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느낀 점..
음.. 제 글에 답글 형태로 달려 있어서... ^^;
1. 국가의 개입
공동체의 자연력을 되살리는데 목적이 있다면,
국가의 개입은 공동체의 자연력을 살리는 방향으로 '최대화'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국가의 개입 자체가 최소화 되어야 한다는 개념보다는
국가의 개입 자체가 어느 방향으로 향해야 하는지에 대한 개념이 맞다고 봅니다.
2. 최소한의 직접 서비스 개입은 어느 수준?
정부가 의도적으로 악용하는 경우를 배제하고 생각해 봅니다.
최소한의 개입은 인정하였는데,
그 최소한의 개입이라는 것은 어느 수준일까요.
공동체성이 분리된 이익사회에서는
결국 공동체성으로 할 수 없는 부분도 존재하겠지요.
따라서 공동체성을 활성화한다 하더라도,
관계 속에서 직접 나눔 실천으로 해소하기 어려운 부분은
결국 공동체가 합의하여 공공적인 방식으로 개입하자고 결의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또한 공동체라는 틀에서 결정한 것으로 볼 수 있을 듯 싶은데요.
그것이 국가 단위의 사회 구성원이 합의한 것이라면,
이러한 국가의 개입 또한 공동체 개입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3. 국가 개입을 분리해서 보면 어떨까요?
국가 개입이 최소화 되어야 한다는 점은
공동체성의 자연력이 살아있거나,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대체하여 훼손하는 부분에서는 최소화해야 한다고 봅니다.
대신 공동체성을 살리는 일 자체에는 국가 개입을 '최대화'해야 겠지요.
또 공동체성을 최대한 살려 관계 속에서 공생하도록 돕되,
그것으로 해소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공동체 구성원의 합의에 따라 국가의 복지 개입 또한 최대화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4. 전제는 지금 사회 변화를 일단 인정한다는 전제.
그런데 지금까지 제가 전개한 논리는 변화된 현 사회를 일단 인정한다는 전제입니다.
만약 간디 선생님처럼 마을 단위의 소박하고, 자급자족의 사회를 이상향으로 설정한다면,
국가의 개입은 마땅히 최소한으로 줄여야 할 듯 싶습니다.
국가의 개입을 인정한다는 것 자체는
마을 단위의 소박하고 자급자족의 사회 자체를 어느 정도 훼손하지 않고는
현실화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결국 어떤 사회를 꿈꾸는가, 어떤 사회를 이상향으로 보는가에 따라
국가 개입의 수준도 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5. 고민
마을 단위의 소박하고 자급자족의 사회를 이상향으로 보고 이를 이루고자 한다면,
국가의 개입 등은 논의할 필요 조차 없어지거나, 논의하더라도 매우 희귀한 일이 될 것입니다.
매우 단순하게 상황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사회 전체를 어떻게 바꿀 것인지에 대한 큰 그림과 전략이 있고,
각 분야가 함께 협력하는 가운데, 사회사업이 연동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한 큰 그림과 전략에 연동하여 사회사업의 역할을 실천할 때
비로소 전략적 실천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만약 큰 그림과 전략을 그리고, 각 분야와 연동하여
사회사업이 맡아야 할 몫을 맡아 실천하는 것 없이
나만 그렇게 실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지..
행여 어쩌면 자기 만족에 머무르는 것은 아닌가 하고 계속 자문하게 됩니다.
어쩌면 실천가이기 때문에 자문하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또 다른 측면에서보면
항상 사회는 부족한 부분이 있었고, 그런데 부족한 부분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서 덧붙이고 깎고 해서
또 다른 사회를 만들고, 또 만들고 하는 과정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 사회가 이렇게 복잡해졌다고 봅니다.
그런데 과연 사람들은 사회를 단순하게 만들어갈까 아니면
문제를 해소한다고 또 복잡하게 덧붙이는 방식으로 갈까 생각해보면,
지금까지의 역사가 덧붙이는 방식 즉 복잡한 방식을 선택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결국 지금 분절화되고 파편화된 사회마저도 이러한 정반합의 결과로 본다면,
사람들은 이 상태에서 부족한 공동체성을 또 다른 형태로 덧붙이는 방식을 선택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두 가지 면이 제게 고민입니다.
큰 그림과 전략 그리고 다른 분야와의 연동 없이 그냥 내 분야만 이상을 향해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큰 그림과 전략을 현실화할 능력이 없다면,
오히려 사람들이 사회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발전시켜온 것을 따라
공동체성을 지금 사회에 맞게 덧붙이는 방식으로 일해야 하는 것인지..
항상 이 두 가지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습니다.
PS. 제 글에 답글로 달려있다는 핑계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썼습니다.
매번 이렇게 길게 쓰니, 힘듭니다.
이것도 고쳐야 할 듯 한데...
첫댓글 양원석 선생님 고맙습니다. 쉽지 않은 논의를 이끌어 주시니 흥미롭습니다. 최근에 이데올로기에 대해 공부하면서 사회와 국가체제속에서의 사회복지를 생각하게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문명의 한계'라 생각됩니다. 인간 소유의 본성을 마음껏 인정해주는 자유주의와 그것을 옹호하는 자본주의의 필연적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이상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국가의 보편적 복지와 공동체의 복지생태로 정리할 수 있다고 봅니다. 보충적이거나 선별적인 복지, 따로 떼어 특별하게 주는 복지를 넘어 개인의 인권(생존, 자유, 자주)을 실현할 수 있는 보편적 복지가 필요합니다.
