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말까지 놀랍게 부흥하던 한국의 개신교가 21세기로 접어들면서 급격히 쇠퇴하고 있다는 통계가 우리를 긴장시키고 있다. 한국갤럽과 통계청의 발표에 의하면 개신교 교인수가 1985-1995년 사이에 227만 명 증가하여 35.0%의 높은 성장률을 보였는데, 1995-2005년 사이에는 교인 수가 876만 명에서 862만 명으로 14만 명 감소하여 1.6% 감소했다고 한다. 그 후로 개신교의 교인수가 계속 줄어서 최근에는 600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 들린다. 이러한 개신교인의 감소를 개신교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가 저조한 것과 관련지어서 생각할 수 있다. 2010년에 기윤실(기독교실천운동)이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해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개신교를 신뢰한다는 사람이 17.6%였는고 신뢰하지 않는다는 사람은 48.9%에 달했다. 그리고 종교 기관의 신뢰도 순위는 가톨릭이 41.4%, 불교가 33.5%, 개신교가 20.0%로 개신교가 최하위로 나타났다. 그런데 최근에 나온 불교사회연구소에서 조사한 사회적 신뢰도에 따르면, 가톨릭이 39.8%, 불교가 32.8%, 개신교가 10.2%로 여기서도 개신교가 최하위였다. 이러한 통계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먼저 교인의 수가 줄어들고 있는 개신교의 사회적 신뢰도가 가장 낮다는 점, 그것도 아주 낮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같이 예수님을 믿는 가톨릭의 신뢰도가 개신교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높다는 점이다. 그리고 1995-2005년 사이에 가톨릭의 교인 수가 295만 명에서 515만 명으로 220만 명이나 증가하여 무려 74.4%의 놀라운 성장을 이룩했다. 같은 기간 동안에 개신교의 성장이 멈추고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는 것과 비교하면 우리 개신교에 큰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교회의 부패와 타락
개신교의 사회적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개신교의 문제는 물론 물질적 타락, 목회자의 자질 문제, 성적 타락, 가짜 학위, 편향적 성경이해, 신학의 보수성 등 복합적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많은 것을 거론할 수가 없기 때문에 요즘 많이 언급되는 교회의 물질적 타락과 부패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교회 재정의 횡령, 비자금 조성, 금권선거, 세습에 대한 비판이 많이 나오는데, 이 모든 것이 돈과 관련이 있다. 요즘 중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재정적 비리가 터져 나오고 있는데, 개신교에 대형교회가 많은 것은 개교회주의 때문이다. 개혁자들은 교황청의 획일적인 통제로 인해서 권력이 집중됨으로써 교회가 부패하는 것을 보고 개교회주의를 내세웠다. 그래서 개신교에서는 노회나 연회가 있고, 그 위에 총회가 있지만, 각 교회는 상급 기관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자체의 재정을 가지고 운영한다. 개교회주의는 자본주의적인 자유경쟁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게 마련인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교회들 사이에도 나타나서 큰 교회와 작은 교회의 차이가 크다. 인간은 이기적인 유전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운영하는 교회에서도 자기 교회를 더 크게 키우려고 힘쓰게 마련이다. 한국에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있는 것을 보면 한국인의 이기적 유전자는 다른 민족보다 더 강한 것 같다. 한국교회에서 재정적 비리가 발생하는 것은 우선적으로 교회에 돈이 많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했는데, 교회에 돈이 남아돈다는 것은 구제, 선교, 미자립 교회 지원 등 재정을 써야 할 곳에 별로 쓰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자기 교회를 키우는 일에만 힘쓰고 교회를 분립하지도 않았다. 가톨릭을 보면 자꾸 교회를 분립한다. 각 지역에 교회를 세우고 그 지역의 교인들은 새로 세워지는 교회에 출석하도록 한다. 이것은 중앙에서 통제하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시행될 수가 있다. 교회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서 개교회주의를 내세웠는데, 그 각 교회의 자유경쟁으로 인해서 대형교회가 나오고 그 대형교회의 부패가 만연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개신교의 개교회주의는 장기목회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가톨릭에서는 중앙에서 통제해서 사제들이 5년 마다 옮겨 가면서 사목하고 있다. 그런데 개신교에서는 각 교회의 자율에 맡기기 때문에 한 목사가 20년이고 30년이고 한 교회에서 장기간 목회를 할 수 있다. 이 장기목회가 목사의 권위의식을 키우고 교회를 부패시키는 주범이다. 그런데 개교회주의를 유지하는 한 장기목회를 막을 방법을 찾기가 어렵다. 교인들의 침묵
장기목회를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여러분들이 경험하신 대로 목사는 자기 사람으로 둘레에 성벽을 쌓아 올려서 자기 아성을 만든다. 그래서 장로들의 회의에서 목사는 자기 뜻대로 안건을 처리할 수 있다. 신앙심이 깊은 사람일수록 교회 안에서는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장로들은 웬만한 것이면 자기주장을 접고 목사의 뜻에 따르려고 한다. 침례교처럼 장로 제도가 없는 교회에서도 위원회의 위원들은 다른 교회의 장로들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회무에 임한다. 이러한 회무진행이 장기간 계속되면 장로들이나 위원들은 거수기로 변하고 만다. 정치권에서도 장기집권을 하면 부패하는 것처럼 교회에서도 장기목회를 하면 부패의 균이 증식하게 되어 있다. 한 곳에 오래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니까. 더구나 목사들은 기름부음 받은 목사를 비판하거나 반대하면 벌을 받는다고 교인들을 세뇌시켜 왔다. 