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12월 17일 최초의 여자 변호사 이태영 별세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에 사는 사람들의 유전자적 특징 가운데 하나를 들라면 나는 “남자보다 여자가 낫다.”고 대답할 것 같다. 일을 시켜 봐도 남자보다는 여자가 더 잘 해 낸다 싶을 때가 여러 번이고, 오히려 남자들보다 강인한 모습을 보고 경탄할 때가 더 많았다. 하다못해 운동 선수들도 동일 종목으로 비교하자면 남자보다 여자의 성적이 더 좋다. 요즘 남녀공학에서는 남학생들이 내신 등급 때문에 운다고 하고 공정한 경쟁이라면 여자들이 뒤처지는 경우가 드물다고 들었다. (대통령은 예외일 것 같다) 그런데 이 한국 여성들 가운데 특출한 인재 하나를 들자면 이 이름을 빼놓을 수 없다. 이태영
1914년 금광으로 유명한 평안도 운산에서 태어난 그녀는 이화여전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교편을 잡다가 미국 유학파로서 법학자이자 신학자이던 정일형 박사와 결혼을 하게 된다. 정일형 박사는 일제가 보기에 불온한 활동을 즐겨 하고 다녔던 바 감옥을 제 집 드나들 듯 했고 한때 이화여전을 수석 졸업생 이태영은 먹고 살기 위해 삯바느질을 해야 했다. 밤새 꿰매고 두르고 맺어 이불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던 시절 그녀의 꿈은 ‘좋은 가위’였다고 한다. 그 집념(?)을 버리지 못해 이태영은 이후로도 좋은 가위만 보면 충동구매를 해서 어느덧 수백 개의 가위 소장가(?)가 됐다고 전한다.
한국 역사상 똑똑한 여자의 남편들은 이상하게 좀 처지는 경우가 많다. 허난설헌의 남편은 처지는 정도가 아니라 부인을 망가뜨렸고 5만원권의 주인공 신사임당의 남편 이원수는 범상한 정도의 벼슬아치였다. 하지만 이태영의 남편 정일형은 좀 경우가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아내에게 이렇게 제안한다. “이제 보따리를 바꿔 맵시다. 기다리던 그 세월이 왔으니 당신 평생 소원이던 법률 공부를 하시오.” 나이 서른 줄을 넘은 상황, 보통 사람이면 “아이고 별말씀을 다하시오. 이제 와서 무슨.... ”하면서 아이들 건사에 부심할 공산이 크겠지만 또 이태영은 경우가 달랐다 아니 많이 달랐다. 정일형이 선거에 출마했을 때 찬조연설자로 등장하여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는 야유를 듣자 “암탉이 울면 알을 낳습니다.”라고 맞받아친 것은 그 아주 작은 예일 뿐이다.
서른 둘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최초의 여학생이 된 그녀는 수업을 받는 도중에 쉬는 시간마다 할 일이 있었다. 남편이 안고 온 아이들에게 젖을 먹이는 일이었다. 머리와 젖을 동시에 쥐어짜야 했던 시간이 지난 후 그녀는 아예 하숙집을 구해 아이들과 결별한 채 공부에 몰두한다. 이태영도 이태영이지만 남편 정일형의 외조도 한국 남자들에서는 동지섣달 꽃보다도 보기 힘든 미덕이었다. 부부의 노력 끝에 이태영은 사법 고시에 합격한다. 그러나 그녀는 꿈꾸던 판사 직을 얻지 못한다. “여자 판사는 시기상조”라는 이유라고도 하고 이승만 대통령이 야당 인사였던 정일형의 부인을 판사로 임명하는 것을 꺼렸다는 설도 있다. 결국 그녀는 “최초의 여판사”는 못되었지만 “최초의 여변호사”로 역사에 남게 된다.
