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일 선생 추모 학습여행에서 모두 둘러앉아 이야기 나눴습니다.
제 차례 때 낭독한 글입니다.
학습여행 전에 한덕연 선생님께서 전화하셨는데,
이정일 선생이 누구인지 모르는 이도 몇 명 함께 간다는 말씀에
원고를 미리 준비해 내려갔습니다.
이정일선생을그리며_2017_06.17_김세진.pdf
농촌 사회사업가 故 이정일 선생을 그리며
김세진
2016.6.17.
이정일 선생은 학창시절 ‘사회복지정보원’의 전국 사회복지대학생 활동을 통해 만나 사귄 친구로
15년 넘게 우정을 나눴습니다. 일 년에 한두 번 만났지만, 만날 때마다 그동안 공부하고 실천한 이야기를
나누며 절차탁마했습니다. 사회사업에 관해 깊이 나눌 수 있는 벗이 있어 든든했습니다.
이정일 선생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대기업에서 일하다가 사표를 던지고 광주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한
늦깎이 대학생이었습니다. 자기 인생, 자기 삶을 살고 싶었던 그가 택한 공부는 남을 이롭게 함으로써
자신도 풍요로워진다고 생각한 사회복지학이었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나이는 같았지만
저는 93학번이었고 이정일 선생은 99학번이었습니다.
이정일 선생은 학생 때부터 농촌에 살며 농촌에서 일하고 싶어 했습니다.
졸업 후 광주에 있는 장애인 거주시설에서 잠시 근무하다가 전남 곡성에 터를 잡았습니다.
곡성에서 일하기 전에 먼저 그 지역사회를 잘 알아보고 좋은 이들을 사귀기 위해 그 동네 부각공장에
취업해 반년 넘게 일했던 때가 기억납니다. 공장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대부분 좋은 분들이었었다며
들떴던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게 곡성에 자리 잡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주민들이 운영하는 봉조리 농촌체험학교
사무장을 맡았습니다. 폐교 옆에 딸린 작은 경비실을 손본 사무실에 머물며 일했습니다.
당시, 제가 진행하는 책모임 ‘꿈지락’ 회원들과 이곳으로 학습여행을 왔습니다.
경비실 아궁이에 불을 피워 고구마를 구워먹으며 마을 사무장으로 꿈을 들려주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그 폐교가 이정일 선생에 의해 다듬어져 지금 우리가 모여 앉은 이 봉조리 농촌체험학교가 되었습니다.
당시 이정일 선생과 이 학교 앞 작은 황톳길 걸으며 농촌과 사회사업에 관해 얘기를 나누곤 했었는데,
10년도 지난 지금은 버스도 오가는 큰 길이 되었습니다.
이정일 선생은 이곳에서 도시 아이들에게 농촌을 알리려고 노력했습니다. 학교 이름은 농촌 ‘체험’이지만,
농촌을 체험으로 만나는 걸 넘어 농촌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중요한 바탕임을 교육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특히 소농의 중요함을, 만나는 사람이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기회가 오면 열정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최근 농업 위기가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농촌복지에 대한 보다 많은 관심과 정책적 배려가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실제적이거나 구체적이지 못한 상황이다. 그것은 농촌지역에 대한 사회사업가들의 관심과 이해가
단편적(농촌 노인에만 주로 관심)이거나 그만큼 부족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제부터라도
농촌지역사회의 전반적인 복지문제에 보다 적극적이고 철저한 관심과 준비가 필요하다고 보여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농촌복지가 사회사업의 새로운 지평(영역)으로 인정되어야 하며,
농촌다운 사회사업 이론과 실천방법이 정립되어지고 교육되어야 함을 뜻한다.
또한 농촌지역에서 복지를 실천하고 있는 사회사업가들의 연대와 재교육이 절실히 요구된다.”
이정일, 「월간 Social Work」 2004년 6월호
그때, 그러니까 폐교가 아직 농촌체험학교로 바뀌기 전에 학교 경비실에서 지낼 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며
저와 꿈지락 회원들에게 소개한 책이 천규석 선생님이 녹색평론사에서 만든 「쌀과 민주주의」였습니다.
