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무엇을 그린 거야?”라는 물음에 다섯 살 정우는 ‘이게 뭔지 몰라요?’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정우가 그린 것은 빨간 색연필로 그은 삐뚤빼뚤한 긴 선 하나였다. 내게는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었으나 펭귄을 그린 것이라 했다. 중간에 조금 튀어나온 선은 날개이고 더 아래 꼬부라진 선은 꼬리라 한다.
아들이 네다섯 살 무렵 살던 아파트에는 또래 친구들이 많았다. 유치원 다녀오면 같이 점심을 먹고 놀았다. 놀이 장소는 할머니와 갓 태어난 아기까지 있는 윗집이었다. 우리 집에서 놀라고 해도 기어코 윗집으로 모였다. 그 집 좁은 베란다에는 비닐 깔개가 놓여있고 벽엔 늘 하얀 모조지가 붙어 있었다. 콩, 팥, 쌀 등 온갖 잡곡과 크레파스, 색연필, 물감과 각종 낡은 그릇들까지 널브러져 있었다. 함께 소꿉장난도 하고, 각자 좋아하는 곳에서 그림도 그리고, 구석에서 낮잠도 자며 아이들은 그렇게 놀았다. 모든 것이 놀이터이자 소통하는 광장이었다.
국립 현대 미술관 개관 50주년을 기념하여 덕수궁, 과천, 서울에서 『광장:미술과 사회 1900-2019』라는 전시회를 열고 있다. 오늘 찾아간 서울 국립 미술관에는 연대감과 분열. 혼돈이 존재하는 오늘날의 광장에 대한 사진, 영상, 설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광장』이란 단어는 이데올로기의 양극화를 주제로 한 최인훈의 소설에서 모티브가 되었다, 개인과 집단 사이의 조화 가능성과 제3의 길을 찾고자 했던 주인공은 광장의 집단적인 삶과 밀실의 개인적인 삶 어디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제3의 길을 발견하고자 했다.
작품들을 둘러보다 《김순기:게으른 구름》에 발걸음이 멈추었다. ‘게으름은 불성실과 나태의 상징으로 비판을 받지만, 작가는 게으름이 창조적이고 철학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에 주목한다, 그가 추구하는 게으름은 유희의 즐거움이며 그로 인한 놀라운 발견이고, 자유롭게 변화하며 하늘에 길을 내는 구름처럼 틀에 갇히지 않는 삶과 길을 내는 듯 시대에 앞서간 화가’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어떤 사진이 좋은 것인가요?’ ‘어떤 그림이 잘 그린 걸까요?’ 전시 사진이나 그림 고를 때 이리 물어보면 대부분 이런 말을 해준다. ‘보기 좋은 사진, 편한 그림이 제일 무난 하지’ 무난한 것은 위험하지 않다. 대다수 사람이 좋아하는 작품. 사진이나 그림이 소통의 수단일진대 밀실에서 혼자 만족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모든 예술가가 한번은 가졌던 질문이며 그럼에도 누군가는 고집스레 외로운 그 길을 가기도 했다.
1975년 광화문광장에서 김순기가 도끼로 나무를 패고, 들판의 흙을 파서 옆에 쌓았다가 구덩이를 메꾸는 비디오와 실뜨기를 하는 일기 등의 퍼포먼스를 했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32세였다. 그의 이름은 한때 ‘마녀’라 불리기도 했고, 그 전시 후에 한동안 한국에서 활동할 수 없었다. 캔버스를 빨랫줄에 걸고 ‘바람의 소리를 그렸다’라고도 했다.
캔버스를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오래전부터 여러 화가에 의해 시도되어왔다. 풍경이나 인물을 소재로 하던 그림에서 몇 개의 색으로 나누어진 게 전부인 그림, 선 하나가 길게 이어진 그림, 점이 여러 개 찍힌 그림, 캔버스를 찢고 종이를 너덜너덜 붙이는 것들이 그러하다.
영상 기계의 발달은 캔버스에 소리와 빛을 불러들이고, 보는 그림에서 함께 소통하는 것으로 그림의 영역을 넓혀간다. 이번 광장이란 주제로 열린 전시는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작품이 된다고 말해 주고 있다. 김순기 화가는 우리가 보는 것들 속에 의미 없는 것과 의미 있는 것의 차이는 없다고 했다. 빛이 들어오면 들어오는 대로, 어두우면 어두운 대로 그 자체가 그림이 되는 것이라고 작품에서 말을 한다. 즉 우리를 에워싼 모든 것이 작품이 되는 것이다.
아이들은 색연필을 잡는 순간 모든 것이 캔버스가 된다. 벽에다 그리고. 신발, 가방, 옷, 그릇 심지어 자신의 몸도 도화지가 된다. 그곳에 그린 그림은 살아 움직인다.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와 햇살, 바람과 부딪힌다. 아이들이 놀던 베란다는 광장이었다.
정우는 선 하나를 그은 그림을 보여 주었고, 나는 ‘무엇을 그렸니?’ 하고 물었다. 바보 같은 물음이다. 그 선은 내게로 온 순간 나의 것이다. 그러니 나는 내게 질문 했어야 맞는 것이다.
너는 무엇을 보았냐고.
첫댓글 우리나라 국립 미술관 개관50주년 전시회가 열리고 있답니다.
다녀와서 쓴 글이에요
과천 덕수궁 경복궁옆 미술관 등 3군데서 했는데 다른곳은 끝났고 과천은 3월 말까지 열려요
시간 되시면 꼭 가보세요.
주말에 눈이 내린다고 하니 친구불러 전철타고 다녀 와야겠어요
관람 끝나고 미술관 안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따뜻한 커피도 한잔 마시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