 수시로 생기는 사소하고 작은 염려도 있지만 때로는 내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중대한 위기나 불안한 상황 속에서 하게 되는 심각한 염려도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 시대의 성도들은 로마의 박해를 받고 있지요. 로마의 박해는 적당한 박해가 아니라 성도들에게 모진 고문을 하고 원형 경기장에서 굶주린 사자들의 밥이 되게 하거나 불에 태워 죽이는 화형을 집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위험을 앞두고 염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겠지요.
아주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내가 해결하거나 감당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하면 되는 것이고 내 능력으로 불가능하다면 내가 염려한다고 해서 뭐가 해결되겠습니까? 어차피 나로서는 안되니까 모든 것을 하나님을 맡길 수 있는 거죠. 문제는 맡겨놓고도 염려하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대부분 모든 염려를 주께 기도를 통해 맡기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맡기지 않거나 맡겨 놓고도 염려하게 되는데 그 바탕에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여전히 견고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하나님도 해결하시지 못할 거라는 생각,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해도 내 문제에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로는 하나님께서 해결하시되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안해주시면 어떻게 하나 이런 염려까지 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런 모든 생각들은 일단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거나 믿지 못하기 때문에 하게 되는 생각들이지요.
우리가 어느 순간에는 참 믿음이 좋고 견고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생각을 기쁨으로 하게 될 때도 있지만 이렇게 염려의 문제 앞에서는 여전히 아직도 내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가족들에 대한 염려, 특히 어린 자녀들의 미래에 대한 염려, 내가 사놓은 부동산이나 주식이 떨어지지 않을까 염려, 나이가 들면서 건강 염려증도 커져서 몸에 약간의 이상 증세만 느껴도 큰 병에 걸린 게 아닌지 염려하게 되지요. 우리가 믿음이 어느 수준까지 성장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웬만해서는 이 염려하는 것에서 완전하게 초월하기는 어렵지 않겠나 싶습니다.
저 역시 목사이지만 목사이기 때문에 교회로 인한 염려가 늘 있습니다. 교회가 발전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매주 성도들의 출석수를 보면서 다음 주는 더 적게 오면 어떻게 하나, 예산이 부족하면 어떻게 하나, 또 교회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이거 제대로 해결 못하면 어떻게 하나, 목사이면서도 염려에서 벗어나기는 참 어려움을 느끼지요. 그런데 우리의 믿음은 뭔가 완벽하게 해결되거나 완성 되어서 더 이상 흔들릴 이유가 없는 확고한 것도 있지만 죽을 때까지 해결되지 않아 계속 붙들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서도 염려할 수 밖에 없는 문제들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내 자녀가 불치의 병에 걸려서 늘 아파한다면 그 부모는 자녀를 위해 늘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맡긴다고 하지만 계속 아파하는 것을 보면서 염려 안하겠습니까? 그래서 어찌보면 이 염려의 문제도 야곱의 씨름처럼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 날까지 이 땅에서 계속 붙들고 씨름해야 할 과제일 겁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염려해도 그냥 공포스럽고 두려운 염려가 아니라 믿는 구석이 있는 염려여야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7절 후반부에도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우리는 돌보신다는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4장에서 이렇게 말씀했지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이런 약속의 말씀도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8:28절에서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런 약속의 말씀들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지요. 그래서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염려는 하지만 소망 없는 염려가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이 선한 결과로 주어질 것을 믿는 믿음과 소망 안에서의 염려인 겁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염려하신 적이 있지요. 제자들에게도 내가 죽게 되었으니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시기도 했구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실 때에 먼저 기도하셨던 것은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는 기도였지요. 즉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이시라 해도 눈 앞에 다가온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은 예수님도 염려하고 고민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지요. 예수님도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이 염려와 고민을 붙들고 씨름하신 겁니다.
나는 모든 염려를 주께 맡겼기 때문에 항상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만 산다고 말하는 사람은 어떤 면에서 예수님보다 믿음이 더 좋거나, 아니면 뭔가 대단히 착각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지금 로마의 박해의 고통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너의 염려를 주께 맡기라고 베드로가 권면했다고 해서 성도들이 그 때부터 다 기쁨과 즐거움으로 고난 당하고 웃으면서 죽임을 당했겠습니까? 우리의 염려를 주님께 맡긴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고민하고 염려하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고민스럽고 염려스러운 것을 통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신뢰하면서 끝까지 그 문제와 씨름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염려를 주께 맡기는 것이지요. 우리도 늘 이 새벽에 기도하면서 우리의 염려와 씨름하면서 이 염려를 주께 맡기고 있지 않습니까?
첫댓글 오늘 올리는 작업이 좀 늦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모든 고민과 염려를 주님께 맡기며 함께하게 하옵소서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염려해도 그냥 공포스럽고 두려운 염려가 아니라 믿는 구석이 있는 염려여야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7절 후반부에도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우리는 돌보신다는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4장에서 이렇게 말씀했지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이런 약속의 말씀도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8:28절에서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런 약속의 말씀들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지요. 그래서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염려는 하지만 소망 없는 염려가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이 선한 결과로 주어질 것을 믿는 믿음과 소망 안에서의 염려인 겁니다.아멘.
우리의 염려를 주님께 맡긴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고민하고 염려하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고민스럽고 염려스러운 것을 통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신뢰하면서 끝까지 그 문제와 씨름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염려를 주께 맡기는 것이지요.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