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여성을 해코지 한 것은 ‘나보다 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보다 ‘열등한 것’이 나를 무시하고 있다는 강박(정신상태가 정상은 아니라는 의미)은
참을 수 없는 폭력으로 나타난 것이겠지요.
또 자신의 화를 아이에게 푸는 듯 한 일부 어린이집 교사를 망연자실 보기도 합니다.
“몇 해 전에 숙명여대 김응교 교수님이 페이스북에 쓰셨던 글이 생각납니다.
어린 시절에 마을 아이들이 편을 갈라 놀 때면 늘 남는 아이가 있게 마련입니다.
몸이 약하다든지, 어리다든지, 운동 능력이 부족하다든지, 이유는 다양했습니다.
그러면 게임에 참여할 아이들이 가위바위보를 해서 편을 가른 후에,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아이를
어느 한편에 끼어주었습니다. 그런 이들을 일러 '깍두기'라 했습니다.
그런데 김교수의 다음 말이 참 재미있습니다.
깍두기는 승리의 기쁨은 함께 나누지만 패배의 책임은 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깍두기도 마당에서 즐길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인정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약한 아이들은 늘 배제를 경험합니다.
여기에도 저기에도 낄 수 없는 이들을 일러 '왕따'라 합니다.
동일한 사람이 깍두기도 될 수 있고 왕따도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사회의 분위기입니다.”
(김기석 목사 설교 중에서)
언제부턴가 강하지 못한 자는 도태되고 소외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어 버린 듯합니다.
약한 자는 보호받고 세움 받아야 할 존재이어야 하는데,
무시되고 화풀이의 대상으로 여겨도, 약하니 항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곧 악한 생각입니다.
성경은 구약 때부터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보호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의미라 말하며 애써 현실적인 돌봄과 관계없다 말하지 마십시오.
영생에 긍휼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현실에서 소외되고 연약한 자들을 보는 눈 역시 긍휼일 것이며
그 영혼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사랑)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라도 남을 누르고 무시하며 억압할 수는 없습니다. 모두 동일한 격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깍두기를 시켜 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첫댓글 반찬도 깍두기가 있었는데..ㅎ
깍두기 하니 요즘 그리스도인의 처지가 기존 교인들이 볼 때 깍두기 입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들러리가 아니라
무한 책임자로서의 위치입니다.
한편으로는 진리 가운데 자유하지만
영원한 생명에 관해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