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Life-위기의 순간들
내가 세상을 살아오는 동안 숱한 위기의 순간들이 있었다.
태풍이다 자동차 사고다 연탄가스 중독이다 해서 죽을 고비를 몇 번씩이나 넘긴 것이 그렇고, 명문의 고등학교 시험에서 낙방한 것이 그렇고, 군 생활에서 영창 갈 뻔했던 일이 그렇고, 집안이다 친구다 해서 청탁을 받아 사건에 개입했다가 들킨 것이 그렇다.
그러나 그 위기의 순간을 잘 넘겼기에, 행복하다 행복하다 하는 내 오늘의 지금 이 순간에 서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 의지로 그 위기를 넘긴 것은 아니다.
때론 상대가 모른 척 눈감아주는 운도 따랐다.
나도 미혼의 젊은 시절에는 그렇게 다가오는 위기의 순간들을 잘 감당해 내지를 못했다.
그래서 곧 좌절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남 탓으로 세월을 보냈다.
먼저 자식들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아버지를 탓했고, 아버지를 탓해본들 그 아버지에게서 뾰족한 대책을 얻어낼 수 없자 이제는 서른셋 나이로 일찍 죽은 엄마를 탓했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탓했고, 집안을 탓했고, 이웃을 탓했다.
내 탓은 하나도 없는 줄로 알았다.
내 그렇게 좌절의 늪에 빠져 있을 때, 비슷한 처지의 몇몇 내 친구들은 힘겹게 넘긴 그 세월들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앞으로 내달리기만 했다.
내 한 때는 그런 친구들까지도 탓했다.
왜 나를 안 데리고 가고 혼자 가느냐 하고 탓했다.
몰래 해외여행을 다니는 친구를 탓했고, 아이들 해외유학을 시키는 친구를 탓했다.
말하자면 삐친 것이었다.
그랬던 내게 반전의 기회가 왔다.
42년 전으로 거슬러, 1973년 6월 3일에 국가공무원 검찰사무직 9급인 검찰서기보 시험에 합격한 것이 그것이다.
그때 맨 먼저 내 생각 속에 떠오른 속담이 한 토막 있었다.
바로 이 속담이었다.
‘말은 제주로, 사람은 한양으로’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대학 진학을 하지 못한 나로서는, 검찰수사관으로서의 초임 발령부서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겠다고 내다본 것이다.
물론 고향땅에서 가까운 대구지방검찰청상주지청을 희망해서 근무하는 것이 경제적으로나 인간관계로나 내게 유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가는 거기에서 터 잡아 살게 될 것이고, 결국 서울에서 한 번 살아볼 것이라는 내 꿈은 너무나 까마득해서 이룰 수 없는 헛꿈이 될 것이 명약관화했다.
그래서 그 속담을 생각하면서, 견뎌내기 좀 힘들더라도 초임 발령은 일단 대검찰청으로 받는 것으로 내 작정을 하고 말았다.
근무 희망지를 물어왔을 때, 제 1희망지도 대검찰청이라 했고, 제 2희망지도 대검찰청이라 했고, 그리고 제 3희망지는 서울고등검찰청이라고 했다.
대학교를 다니지 못한 그 학벌이 문제가 되어서 최고 검찰청인 대검찰청에서 받아주지 않을 것을 예상해서, 그 대안으로 서울고등검찰청을 제 3희망지로 선택한 것이었다.
그때의 내 그 선택이 내겐 새롭게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이었다.
아내를 만나게 된 인연이 바로 그 첫 발령지인 대검찰청에서였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내게 다가온 모든 순간들을, 내겐 오로지 기회의 순간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총무업무라든가, 검찰사무보고업무라든가, 범죄정보업무라든가 해서, 일반의 검찰수사관들이 업무량이 많다는 이유로 대체적으로 기피하는 업무들을 나는 스스로 나서서 맡았다.
남들이 기피하는 업무에서 상관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고, 다음의 보직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한 계급 한 계급 승진할 때마다 지방으로 전근을 해야 했던 그동안의 검찰내부 인사방침도 내 앞에서는 예외를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31년 9개월의 내 검찰수사관 이력에서 단 한 번도 서울을 벗어나 근무한 적이 없다.