모세의 누이가 모세를 비판했다고 문둥이가 되었다든지,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고 하나님께 맡겼다는 고사를 인용하면서 목사를 비판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장로가 목사의 의견에 반대하는 경우 그 장로의 부인이 남편에게 그렇게 하면 벌을 받는다고 그러지 말라고 말한다. 남편이 고집을 세우면 부인은 다 당신을 위한 것이고 우리 가정을 위한 것이라고, 목사를 비판했던 김 장로가 병들어 죽는 것을 보지 않았느냐고 말한다. 그러면 남편은 힘이 빠진다. 어느 교회에서는 새로 선출된 장로들을 교육시키는 과정에서 목사에게 절대 순복할 것을 서약하게 했다는 기사가 신문에 난 일도 있었다. 이렇게 목회자들이 장기목회를 통해서 중직자들의 입을 봉하고 자기에게 충성하는 아멘 부대를 육성하여 자기의 아성을 구축하면 전횡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되면 교회재정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 그래서 교회 돈을 횡령하고 비자금을 만들고 자녀들에게 교회를 세습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한국교회를 부패의 늪으로 끌고 들어가는 사람들은, 좀 심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양의 탈을 쓴 늑대거나 천사의 옷을 입은 사탄이라고 말할 만하다. 그들이 한국교회를 무너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를 무너뜨리는 사람은 사탄이거나 사탄의 앞잡이가 아니고 무엇인가? 침묵하지 않으신 예수님
한국의 대부분의 평신도들은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비리의 온상으로 만드는 지도자들 앞에서 침묵을 지킨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사람에 대해서 단호한 태도를 취하셨다. 마가복음 8장 31절에서 보면 예수님은 당신이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고발당하여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항변했다. 이때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부르시면서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그를 꾸짖으셨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사탄으로 규정하셨다. 교회 지도자들을 사탄이라고 말해서 언짢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겠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주님의 몸 된 교회에 해를 끼치는 지도자들을 사탄이라고 불러서 지나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는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 비판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리고 용서와 사랑을 강조하신 예수님을 무골호인으로 생각하기 쉽다. 예수님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적 다툼이나 갈등에 관해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고,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지만,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나 하나님의 일을 훼방할 때는 베드로에게 하신 것처럼 단호하게 대하셨다.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과는 육친이라도 원수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은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셨다(34-38). 예수님은 당신의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 성령을 훼방하는 사람들과는 타협하지도, 그들에게 관용을 베풀지도 않으셨다. 예수님은 율법주의적 신앙에 사로잡힌 유대교 지도자들을 가차 없이 비판하셨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보시기에 옛 계명에 매달리거나 전통에 얽매어 있는 그들은 착각에 빠진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이심을 선포하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당신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는 그들을 저주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는 그들을 용서하지 않으셨고 그들 앞에서 침묵하지도 않으셨다. 예수님은 당신이 그들의 문제점을 계속 드러내면 당신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고 계셨지만, 멈추지 않았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궁극적 목적은 신학적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한 것이었지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고발한 직접적인 이유는 예수님이 그들의 신앙의 오류를 지적하셨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이렇게 당신의 목숨을 내놓고 교회의 문을 가로막고 서 있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문제점을 목소리 높여서 지적하셨다. 지금 한국의 개신교회는 종교개혁기의 가톨릭교회를 닮아가고 있다. 목사들의 성적 탈선에 관한 이야기가 기독교 신문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목사들의 돈 횡령, 비자금, 과도한 퇴직금 등의 문제가 사법기관에 고발되어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가 개독교로 불리기도 한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개신교의 사회의 신뢰도가 10%대로 떨어졌다. 개신교인들이 성당으로 몰려가고 있다. 이런 때에 교회를 무너뜨리고 있는 악한 지도자들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예수님을 닮아야 하는 우리가 침묵하는 것은 온당한 일인가? 마치면서
