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한의 생계 위협을 받지 않으면 거기서부터의 소득 증가는 행복 증가에 크게 이바지하지 않는다는 군요. 1973년 미국의 경제학자 리처드 이스털린(Richard A. Easterlin) 교수는 미국·프랑스·영국과 같은 선진국 보다 바누아투·방글라데시와 같은 가난한 나라의 국민 행복지수가 오히려 높은 점에 착안하여 소위 ‘이스털린의 역설(Easterlin Paradox)’이라는 학설을 만들어내었습니다. 행복지수란 국내총생산(GDP) 등 경제적 가치도 참고하겠지만 삶의 만족도, 미래에 대한 기대, 실업률, 자부심, 희망, 사랑 등 인간의 행복과 삶의 질을 포괄적으로 고려해 산출한 지표를 말합니다.
인간의 행복에 영향을 주는 조건들이라 여겨졌던 것들 이를테면 국내총생산량이라든가 개인 소득, 사회보장제도, 고용의 안전성, 개인 건강과 받은 교육 정도, 휴가활용 등이 국민 행복의 기준이 되지 않다는 것이 이스털린의 역설인 셈이지요. 선진국에서는 생활환경이 개선되고 보건 상태가 호전되고 질병 예방대책이 강화되자 평균 수명이 길어져 고령화 사회 또는 고령사회로 바뀐지 오래입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들은 왜 바누아투나 방글라데시보다 행복지수가 낮을까요.
우리나라는 2019년에 ‘3050’클럽에 가입한 세계 일곱 번째 국가입니다. 국민소득 3만 불에 인구 5천만 명이 넘는 국가에 포함되었으므로 우린 이미 경제대국이라 할 수 있지요. 선진국이라 해도 되겠지요. 반도체, 자동차, 휴대폰, 가전제품 같은 제품들이 세계시장을 석권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행복 관련 지표는 세계 최하위권이라니 말이 안 됩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34개 회원국을 비교한 지표를 보니 한국이 노동시간 2위, 산재사망률 1위, 자살률 1위 등등 이유로 국민행복지수 33위가 한국이랍니다. 거기다 출산율까지 꼴찌라고 적혀 있더군요. 미국 여론조사기관의 조사에 의하면 ‘삶의 질 지수’는 조사 대상 135개국 중 한국이 75위입니다. 필리핀(40위)·인도(71위)·이라크(73위)보다 낮다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왜 이런 상황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맹렬한 반성이 있어야 될 것 같지 않습니까. 거기다 한국은 놀라울 정도로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UN이 정한 바로는 65세 이상 노인인구 비율이 전체 인구의 7% 이상인 사회를 고령화 사회, 65세 이상 노인인구 비율이 14% 이상이면 고령사회, 21% 이상이면 초고령 사회로 구분합니다. 한국은 2,000년 7월 1일을 기준으로 65세 이상의 인구가 전체 인구의 7.1%를 차지하였으니 이미 고령화 사회에 진입했습니다. 몇 년 전 통계청의 예측은 2020년경이면 노인인구의 비율이 14%를 넘어서서 본격적인 고령사회로 접어들 것으로 전망했는데 올해는 2021년이고 예측처럼 고령화 사회가 되었습니다. 몇 년 안 되어 한국은 초고령 사회로 진입할 전망이라나요. 왜 이리 급속히 고령 사회로 진입하는가. 그것은 사망률 감소로 평균 수명이 증가하였고, 출산 붐 세대에 태어난 연령대가 노년층을 형성하였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되면 한국 사회는 어떻게 되는가. 오래 사는 게 행복한가하는 문제에 직면합니다. 국가적 측면에서 보면 노동생산성이 낮아 경제 성장이 둔화될 우려, 경제적 빈곤을 호소하는 노년층이 늘어날 우려, 조세감소와 사회보장 기여금 수입의 감소 우려, 연금수급자 증가와 노인 의로비 및 복지비가 상승하면 재정 적자폭이 커질 우려가 있고, 여기에 젊은층은 근로소득세가 커질 위험도 있지요. 노인층은 빈곤·질병·고독과 싸워야 한다면 오래 사는 게 행복할 수만은 없습니다. 국가적 입장에서 노인들이 골칫거리가 된다면 이것 참 곤란한 사회문제 아닙니까.
물론 현재 한국은 미국, 프랑스 등 주요 선진국 보다는 고령 인구비율은 낮은 편이지만, 통계청에 따르면 2050년대에 이르면 이들 나라를 앞지를 것이라는 전망마저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령사회에 대비해 국가는 제도와 의식을 재정립하고, 선진국 형 노인복지체계를 마련하여 왔거나 이를 위해 정책 수립을 하고 있는가, 뭣보다 출생률을 높이는 현실적 정책을 이미 수립하였거나 진행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당장 서울 집값 상승 문제 못지않게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런 사회적 문제 속에 우리는 이미 노령층에 속하고 젊은층에게 우리를 맡기고 살판이라면 그들을 신뢰하고 정부를 신뢰하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오래 산다는 게 국가에 짐이 되거나 자신의 행복을 보장받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비극이지요. 비극이지요.
1978년 이스털린 교수는 또 다른 연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성인을 대상으로 상품이 적혀 있는 목록을 보여주고 '갖고 싶은 것'과 '현재 가진 것'을 선택해보라고 했습지요. 16년 후 같은 참가자에게 같은 목록을 주며 다시 선택해 보라 했더니, 놀랍게도 참가자 거의 전원이 과거에 갖고 싶은 것으로 선택했던 물건을 현재 보유하였거나 아직도 못 가졌다면 가지고 싶다는 것이고, '갖고 있는 것'으로 선택한 물건을 현재도 이걸 갖고 싶다고 표시했다 합니다. 이것은 현대인의 일상적 사고는 변화가 크게 있는 것이 아니라 '쾌락의 쳇바퀴(hedonic treadmill)'에 갇혀 살기 때문에 반복적 삶을 고수하고 있음을 밝힌 학설입니다.
이런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하버드대학 심리학과 대니얼 길버트(Daniel Gilbert, 1957~) 교수는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을 상대로 연구해보니, 로또가 주는 행복의 효과는 길어도 평균 3개월이고, 이 시기를 지나면 행복감이 사라진다는 것을 확인했지요. 출세했다는 사람들마저 평균 3개월이 지나면 예전과 똑같은 크기만큼의 행복 또는 불행을 느끼며 산다는 이것이 바로 '쾌락의 쳇바퀴'학설입니다.
음식을 생각해 봅시다. 한국인들이 외국 여행갈 때에 고추장과 김치를 싸들고 가거나 아니면 현지에서 한국 식당을 찾아가 이걸 먹으려 합니다. 우린 왜 이런 식품에서 탈출을 하지 못할까요. 이게 바로 쾌락의 쳇바퀴 속에 우리가 갇혀 산다는 증거 중 하나입니다. 현실의 불만족에 갇힌 사람들은 아무리 돈이 많고 권세가 높다 해도 여전히 불만족 속에 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상태의 쳇바퀴를 돌리고 살겠지요. 쾌락의 쳇바퀴에 우리가 체포되었음을 알았다 해도 여기서 벗어날 기미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오래 산다면 기껏 더 많이 쳇바퀴나 돌리게 되는 것이 우리 인생이라 생각하니 서글퍼집니다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