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교 때는 한눈팔지 않고 모범생으로 살았지만 대학교 때 노래패동아리, 연극동아리에 들면서 미친 듯이 놀아보고, 졸업해서는 돈 몇 푼만 들고 어학연수도 떠나보고, 공대를 나왔는데 번역가가 되겠다고 출판번역가 선생님들 따라다니면서 남들은 잘 하지 않는 짓들을 하고 다니는 나를 보며 대단히 나다운 인생을 산다고 생각했었다.
결혼도, 세상 살면서 처음 보는 종류의 인간인 운동선수와 했으니 나는 참 평범한 선택을 싫어하나보다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게 나라고.
결혼하고 바로 연년생을 낳고 2~3년이 훌쩍 지나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대단히 불만이 가득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남편은 이래야 한다는 기대, 애들 아빠는 이래야 한다는 기대, 부부생활은 이래야 한다는 기대, 결혼은 행복해야 한다는 기대 등등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하나하나 물을 주고 사랑을 줘서 가꿔야 할 작은 텃밭에 앉아 당장 달콤한 열매를 내놓으라고 소리 지르는 격이었겠다.
이제껏 나다운 선택에 거침이 없던 내게 결혼 생활만큼은 늘 나다움을 포기하는 것만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렇다면 내가 가졌던 기대들은 대체 어디서 생겨난 것들이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대부분 부모님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던 듯하다. 부모님이 싸우는 모습을 보며 나는 절대로 싸우지 않을 거야 다짐했고, 엄마가 아빠한테 잔소리를 너무 많이 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절대로 잔소리 하지 않는 사람이 돼야지 다짐했다. 용돈은 많이 안 주셔도 조용하고 자상하셨던 아빠를 보며 우리 애들의 아빠도 애들이라면 껌뻑 죽겠지? 기대했고, 대학교는 꼭 가야한다는 엄마 때문에 매맞아가며 공부했던 날들을 떠올리며 우리 애들은 하고 싶은걸 하게 자유를 줘야겠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문제는 나의 이런 선택의 기준이 우리 부모님의 모습 단 하나였다는 것이다. 수많은 부부 관계를 참고했더라면 ‘나다운’ 결혼관이 만들어졌을 텐데, 책도 많이 읽고 다양한 공부도 해왔다고 자부했지만 결혼에 대해 이렇게 좁은 시야를 가지고 있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운동선수 남편은 내 아빠와는 정반대로 거칠고 강하고 아이들에게 늘 큰소리를 치고 동시에 용돈도 잘 주는 사람이었는데, 내 아빠 같은 자상함만 바라고 있었으니 불만이 쌓여갔던 것이다.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안했더니 공부도 생활습관도 내 기대만큼 바로잡히질 않았다. 남편에게 잔소리 한 마디 안하고 모든 걸 참아줬더니 남편은 나더러 속을 모르겠다며 삐치고 사랑이 없는 거라며 외로워하고 심지어 나를 괴롭혔다. 남편은 내 모든 걸 알고 싶어 하는 좋은 사람이었는데, 나는 내 아빠가 내 엄마의 잔소리를 싫어했던 모습만 떠올리며 입을 굳게 다물었던 것이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아빠와 엄마는 행복했을까?
사실 아빠와 엄마는 행복했을 것이다.
아빠는 원래 잔소리가 많이 필요한 사람이었을 테고, 엄마는 아빠의 나약함을 사랑했을 테고, 아빠는 경제적 능력이 부족했을 테고, 엄마는 집안 경제를 책임지느라 목소리가 커졌을 테고, 그럼에도 아빠의 존재만으로도 평생이 행복하셨을 것이다. 둘이 가꾸어낸 부부의 모습이었고, 그것은 내것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남자를 선택했고, 그는 내 아빠와 달랐고, 나는 그런 남자와는 어떤 식으로 사랑을 주고받아야 하는지 터득해야 했고, 우리 아이들의 좋은 습관을 위해 자신감을 갖게 하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잔소리가 무엇인지 더 열심히 연구해야 했고, 아빠가 아이들에게 큰소리를 쳐도 그것이 불편하지만 지지해줘야 했고, 나의 나약함을 사랑해서 나를 선택했을 남편에게 내 단점을 더 많이 드러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혼이라는 것이 또 하나의 나처럼 느껴지는 친밀한 관계를 만드는 일이다보니,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을 넘어서는 그 다음이 필요한 것 같다. 내가 나로서 나다운 선택을 하는 것처럼, 남편도 아이들도 그들만의 생각으로 그들만의 선택을 하게 될 때 서로의 선택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오늘이다.
첫댓글 화, 목으로 나눠져 비록 함께 토론하지 못하지만.. 글을 통해 에그썬 선생님을 좀 더 알게 된 것 같아서 좋아요! ^^
저도 임진희 쌤 글 잘 읽었습니다. 글로 사람을 알아가는 것도 재미있단 생각이 드네요. 두 날이 합쳐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