제도, 서비스로 해야한다면 보편적으로, 보통사람의 것으로 해야겠군요. 특별히 드러나지 않게, 따로 만들어 돕지않게...
이는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국가가 책임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국가의 책임이 커질 수 록 국가에 예속되고 공동체의 본성을 잃게됩니다. 그렇다고 국가를 부정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주장과도 다릅니다. 철저히 개인의 자유, 성장 할수 있는 가능성, 계급 변화의 기회를 보장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서 나타나고 있듯 인간의 성장 욕구를 격한 경쟁으로 몰고 가거나 부추기기 때문입니다.
자유주의자들의 '자유'와 공동체의 '자율성(자연력)'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경쟁을 지향하는 '자유'와 공생을 위한 '자유'... 저는 이렇게 이해했습니다만..
따라서 개인의 자유(존재)를 전제로 하면서도 공생을 크게보는 생명이나 생태주의 사상이 필요다고 봅니다. 이는 문명의 전환으로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국가나 사회의 이데올로기라면 이와 더불어 공동체의 진보(발전)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는 지금의 도시공동체안에서 해법을 찾기는 힘들다고 봅니다. 선생님 말씀처럼 덧붙이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본성에 흐르는 공동체적 나눔과 보살핌을 깨워 생동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실존하고 있는 농촌마을공동체의 삶의 구조에서 이어 받아야 한다고 봅니다. 농촌마을공동체는 수천년 아니 인간이 정착생활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유지해오며 나눔과 보실핌의 삶의 구조 견고히 만들어왔습니다. 따라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덧붙이는 것이라기 보다. 우리 공동체에 흐르는 본성을 깨워 살리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지금당장 국가나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변화시키는 일에 사회사업가가 매진할 수 는 없다고 봅니다. 단, 시대의 문명을 직시하고 대안을 성찰하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까지는 대상화하고 따로 떼어 특별히 하는 전달체계로써의 역할만을 해왔다면 보편적인 복지와 더불어 공동체의 나눔과 보살핌의 삶을 깨워 생동케하는 일에 더욱 집중해야한다고 봅니다. 파편적이고 협의적인 사회와 그와 같은 사회사업이 이제 변화해야 한다고 봅니다. 전통적 사회복지 그 틀을 벗어날때 진정한 사회사업의 길이 보이리라 생각됩니다. 저도 쓰나보니 댓글치곤 장문이 되어버렸습니다.
장문으로 남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
1. 보편적인 복지는 기본적으로 국가 또는 더 큰 사회 시스템을 전제로 한다고 봅니다. 농촌마을공동체의 삶의 구조를 이어 받는다는 것은 실제로 마을 단위의 사회 구조로 회복하자는 의미인 듯 싶습니다. 그런데 마을단위 사회 구조에서 과연 보편적 복지가 실행 가능한지 궁금합니다. 제가 말씀하신 '보편적 복지'의 의미를 다르게 이해한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2. 실존하고 있는 농촌마을공동체가 있기에 농촌마을공동체의 삶의 구조를 이어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농촌마을공동체도 외부와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농촌마을의 공동체성도 점차 희미해지고 있는 것도 실존적 모습 아닐까 싶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농촌마을공동체의 삶의 구조를 이어 받는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도시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인지 더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도시를 농촌마을공동체화 하도록 하자는 것인지, 도시성은 유지하면서 마을 단위 공동체로 만들자는 것인지... 좀더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길어지면 이 글에 답글 형태로 새로 적어주셔서 좋을 듯 싶습니다. 댓글은 아무래도 불편해서요.^^
저도 공동체의 회복을 고민하다 보면 항상 그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이미 사회가 변화된 상황에서 나 혼자 또는 일부의 사람들만이 그런 노력을 한다고 하여 변화될 수 있을까? 사회라는 것이 여러 분야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한 분야만의 노력으로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양원석 선생님의 말씀처럼 큰 그림과 전략이 필요하지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큰 그림과 전략도 분명 소수의(또는 한 사람의) 노력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끊임없는 고민과 실천이 주변에 영향을 주고, 그것이 파장을 이루어 사회의 변혁을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나 혼자만, 사회사업가만 그렇게 한다고 변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때면, 모든 변혁은 소수에서 시작되었다는 생각으로 다시 힘을 냅니다. 그리고 분명 다른 어딘가에는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고, 그러한 사람들과 연대하여 지지하고 함께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양원석 선생님과 함께 하였던 책모임에서 이와 같은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네트워크의 시대에는 거리의 제한이 없어지니, 연대와 협력을 통한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새로운 공동체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보니 사회복지정보원이 이러한 형태의 공동체군요. ^^
임병광 선생님, 고맙습니다. 저도 글을 적고 난 후에 선생님과 같이 생각하고 있었는데, 공감합니다. 모든 변혁은 소수에서 시작되었고, 누군가는 함께 꿈꾸고 있을텐데.. 이를 이어주는 것이 네트워크 시대에는 좀 더 가능해지겠지요. 임병광 선생님께 항상 도움 받습니다.
제가 오히려 양원석 선생님께 늘 배웁니다. 고맙습니다..
댓글 가운데, 사회사업가로서의 지체의식과 역사의식을 발견합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