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1월 26일 태극무공훈장 심일 소령 전사
어느 사건이나 마찬가지겠지만 한국 전쟁에서도 크고 작은 고비들과 갈림길들이 있었다. 무엇보다 전쟁이 나지 않게 만드는 것이 제일 좋았겠지만 이미 그 고비에서 남과 북은 실패했다. 남이나 북이나 ‘그까이꺼’ 총동원해서 38선 무너뜨리고 올라가거나 내려가면 자기네들이 쉽사리 통일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아침은 개성, 점심은 평양, 저녁은 신의주를 호언했던 한국군 수뇌부도 그랬고 스탈린에게 가서 책상을 치며 할 수 있습니다 부르짖은 박헌영과 김일성도 거기서 거기다.
남한 군부의 호전성(?)을 경계한 미군은 한국군이 기갑 병력을 갖추는 데에 반대했고 스탈린은 T 34 탱크 242대를 안긴다. 갈림길 하나. 결국 전쟁은 터졌고 이 기갑 병력의 격차는 그 무엇보다 한국군을 궤멸 상태에 빠뜨렸다. 그 공포는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일산 신도시가 자유로를 짓쳐들어올 인민군 탱크 방어막이라는 왕년의 망언(이라고 쓰고 속내라고 읽는다)은 결코 근거없는 것이 아니다.
미군은 한국군에게 대전차 무기를 주긴 했지만 그를 유용하게 활요할만큼 숙련된 군대가 아니었다. 탱크의 약한 부위를 쏘면 그나마 효과를 볼 수 있었는데 들입다 탱크 장갑이 가장 튼튼한 정면을 대고 쏘아부쳤으니 그래도 끄덕없는 탱크가 괴물로 보일 밖에. “탱크가 온다.”는 외침은 한국군을 걷잡을 수 없는 공포로 몰아넣었고 인민군이 탱크를 방어선으로 돌진시켜 종횡무진시키만 하면 한국군은 알아서 무너졌다. 미아리 방어선이 무너진 것은 바리케이드를 뚫고 들어온 탱크 몇 대 때문이었고 이 탱크는 별 호위도 없이 서울운동장까지 드라이브(?)를 했던 것이다.
이때 한국군 수뇌부가 내린 명령은 무식하면서도 무책임한 명령이었다. “육탄으로 탱크를 부숴라.” 실지로 탱크라는 괴물 앞에서 땅을 치던 많은 병사들이 폭탄을 이고 지고 탱크를 향해 돌진해 가기도 했는데 그 가운데 수훈갑이라 할 사람이 전쟁 개전 당시 6사단 7연대에 근무하던 심일 소위였다.
마그네사이트의 산지로 유명한 함경도 단천 사람이었던 그는 군문에 들기 전 서울대 사범대 학생이었다. 하지만 그는 육사 8기로 입교하여 군인의 길을 걷고자 했다. 당시 8기들을 지도했던 손희선에 따르면 그는 제출한 수양록 (수양록을 제출하는 것이 의무였단다)에서 “교사가 되는 것보다 공산당 무찌르는 게 더 급하다.”고 적어 놨다고 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는 고향을 점령한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강렬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적개심을 만든 범인이 누구든, 적개심의 대상이 누구든 적개심은 자체로서 비극이다. 하지만 비극적이게도 그 적개심을 발휘할 기회가 온 것이다. 전쟁으로.
심일 소위는 대전차포대 소속이었다. 춘천을 점령하기 위해 달려드는 인민군 전차에게 포를 쏘아 봤지만 소용이 없자 그는 육탄 공격을 감행하기로 한다. 그의 활약은 ‘배달의 기수’에서 익히 본 그대로다. 대전차포를 궤도에 쏘아 정지시킨 후 탱크에 달라붙어 해치를 열고 수류탄을 까 넣고 그런 식으로 전차 두 대를 파괴시킨다. 이를 보고 있던 사단장 이하 고급 장교들도 입을 다물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하니 짐작할만하다. 춘천으로 진입하는 좁은 강변도로에 탱크 두 개가 퍼질러 앉은 것은 대단한 장애물이었다.