천규석이 누구인지, 녹색평론사가 무엇하는 곳인지도 모를 때였으니, 당시 이정일 선생의 생각이 저보다
한참 앞서 있었습니다.
농촌체험학교 사무장으로 그가 벌인 일은 다양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행사가 ‘알밤 영화제’였습니다.
2012년에 진행한 네 번째 산골 마을 알밤 영화제에는 저도 딸과 함께 참여했습니다. 관광객이 아니라
영화제 진행자로 ‘밤물 들이기’를 맡았습니다. 좋아하는 모닥불 마음껏 피우며 큰 솥에 물을 끓이고,
펄펄 끓는 물에 밤껍질을 넣어 밤물을 만들었습니다. 그 솥에 천을 넣어 밤물 스카프, 밤물 손수건을
물들였습니다. 제법 알려진 지역행사가 되어 그 당시 찾는 이가 많았습니다.
그날 저녁 노천극장에서는 별이 빛나는 밤하늘 아래 나무 사이에서 아이들 영화를 상영했습니다.
어른을 위해서는 체험학교 안 강당에서 ‘밀양 송전탑 문제’와 관련한 다큐멘터리 ‘밀양의 전쟁’을 상영했습니다.
영화제 이후 함께 둘러앉아 토론했는데, 이때에도 이정일 선생은 밀양 송전탑 문제를 도시를 위한
숙주가 되어버린 농촌의 문제로 설명했습니다.
이 일 외에도 농민회와 청년회 활동도 열심히 했습니다. 마을 도서관 일에 관여했고, 마을주민들과 함께
이런저런 모임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마을 어르신을 위한 문해교실을 아내 김희 선생님과 함께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여러 농촌 활동을 마침내 ‘민들레 농촌복지 사무소(민들레 살림터)’란 이름으로 모으고 다듬었습니다.
2013년 1월, 루빈과 봉조리에 일주일 머물렀습니다. 그때도 뒷산으로 도끼와 톱을 들고 올라가 나무 해 와서
불을 피웠습니다. 이삼일은 온종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무 일도 않고 저기 체험학교 앞 분수 옆에 앉아
모닥불을 피우며 있기도 했습니다. 체험학교 안에 텐트를 치고, 그 속에서 책 읽고 산책하며 지냈던 때가
생생합니다. 그때에도 때때로 어디론가 난 오솔길로 둘이 산책했는데, 그동안의 활동이 무르익어
‘민들레’ 이름으로 이제 무언가 제대로 해볼 수 있겠다고, 좋은 때가 왔다고 했습니다.
이정일 선생 장례식장에는 사람이 넘쳤습니다. 갑작스러운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와 애통해하는
이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이정일 선생이 떠난 그 날 밤, 마을 여러 사람이 모여 황급히 장례를 준비했고,
이어서 추모제를 기획했습니다. 다음 날 저녁에 진행한 추모제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활동한 사람,
전국 여러 사회사업가들이 모여 이정일 선생을 그리워했습니다.
그의 고향 친구는 이정일 선생이 좋은 직장 버리고 농촌으로 간다고 했을 때 어리석다고,
세상 물정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 그를 애도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의 인생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었고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농촌과 시골 사회사업을 생각하면 이정일 선생이 없는 빈자리가 더욱 커 보입니다.
이정일 선생의 여러 활동 중 귀한 일 하나는 후배들을 위해 사회복지대학생을 위한 농촌 사회사업 활동
‘농활’을 진행한 일입니다. 다섯 해 동안 진행한 이 활동에 참여한 사회사업 전공 대학생이 적지 않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도 그와 함께 대학시절을 보내며 꿈을 키웠던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방학 내내
이정일 선생 가족과 함께 지내며 이정일 선생 옆에서 그의 생활과 생각, 성품과 철학을 배웠습니다.
이 활동을 함께한 학생 중에는 농촌에서 살고자 뜻을 품은 이도 있습니다. 도시에 살더라도 농촌을 어머니처럼
여기는 마음을, 이정일 선생의 펄펄 끓는 열정 속에서 밤물이 들듯 물들어 갔습니다. 곡성에서 즐겁게 누리며
정겹게 사는 이정일 선생의 모습을 옆에서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런 맘이 깃들었을 겁니다.
