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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왔다. 아직 점심 전이지? 너 좋아하는 초밥 사왔는데......"
오후 2시가 넘어서야 공방으로 돌아온 하연은 왠지 얼굴이 까칠해 보이는 혜진에게 사들고 온 초밥을 내밀었다. 작업용 앞치마를 두르던 하연은 좋아하는 초밥을 받아들고도 딴 생각을 하고 있는 듯 멍해보이는 혜진이 의아하다.
"혜진아! 무슨 일 있어?"
"응? 일......무슨 일? 아무 일도 없어."
"근데 왜그렇게 멍해?"
"아......어제 혼자 소주 한잔 마셨더니 숙취가.......아.......아버님 안녕하시지?"
혼자 술을 마셨다며 급하게 말을 돌리는 모습이 마치 거짓말하다 들킨 아이같다. 하룻밤 사이 혜진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평소의 그녀 답지않게 하는 행동마다 허둥거리는게 눈에 띌 정도다. 하연은 문뜩 도현이 전해주라던 핸드폰이 떠올랐다. 뜬금없이 혜진에게 핸드폰을 선물하는 도현이 이상했지만 이유를 물어볼 겨를이 없었다.
"혜진아, 이거."
"이게 뭐야?"
"핸드폰, 도현씨가 너 주라고 하던데."
"뭐? 도현씨가?"
하연은 도현에게서 받은 핸드폰을 혜진에게 내밀었다. 도현이라는 말에 혜진은 불에라도 댄듯 화들짝 놀라 성의없이 입 안으로 밀어넣던 초밥이 목에 걸린듯 캑캑거린다. 하연이 서둘러 내민 물컵을 받아들고는 허겁지겁 입안의 음식을 삼킨 혜진은 그제서야 민망한듯 하연을 쳐다보았다.
"너 왜 그래? 도현씨랑 무슨일 있는거야?"
"일.....일은 무슨......"
"근데 왜 이렇게 너 답지않게 허둥대는 거니? 그리고 도현씨는 왜 너한테 핸드폰을 선물하는 거야?"
"그......그거야! 나도.......모르지.."
왠지 자신없는듯 혜진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어떤 답이라도 듣고싶다는듯 주시하고 있는 하연을 보며 혜진은 도현이 줬다는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뿐 어떤 대답도 해줄수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하연이 언제 도현을 만나 핸드폰을 받은건지가 궁금해졌다. 아침에 이곳을 나간 도현을 하연이 언제 만난거지? 언제 만나 이 핸드폰을 전해받은거지? 혜진은 이곳을 나간 도현이 하연을 찾아간게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번쩍 고개를 든 혜진이 뚫어져라 자신을 보고있는 하연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근데 넌 도현씨를 언제 만난거야? 이 핸드폰 언제 받은거야?"
"그거야 아침에 찬혁씨 오피스텔에서.......아!"
무심결에 입을 열던 하연이 '아차!'하며 조금은 민망한 얼굴이 된다. 도현을 만난 이야기를 하자니 먼저 찬혁에 대해 말을 해야할것 같다. 하연은 쑥쓰러운듯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긁적인다.
"무슨 말이야? 찬혁씨 오피스텔이라니?"
"그게.......실은 나 찬혁씨랑 만나기로 했어."
"만난다니? 그거 무슨 뜻이야?"
"알면서 뭘 물어? 이제부터 만나보기로 했다구."
"그럼, 찬혁씨랑 사귀기로 한거야?"
".......그렇게 됐어."
민망한듯 미소짓는 하연은 어제 있었던 일을 대강 말했다. 어제 집에 갔다가 그 여자랑 한판한 거며 저녁도 못 먹고 집에서 나온 것, 그리고 길에서 우연히 찬혁을 만난 것까지 모두 말했다.
"신기하네. 그 넓은 서울 한 복판에서 어째 그렇게 딱 만났을까?"
"안그래도 기분도 꿀꿀하구 심란해서 술 한잔 생각났었거든. 생명의 은인에게 밥 사주겠다 하길래 술 사달라고 했지. 너무 일찍 뻗어버려서 문제였지만."
"뻗었어?"
"응. 눈 떠보니깐 찬혁씨 오피스텔이더라구."
"오피스텔!!!!!"
"미리 말하는데, 니가 상상하는 그런일 따위는 절대 없었어."
혜진이 하얗게 눈을 흘긴다. 지금 저 말을 믿으라고 하는 건지, 한 지붕 아래서 피끓는 미혼남녀가 같이 잠을 잤는데 아무 일이 없었다니 그걸 누가 믿어? 더구나 오늘부터 애인하기로 했다면서, 아무일 없는데 하룻밤 사이에 애인하자고 그럴까?