최초의 여변호사로서 그녀가 노력했던 것은 무엇보다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케케묵은 논리가 지배하던 시대 땅에 들어붙어 있던 여성의 인권을 쳐드는 일이었다. 간통죄 쌍벌죄 (여자가 간통을 하면 처벌받았지만 남자는 그렇지 않았다), 모친의 친권 인정, 부부 재산상에서의 여성 권리 등등 바꿔야 할 법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벽은 높았다. 분위기가 어느 정도였냐 하면 최초의 대법원장이자 이승만 정권에도 꿋꿋했던 김병로 대법원장마저도 이태영에게 이렇게 호통을 칠 정도였다. “천오백만 여성이 불편없이 살고 있는데 왜 평지풍파를 일으켜? 조그만 것이 법률 줄이나 배웠다고 법을 고치려고 나서다니 어디서 배워먹은 버릇이야?” 천하의 이태영도 이때는 실신 지경에 이르러 동료들의 부축을 받고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 꼬장꼬장하셨지만 고루하기도 하셨던 대법원장이 은퇴하자 많은 법률적 성과가 이룩된다. 간통죄 쌍벌제도 한 예다. 이태영의 회고에 따르면 이 법은 단 한 표 차이로 국회에서 통과되는데 그 한 표는 좀 정신착란증상이 있는 국회의원이 뒤에서 “뭐해 손 안 들어?” 말을 듣고 덥석 들어올린 것이었다고 한다. 무의식적인 한 표가 역사를 바꾼 매우 진기한 예. 이태영 변호사가 이름을 드높이기 시작한 사건 역시 간통 사건이었다. 부흥부 차관이라는 고위직에 있던 관료가 자기 아내 안순애가 간통을 했다고 고발을 한 것이다.
간통의 상대인 댄스 교사는 자기가 저 여자와 간통을 했다고 주장하는데 검사와의 문답은 기가 막히기까지 한다. 검사는 “여자의 복부의 특징을 말하라”고 하고 있고 “대낮에 관계를 가졌기에 똑똑히 보았다.”고 답하는 황색 잡지적 서사가 법원에서 행해졌는데 문제는 이것이 5년 전의 일이었고, 안순애는 완강히 사실을 거부했으며 실상 기생첩에서 사생아까지 본 것은 부흥부 차관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즉 부흥부 차관이라는 작자는 간통으로 아내를 엮어 이혼한 후 새마누라 얻어 권주가를 부를 참이었던 것이다. 이 사건을 이태영 변호사는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설사 간통을 인정하더라도 공소시효가 완성됐고 유일한 증거인 전 피고의 자백에는 보강 증거가 없으며 간통사실을 주장하는 증인들의증언은 전 피고의 자백을 전해 들은 증거에 불과하다. 간통 사실 여부를 막론하고 무죄다.” 법정에 운집한 아주머니들이 남편을 성토하고 간통을 했다고 자백(?)한 댄스 교사에게 손톱을 세우고 달려드는 일대 스펙터클 속에 안순애 여인은 무죄를 선고받는다. 그렇듯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여성의 지위란 내려다볼수록 낮아지는 당신이었고 여성의 권리란 건드리면 톡 하고 터질 것 같은 나약한 존재였던 시대, 이태영의 길은 험난할 수 밖에 없었다. 이태영 본인의 회고다.
“나는 길이 없는 데로 다녔다. 내가 간 길은 누구도 가본 적이 없어. 나는 그 길을 만들어 걸었다. 그런만큼 험한 길이기도 했다. 여자로 태어나서 그것도 아이가 넷 딸린 주부의 몸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변호사가 되고, ‘법률구조’라는 말조차 없던 시절 법을 몰라 고통을 받던 여자들을 껴안고 울어야 했으며 한국 가정법률상담소를 세운 것 등등… 내가 걸어온 길은 가시밭길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가야만 했던 길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어려서부터 그렇게 보고 배웠기 때문이었다.”
한국 최초의 여변호사, 가야만 했던 가시밭길을 걸었던 한 여걸이 1998년 12월 17일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