그렇게 이정일 선생은 농촌과 사회사업을, 농촌과 사회사업 청년을 이어주는 다리였습니다.
끝으로 2008년 8월 19일자 광주드림신문에 실린 이정일 선생의 기사 일부를 읽고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이 기사가 이정일 선생님이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게 합니다.
“정부에서 농촌에 대한 지원을 쏟아내긴 했지만 현실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더라고요.
일단 농촌으로 들어가 지역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도시화가 된 농촌보다는
농촌다운 농촌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에 곡성으로 가게 됐고요.”
“가정봉사원을 파견하는 센터를 알게 돼 거기에 들어갔죠. 곡성 전역을 돌아다니며
어르신들 목욕을 시켜 드리는 일이었어요. 1년 반 그렇게 하니까 내가 곡성에서 해야 할 일이 보였고,
연락이 왔어요. 봉조리 사무장 자리가 있으니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요.”
“대학을 다니며 농촌복지에 관심 있는 사람들과 모임을 하고, 생태주의·생명에 대해 공부하면서
농촌은 열악한 곳이 아니라 삶 그리고 사회의 대안이 담겨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됐죠.
사회복지적으로도 대안이 있는 곳이 농촌이에요. 도시화된 삶에서 국가가 사회복지를 지원하기 위해
계속해서 비용을 들여야 하는데 반해 이미 농촌에서는 마을공동체를 통해 자체적으로 보살피고
나누고 돕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약화됐지만 그것을 다시 살려야 농촌의 희망을 이어갈 수 있어요.”
“농촌은 그러지 않을 것 같은데 사회적 관계가 분리된 경우들이 있어요.
몸이 안 좋아 관심이 필요한 분들이 있으면 다른 마을 분들에게 한번 놀러 가라고 말을 전하기도 하고,
소식을 전하기도 합니다. 주선하는 역할이라고 해야 하나요. 아내는 이주여성들을 대상으로
한글 교육을 하고 엄마들끼리 음식을 함께 만들어 나누기도 하고 그래요.”
“일을 할만한 사람들도 많지 않고 쉬운 일이 없죠. 그렇지만 5년 전에 비하면 지금은 많이 나아졌어요.
지역공동체가 탄탄해지다 보면 마을에 또다른 희망이 생길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첫댓글 이정일 선생이 참으로 잘 살있구나 싶습니다.
고마워요 세진~
제 마음도 편해지는 글이었습니다. 멋지십니다.
친구를 사귀어 우정을 나누어 후배들에게 알려준 세진선생님도 멋지십니다.
글을 찬찬히 읽으며 이정일 선생님의 사회사업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일을 하면서 가끔 제 몸을 사리려하는 모습들과 비교되어서 많이 부끄러웠어요. 제 모습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글 써주시고 공유해주신 김세진 선생님 감사힙니다.
고맙습니다. 김세진 선생님, 그리운 이정일 선생님 .... 잊지 않겠습니다.
좋은 직장 다니다가 농촌으로 간 이정일 선생님.
곡성 부각공장에 취업해서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고 들뜬 이정일 선생님.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농촌체험학교 사무장으로서 꿈을 이야기하신 이정일 선생님.
매실효소를 거르며 아이처럼 맛있다, 맛있다 하셨던 이정일 선생님.
농촌과 소농 이야기를 할 때면 목소리가 높아지는 이정일 선생님.
'이제 무언가 제대로 해볼 수 있겠다고 좋은 때가 왔다고' 하신 이정일 선생님.
후배들과 저를 만날 때 기뻐하시고 사랑해 주신 이정일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랬지요.
선생님 들려주신 글 다시 읽고 싶었는데
이렇게 공유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이정일 선생님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이로서
선생님께서 미리 준비하여
친절히 알려주셔
추모 학습여행을 잘 누렸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김세진 선생님. 이정일선생님의 아주 좋은 동료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