이제 평신도들이 일어서야 한다. 『불확실성의 시대』의 저자 갈브레이드는 권리를 장악한 사람들은 그들의 기득권을 버리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 기득권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쓴다고 말했다. 그들의 아성을 무너뜨리려면 프랑스 혁명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아래로부터 일어나는 길밖에 없다고 했다. 이 말은 교회에도 적용될 만하다. 물론 모든 교회가 부패한 것도 모든 목사가 타락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많은 목사가 타락해서 교회들이 부패했다는 말을 듣는다. 부패한 교회에는 타락한 목사가 있고, 그 목사에게 동조하거나 비리를 보고도 침묵하는 중직자들이 있고, 그 비리 목사를 분별력 없이 추종하는 교인들이 있다. 이제 한국교회가 조난당한 배처럼 기울고 있는 때에 교회를 부패로부터 건지기 위해서 평신도들이 뜻 있는 신학자들이나 목사들과 손잡고 일어나야 할 때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게 되었다. 교회가 나날이 기울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평신도들의 묵인 아래서 교회의 비리와 부패가 일어났다. 장로들이 목사들의 비리를 돕거나 눈감아주기 때문에 목사들이 전횡할 수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교인들이 비리 목사들을 맹목적으로 우상화하고 추종하기 때문에 그들이 발붙일 자리가 생겼다. 평신도들이 사탄의 잔칫상을 차려준 셈이다. 목사가 교회 재정을 유용할 때 재정을 담당하는 장로나 집사가 동조하지 않으면 통장에서 돈을 빼낼 수 없다. 그리고 돈을 빼낸 후라도 중직자들이 뜻을 모아서 그것을 문제 삼으면 그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그런데 어느 교회에든 비리 목사에게 붙어서 절대 순종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사탄의 추종자들이다. 그 악화가 양화를 몰아낸다. 평신도 대표들은 목사의 비리에 동조하거나 묵인한 책임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제는 더 이상 무책임한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 기울고 있는 한국교회를 바로 세우겠다는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를 위해서 염려하면서 기도해 왔다면 이제는 행동할 힘과 용기를 달라고 우리의 기도의 내용이 달라져야 한다. 옳은 말을 하다가 왕따 당하는 것이 몹시 싫겠지만, 예수님은 진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교회가 더욱 부패하는 것이, 한국교회가 무너져 내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겠는가? 그것은 사탄이 원하는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교회를 통해서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해 왔다. 이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나서야 할 때다. 목사들이 저지르는 비리를 눈감아주는 중직자들은,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일만을 생각하는 사탄의 앞잡이들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명하셨다. 땅에 떨어진 밀처럼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복음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 인간을 위해서 고난당하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고난당할 각오를 하고 목소리를 높혀야 한다. 복음을 지키기 위해서 유대교 지도자들과 맞섰던 예수님처럼 그리고 부패한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가톨릭교회에 맞서서 일어났던 개혁자들처럼, 이제 우리도 기독교를 개독교로 만들고 있는 교회 지도자들에 맞서야 한다. 그 책임이 평신도들에게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우리의 책임을 외면한 것을 회개하면서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살기로 결단해야 한다. 20세기의 천재적인 신학자 본회퍼는 불의 앞에서 침묵하는 것은 곧 죄며 안락한 삶을 위하여 파렴치한 일들에 대하여 눈을 감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포기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친 사람이 자동차를 몰면서 많은 사람을 살상하면 자기가 목사로서 다친 사람들을 위해 기도만하기보다는 그 자동차에 올라가서 그 미친 사람에게서 자동차의 핸들을 빼앗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행동하는 신학자였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교회에서 많은 경우 불의 앞에서 침묵해 왔다. 교회에서 파렴치한 일들이 자행되는 것을 보고서도 눈을 감았다. 기름부음 받은 종을 비판하면 벌을 받는다고 겁을 먹기도 했다. 하나님의 종은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런 일에 동조하거나 그것을 묵인하는 것은 나도 그 일에 관여하는 일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바리새인들을 질책하신 예수님이 비리를 저지르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실까 잘 알면서도 나는 행동하지 않았다. 나는 나의 십자가를 지기를 꺼려했다. 이제 같이 기도해야 한다. “주여, 비겁하고 무책임했던 저를 용서하시고, 주님을 따라서 제 십자가를 질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주십시오.” 이제 우리 한국교회의 교인들도 본회퍼처럼 “나를 따르라”(요 12:26)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 한국교회가 부패의 수렁에 빠진 지금 더 이상 방관할 수 없게 되었다. 한국교회가 난파하는 이때에 손 놓고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비리 앞에서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의 뜻을 훼방하는 사람들, 교회를 타락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무리들과 단호히 맞서야 할 때다. 그렇지 않으면 미친 운전자들이 한국교회를 망칠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우리도 그들과 함께 망하게 마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