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공이 동북공정을 벌리면서
발해가 우리민족인 부여족(예맥족)의 나라가 아니라
중화민족의 일원인 말갈이라는 이름의 이민족이 세운 나라라는 주장을 하고 있죠.
저는 이때문에 오래전부터 말갈의 정체에 대해 관심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런데, 오래전에도 한열사나 다른곳에서 글을 써왔다시피,
고구려의 건국시조인 추모성왕이 주변의 말갈을 제압하여 복속시켰다는
삼국사기 기사나
백제와 사로국 건국초기부터 끊임없이 등장하는 말갈의 침략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만봐도
분명히 중공의 동북공정발 주장은 어딘가 잘못되어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들 '말갈'이란 존재에 대하여 극명하게 그 정체를 드러내줄
구체적인 사료가 부족하여 이를 둘러싼 진실을 파헤치는데 애를 먹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갈이 우리와는 이질적인 민족이 아닌 바로 우리 그 자체인 예맥족이라는
증거가 될만한 자료들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번에 제시하고자 하는 증거는 바로 '부투말갈(浮偸靺鞨)'이라는 고구려인들이 남긴
표현입니다.
부투말갈이란 바로 494년 부여의 잔여세력이었던 북부여가 물길의 침입을 피해
고구려에 그 왕과 백성들이 투항하여 멸망한후에도
끝까지 고구려 통치에 항거하는 부여잔여세력을 비칭하는 고구려인들의 표현입니다.
부투말갈이라는 표현을 적은 한자를 보면, 뜰부, 훔칠투, 그리고 잘아는 말갈입니다.
원래 부여는 우리식 한자표현으로는 扶餘로 적고 중국측에선 夫餘로 적습니다.
그런데, 고구려의 지배에 항거하는 부여잔여세력들에 대해서는 그당시 고구려인들이
부정적 의미의 한자를 써서 뜰부에 훔칠투 즉 말갈도적떼로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494년 물길(勿吉: 물길이 말갈의 전신이라고 수서 등에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勿吉의 옛 한자음과 말갈의 옛 한자음도 다릅니다. 물길은 훗날 13세기 몽골의 발흥때
메르키트란 이름으로 테무친에게 복속된 종족이고 말갈은 한자어 발음도 모허로 읽히뿐만 아니라
세력범위 등에서 확실히 차이납니다)의 침입으로 인해 고구려에 투항하여 부여가 멸망한 후,
그들이 살던 지금의 송화강 유역은 6세기 중반이후 유연을 멸망시킨 돌궐이 세력을 뻗치면서
정치적 혼란을 겪게 됩니다.
즉, 돌궐이 이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지배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그당시까지도 고구려에 반항적이던 부투말갈이라 비칭되던 對고구려 부여인 저항세력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려 했다는 것이죠.
이 와중에, 돌궐군이 신성 등을 공략하나 실패하고 고구려와 말갈 기병대에 대패하여
물러나게 되는데 얼마후 속말말갈의 세력가였던 돌지계가 자신을 따르는 천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수나라에 귀부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때 중국측은 그를 부여후에 봉했다는 기록이 중국측 사서에 나옵니다.
그러나, 돌지계를 마지막으로 속말말갈이든 무슨 말갈이든 고구려 멸망시까지 고구려에
저항하여 반란을 꾀했다거나 하는 기록은 중국측 사서에도 삼국사기와 같은 우리측 사서에도
나오지 않고 오히려 말갈이라 불리는 세력이 고수전쟁은 물론 고당전쟁에서 고구려 편에서서
고구려를 위해 목숨받쳐 싸웠다는 기록들이 대다수입니다. (물론, 고구려멸망후 나당투쟁기에
당나라가 거란과 말갈부족을 끌어들여 신라를 공격하지만 이때 당나라측에 말갈부족이
협조했다고 하여 말갈을 이민족으로 단정짓을 수는 없죠. 오히려 보장왕이 신성에 복귀하면서
요동지방의 말갈부족장들이 보장왕에 은밀히 내통하여 고구려부흥을 이끌었다는 점을 봐도
이는 단순히 정치적인 문제일 뿐이지 당나라에 협조한 사실이 있으니 한국과는 이민족이라는
식의 저들의 주장은 궤변일 뿐이라고 봅니다. 더구나, 나당투쟁기에 당군에 모든 말갈부족들이
협조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이들 말갈이 국인이라 불리던 고구려인들과 합세하여 발해를 세웠던 것도
주지의 사실이죠.