심일 소위의 선전에 힘입어, 또 남침에 철저히 대비하고 있던 6사단은 잘 싸워서 동부전선의 붕괴를 막는다. 이는 전쟁 또 하나의 갈림길이었다. 6사단이 서부전선과 비슷하게 무너졌으면 한국군은 경상도로 후퇴할 기회조차 잃었을지도 모르니까. 이 공으로 심일 소위는 태극무공훈장을 받는다. 위관급으로서는 최초였다. 그는 계속 군에 남아 싸우다가 1951년 1월 26일 영월에서 인민군의 총을 맞고 죽는다.
심일의 집안도 전쟁의 폭풍에 난폭하게 휘말린 집안이었다. 심일의 형은 경찰로 근무하다가 순직했고 동생은 학도병으로 나갔다가 소식이 끊겼다. 4형제 중 3형제가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나마 막내는 전쟁 후에 낳은 늦둥이였다. 그는 형들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자라게 된다. 그가 형제 또래의 나이였다면 당연히 군문에 들어야 했을 것이고 한국군은 ‘심 이병 구하기’에 나서야 했을지도 모르지만.
심일 소령(추서)의 어머니도 대단한 분이었다고 전한다. 부모가 환갑을 넘으면 군 면제 대상이 되었음에도 마지막 남은 자식을 채근해 군대를 보냈고 남편이 고생하여 모은 재산을 내놓아 상이군인들을 위한 터전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언젠가 원주에 촬영 갔을 때 흘러들은 이야기 하나. 수는 많고 대책은 없고, 방치된 상이군경들이 이곳 저곳을 다니며 행패를 부리던 시절, 심일 소령의 어머니가 나타나면 아무리 난폭한 사람들도 머리를 긁으며 물러났다고 한다.
MBC 러브하우스가 유행이던 시절, 그분의 집이 러브하우스의 아이템이 된 적이 있었다. 그때 100살로 살아 계셨던 조보배 할머니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며느리도 먼저 세상을 뜨고 아들도 간암으로 죽네 사네 하던 상황, 오히려 100살을 사는 것이 즐겁지만은 않으셨을 조보배 할머니는 새롭게 단장한 집에서 웃는지 우는지 모를 표정을 지으셨다. 네 아들 가운데 세 아들을 앗아간 전쟁은 할머니에게 무엇이었을까.
어느 나라든 그 나라의 존속과 발전을 위해 헌신한 이들에게 응당한 보상이 주어지는 것은 당연하고 지당하며 타당하며 온당한 일이다. 독립 투쟁에 나선 이들,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싸운 이들, 그리고 자의든 타의든 자신이 속한 국가의 부름에 응해 총을 들고 싸워야 했던 이들. 그러나 우선 자격 없는 자들이 그 영광을 가로채기 일쑤였고 (이를테면 박탈당하긴 햇지만 전두환도 태극무공훈장을 탄다. 종간나 새끼) 그 보상은 때로 황망할 때가 많다. 국회의원을 하루만 해도 연금이 월 120만원이지만 무공 중의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은 연금 20만원이 조금 넘는다. 천안함 희생자들에게 왜 훈장을 주었다고 생각하시는지? 그건 궁여지책이었다. 훈장이라도 주지 않으면 전사자에 대해 가는 보상이란 그야말로 ‘개값’이었기 때문이다.
소위로서는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던 심일 소령의 기일에 여러 가지를 생각해 봤다. 이 글을 보면서 뭐 이 사람 조갑제처럼 전쟁 영웅 이야길 하고 있어? 하고 코웃음칠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분의 자유다. .
첫댓글 국가를 위해서 죽기를 각오하고 몸을 던진 용사들에게 적절한 보훈은 정치인들의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