바로 그 보직의 안정성은 내 가정의 안정과도 연결되었다.
자랑스러운 맏며느리를 맞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 내 사랑하는 손녀 서현이를 얻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가정의 안정과 연결되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게 세상을 살아오면서 내 가슴에 새겨 담은 것이 곧 ‘위기는 기회’라고 하는 삶의 철학이었다.
지난 2015년 10월 29일 목요일의 일이었다.
이른 아침시간인 오전 7시쯤 해서, 내가 회원인 충북 음성군 삼성면의 젠스필드cc를 찾았다.
아내와 동서가 동행했고, 그리고 내 건강을 챙겨주고 있는 주치의인 서초동 우리 법무사사무소 ‘작은 행복’ 인근의 서울내과 이기형 박사가 동행을 했다.
첫 홀에서 막 티샷에 들어갈 찰나였다.
아무래도 뭔가 허전했다.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이것저것 주섬주섬 챙겨봤다.
그러는 중에 왼손이 바지 뒤쪽 주머니를 찾아 이리저리 짚다가 화들짝 놀라버리고 말았다.
그 주머니에 꽂혀 있어야 할 지갑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그날은 내가 스폰서를 맡기로 한 골프라운딩이어서, 현금도 꽤나 들어있어 그 돈을 만약 잃어버리면 어쩌나 걱정스러운 판인데, 그보다도 늘 쓰는 신용카드가 더 문제였다.
생각을 되짚어가 봤다.
화장실이었다.
클럽하우스에서 옷을 갈아입고 필드로 나오는 도중에 잠깐 화장실에 들렀던 생각이 난 것이다.
그리고 그 화장실에서 왼쪽 뒷주머니에 꽂아놨던 지갑을 빼서 화장지 덮개 위에 올려놓은 것까지 생각이 난 것이다.
골프라운딩을 할 때마다 지갑을 들고 나와 왼쪽 뒷주머니에 꽂아놓고는 하는데, 그 지갑을 꽂을 주머니가 마뜩하지 않아서 그 주머니에 꽂아놓게 되는 것이고, 화장실에서 그 지갑을 빼놓는 것은 언젠가 그 지갑을 꽂은 채로 변기에 앉았다가 그 지갑이 변기 속으로 빠져 낭패를 본 경험이 있어서다.
그런데 또 문제인 것은, 그 빼놓은 지갑을 화장실 볼일을 보고 나올 때 자칫 빠뜨려놓고 나올 때가 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화장실에서 지갑을 빼놓을 때는 계속해서 지갑 생각을 하면서 볼일을 보고는, 나올 때 챙겨 나오고는 하는데, 이날만큼은 생각은 계속했는데, 막상 뒤처리를 다 끝낸 그 순간에 깜빡하고 그 지갑 생각을 잊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 사이에 누군가가 내가 썼던 그 화장실을 들어갔다면, 난 그대로 낭패가 되고 말 일이었다.
그렇다고 티샷을 하려는 그곳 티그라운드에서 화장실까지 쫓아갈 수도 없었다.
한 시가 급한 상황에서 쫓아가기에는 꽤나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위기의 순간이었다.
일단 프런트로 전화를 걸어봤다.
그 대화가 이랬다.
“감사합니다. 프런트 박하나입니다.”
“나 기원섭이야. 저기 말이지...”
“아! 지갑때문이시죠?”
“아니, 그걸 어찌 알았지?”
“손님이 방금 여기 맡겨두셨어요.”
“그랬었구나. 고마워. 내 곧 갈게.”
그렇게 통화를 끝내고 냅다 달려 프런트를 찾았다.
박하나씨가 넘겨주는 그 지갑을 받는 순간, 내 너무 고마운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하나씨, 이 지갑 맡겨주신 분 누구신지 알지? 내게 좀 알려줘.”
“그냥 맡겨만 주시고 골프라운딩을 나가셨는데, 나중에 라운딩 끝내고 오시면, 확인해서 알려드릴게요.”
그렇게 새로운 인연 하나가 걸쳐졌다.
위기가 또 하나의 기회가 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