아무튼 여기서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사실은,
고구려가 부여보다 힘이 강성해지면서 부여 및 부여인들을 자신의 전신이자 동족으로서 적극적인 흡수정책을 써왔으나
고구려의 통치에 저항하는 부여인 잔당들은 적개심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부투말갈'
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점에서 '말갈'이 특정 이민족을 일컫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자신들이 지배하는 피지배세력을 일컫는 보통명사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혼동하지 말아야할 사실이, 고구려인이 부여인 저항세력을 멸칭한 직접적인 표현은 어디까지나 '부투'이지
'말갈'까지 적개심이 깃든 의미로 포함해서 해석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즉, 말갈은 보통명사적 성격일 뿐이고 이'말갈'이란 표현앞에 '부투'란 표현을 붙임으로써 비로소 노골적인 적개심 내지 멸칭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말 해서 죄송하지만, 전라도사람들을 전라디언이라 하듯 그들의 고유명사를 뒤틀어서 멸칭하는 식으로 부른것이죠.
그런데,
본래, '高勾麗'란 국명은 지금 우리식대로 '고구려'라 읽히지만
이는 한자를 차용하여 생긴 일종의 오해 내지 혼란일 뿐이고
그당시 고구려인들은 지금과는 다소 다른 발음으로 자신들의 국명을 불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고구려의 '高'가 중국의 '높을고'라는 한자의 뜻을 쫓아 고구려의 건국시조인 추모성왕 자신의
姓을 삼기위해 한자를 따왔거나 나라이름도 중국 한자의 뜻에서 모티브를 얻어 지었다고 오해할 수 있지만,
실은, 그당시 만주와 몽골초원의 북방민족들은 '높을고'라는 한자와는 상관없이
하늘, 높음을 가리킬때 'kok'이란 표현을 써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가령, 터키의 경우 자신들의 발상지였던 대흥안령 산맥의 서쪽인 몽골초원에서
대제국을 세우고 있을 무렵, 스스로를 일컬어 '곡투르크'라 불렀습니다. 이는
북방민족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천손사상으로서
본래 '하늘, 높음'을 나타내는 의미를 가진 북방민족의 고유어인 '곡,고'를
나라이름앞에 썼다는 것입니다.
( 높을高라는 한자가 오히려 북방민족의 고유언어를 따라서 만들어졌거나 아니면
우연의 일치일 가능성도 배제할순 없겠죠?)
추모성왕도 이와 다르지 않아,
자신의 성을 '高'로 정한 이유도 하늘과 태양 즉 '해'를 모티브로 했고
나라이름또한 '하늘의 자손, 하늘의 나라'란 뜻에서 高+골,고려,고리(나라,사람,민족,겨레를 뜻하는 북방민족의 언어로
몽골의 '골'도 같은뜻이고 만주어의 '구룬'도 여기서 파생된것이고 'ㄱ'=>'ㅅ'이 되는 자음법칙에
따라 한반도에서는 '사람'이 됬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함)로 작명했다고 생각합니다.
즉, 고대 삼국시대에 나라를 건국하고 정복전쟁에서 승리하여 왕족,귀족, 큰 도시에 거주하는 일반양인계층
들은 國人으로서 피정복된 피지배부족, 나라들과 자신들을 구분하고 그들을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은
그당시에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는데
'국인'이라 표현되는 자신들과 구별되는 하층계급, 피정복민들을 일컫는 표현으로서
고구려인들이 '말갈'이라는 표현을 썼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죠.
즉, 하늘과 태양의 자손인 지배계급인 '곡골(곡고리,곡고려)'라는 국인과 대비되는,
곡골에 의해 정복당한 피지배계급 읍루(여기서 읍루란 연해주에 있던 특정의 이민족을 일컫는게 아니라
촌놈, 피정복민들을 일컫는 표현임. 신라에서는 서라벌에 사는 사람들을 국인으로, 지방에 사는 지방민들을
읍루라 불렀음)에 해당하는 표현으로 '말갈'이 범용됬음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언어,문화,혈통 등과 같은 종족적 민족적 차이에 따른 구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왕과 5나부대가, 호인과 같은 귀족세력 및 건국초부터 함께했던 일반 下戶(평민)과 같은 국인과
대비되는 계급,신분, 지역에 기준을 둔 호칭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고구려가 광개토태왕, 장수태왕 등을 거치면서 대제국으로 발돋움하자
셀 수 없이 늘어난 피정복민들을 일일히 그들의 민족, 부족, 지역 등을 따라 고유명사로 불러주는것은
상식적으로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므로 이들을 간편히 말갈이라는 이름으로 범칭하여
지역에 따라 그 종류를 7부로 나누어 통치하기 쉽도록 개편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즉, 550년대까지만해도 중국측 사료에는 전혀 등장하지도 않던 '말갈'이
당나라때 저술한 수나라시대 역사서인 '수서'에 갑자기 등장하는데
이 '수서'는 570~80년대~수나라 멸망시기'까지의 일을 기록한 것으로서
550년대까지만 해도 전혀 안나오던 '말갈'이 갑자기 수십년만에 '말갈7부'라는 거대한 세력으로서
중국의 사서에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고구려가 550년 이후 수십년간 계속됬던 귀족들간 내부다툼이 어느정도 종식되고
남쪽으로는 신라와 서쪽에서는 돌궐의 침략을 막아내자 내부를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지방통치도 손질을 하게 되어 종래의 피정복,피지배민 내지 부족들을 말갈7부로 재편했을 가능성이
높고 이것이 중국측 사서에 반영됬다는 것입니다.
( 장수왕의 5세기를 중심으로 보이는 대사자, 수사, 재와 같은 지방관 명칭이 6세기 말부터
욕살, 처려근지, 가라달, 누초와 같은 명칭으로 바뀌는 것도 이러한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구려의 지방통치제도 재편상황이 중국측에 입수되면서
이들 말갈이 당시 고구려의 힘을 약화시키고 싶어 안달이 나있던 중국인들의 입맛에 맞게
해석되거나 고구려에 대한 중국의 계산과 주관적 기대가 깔린 對고구려 사회 인식관으로 왜곡해석된게
아닌가 하는 강한 의심이 드는군요.
여기서 '일종의 계산과 주관적 기대가 깔린 對고구려 인식'이란,
북주가 북제를 멸망시키고 6세기 후반 남조마저 복속시켜 중원통일을 이루고 난뒤 '수'나라라는
대제국을 이룬 수문제였지만 그역시도 북방의 돌궐에게 온갖 모욕과 약탈 조공을 당해야만 했던
처지로서 그의 아들 수양제는 북방민족의 생리에 대해 꿰둟고 있던 한족신료를 등용하여
'이이제이'전술로써 스스로 돌궐이 동,서돌궐로 분열되고 자멸하게끔 만드는데 성공하였듯,
고구려 또한, 평양, 황해도 재령의 한성, 국내성,부여성, 요동방어선의 요동성 등과 같은 성들에
몰려살고 있던 국인들과 고구려 각지에 산재해있던 피지배계급이었던 '말갈'을 이간질시켜
중원의 고구려 침략에 유리하게 써먹고 싶었던 중원만의 자가당착적 정치적 인식이었을 뿐이었다는
것이죠.
실제로, 수나라는 고구려와 오랫동안 요서지역의 거란족, 그리고 그지역의 고구려 피지배 부족들인
말갈족을 고구려로부터 이탈시키려 많은 노력을 기울이나
영양왕이 먼저 말갈과 거란기병을 동원해 영주를 침공하여 요서지역의 거란과 기타 말갈부족들이
수나라에 붙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포석이었습니다.
수양제가 애초에 고구려를 원정하려 할때 아무래도 전투력이 떨어지는 한족병사들보다는
막강한 돌궐기병을 동원하기 위해 동돌궐의 계민가한과 그아들에 요구하지만 이에 실패하여
부득이하게 고구려라는 강적을 무너뜨리기 위한 실질적인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113만의 정규군과
별도의 200만 지원부대를 동원하게 됬다는 분석도 있더군요.(국방일보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ㅋㅋㅋ)
또한, 고당전쟁때도 당태종이 안시성앞에서 붙잡힌 고구려 국인 포로들보다는 말갈 포로들을
생매장시킨것도 말갈로 불리우는 피지배계급이자 지방민들을 고구려로 대변되는 국인들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협박이었죠.
이렇듯, 고구려에 대한 엄청난 적개심을 품고 고구려를 멸망시키려는 야욕에 물들어있던
수와 당나라의 제왕들과 그 아래서 동북방의 이민족들에 대해 서술한 당나라 시기의 역사서인
수서와 그 이후에 저술되는 중국측 역사서들이 고구려 사회에 대한 정확하고도 객관적인
기록을 했다고 보기도 힘들고,
이와중에 갑자기 등장한 '말갈'이 과연 저들의 주장처럼 고구려 국인들과 이질적인 이민족으로서의
말갈이라 볼 수 있는지가 심히 의문입니다.
앞서 밝혔듯이,
고구려 국인들이 자신들과 동족인 부여인들을 부투말갈이라 멸칭했던 점에서 보여지다시피,
이는 어디까지나 종족적 의미가 아닌 한마디로 정치적,계급적,신분적 의미의 표현이었다는게
보다 더 상식적인 해석이라 생각합니다.
첫댓글 말갈에 관한 역사는 흠정 만주 원류고 라는 금국과 청나라 역사 서 중에 있습니다
네 말갈편이 있죠. 그니까 문제는 만주족이 저술한 만주원류고에 나오는 말갈은 숙신 물길 말갈로 이어지는 수서, 구신당서 등 종래의 통설을 따르고 있습니다.물론 만주원류고가 부여 백제 삼한 등 우리민족의 역사도 자신들의 사서에 편제시키고 있으나 이는 엄연히 별론의 문제. 숙신은 분명히 부여 고구려와 언어 등 여러가지면에서 확실히 이민족이었고. 이 이민족인 숙신이 말갈의 전신이라면 동북공정논리에 말려들수밖에 없는 것임.
숙신 물길을 우리민족이라고 할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시각에서 과연 숙신물길을 우리민족의 범주에 넣을수 있느냐를 검토해볼때 그건 절대 아니라고 밖에 할 수 없음.
그렇다면 발해의 건국주체인 말갈이 예맥계인지 아님 언어 문화 등 이질적인 숙신계인지 판단해야 하는데. 내가 본문에 적은것이 바로 이 단계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임.
만주원류고도 고대사료부족으로 부득이하게 중국사서 기록을 참조하여 만들어지다보니 분명히 오류가 나는 부분이 존재할 것임.
이 오류중의 하나가 말갈을 숙신 물길의 후예라고 본 것이라는것.
따라서 만주원류고에서의 말갈편은 참고할 가치가 있으나 분명히 잘못된 오류가 있다는것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말갈족 또한 지나족과는 전혀 하등의 관계가 없는 나라죠..동북공정으로 대진국사를 편입시킬려는 수작에 불과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