"정말 아무일 없었어. 일어나보니깐 찬혁씬 출근하고 없었고, 난.....어딘지 기억도 안나더라. 도대체 여기가 어디지 그랬다니깐. 어떻게 사람 사는 집에 사진 한장 안걸어놓을수가 있는지. 아주 깨끗해."
"딴 소리하지말구.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전화가 왔더라구. 그래서 거긴줄 알았지. 같이 밥 먹자고해서 기다렸는데.......기다리는 동안 내가 머리를 감았거든. 근데 갑자기 도현씨가 딱 들어오는거야. 마치 자기 집처럼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더라. 날 보더니 지금 너처럼 딱 그런 표정을 짓더라구."
"도현......씨?"
"셋이서 밥 먹고 찬혁씨가 핸드폰을 사줬는데 도현씨가 덩달아 핸드폰을 사더니 널 갖다주라고 하더라."
"헐! 완전 스팩타클한 하루를 보냈네. 어떻게 서너번 만나보고 사귀자고......."
말을 해놓고 보니 하연에게 할말이 아니다. 서너번 보고 사귀게 된 하연에게 서너번 보고 함께 잠자리를 한 자신이 할 말은 아닌것 같다. 어쨌든 하연은 뜻밖으로 찬혁에게 끌렸던 모양이다. 6년을 그렇게 줄기차게 쫓아다니던 정우 선배는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몇번 만나지 않은 찬혁에게 마음을 준 걸 보면 제각기 인연은 다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드는 혜진이다.
"난 이제 다 말했어. 그러니깐 이제 니 얘기를 해봐!"
"뭐?"
"얼렁뚱땅 대충 넘어갈려구 했어? 왜 도현씨가 너한테 핸드폰을 선물한 걸까? 단축번호 0번에 떡 하니 자기 번호를 저장하고서 말이지."
"단......단축번호?"
"둘이 이야기가 된거 아니야?"
"그게......그런가 봐."
"무슨 대답이 그래? 둘이 사귀기로 한거야? 아님 도현씨 혼자 너한테 대시하고 있는거야?"
"그게......나도 잘 모르겠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도현이 핸드폰을 선물한 이유도 모르고 울상이 된 채 애궂은 자신의 머리통을 쥐어뜯고 있는 혜진이 어이가 없다. 하지만 혜진은 심각했다. 분명 자신이 먼저 도현을 유혹한 건 맞지만 그전에 무슨 이야기가 오고갔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왜 갑자기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한건지 그것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지금 도현의 행동이 단순한 책임감에서라면 사양하고 싶다. 딴 사람에게 마음이 있으면서 더구나 그 사람이 하연이라면 단지 책임감때문에 하연의 주변에 머물게하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다. 친구인 찬혁에게 하연을 양보한것만으로도 속이 쓰릴텐데 이런 식으로 주변을 맴돌게하는것은 도현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거라는 생각이 든다. 만일 그렇다면 모든 일의 원흉을 술에게 떠 넘기고 깨끗이 마무리 짖고 싶은 심정이다.
윤 비서는 말없이 서류봉투 하나를 윤 회장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보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은 정 회장은 윤 비서가 내려놓은 서류봉투를 열어 보고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윤 비서를 바라보았다. 깨끗이 정리된 두서너장의 서류와 함께 강 찬혁의 사진을 보며 윤 비서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찬혁에 대한 모든 것이 세세히 적혀 있는 서류를 보며 정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는 서른이고, 부모님이 안계시는군."
"네. 10년 전에 교통사고로 두 분이 함께 돌아가셨습니다. 형제자매 모두 없이 혼자이고 물려받은 유산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오피스텔에서 혼자 살고 있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저희 그룹 계열의 스포츠 의류부 홍보 팀장이었습니다."
"그룹 계열?"
정 회장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나이 서른에 홍보팀장이면 승진이 빠른편이다. 홍보팀에 있으면서도 작년 겨울 토쿄 스포츠의류 박람회때 제법 큰 계약을 따내면서 능력을 인정받은듯 하다. 허우대도 이만하면 제법 괜찮은 편이고, 정식 입사해서 빠르게 고속 승진을 한걸보니 능력도 있는 친구다. 헌데 어떻게 딸 하연이를 만나게 된걸까? 혹시 하연이가 누군지 알고 접근한것은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든다.
"하연이랑 언제 어떻게 만나게 된건지 알아봤나?"
"아직 확실한건 모르겠지만 제 생각으로는 강 팀장은 아가씨가 누군지는 모르는거 같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거지?"
"아가씨가 계시는 마을에서 차량이 미끄러져 고랑에 빠지는 사고가 있었답니다."
"사고?"
"네, 비바람이 심한데다 밤길에 가로등도 없어서 차가 고량으로 빠졌다고 합니다. 그때 혜진 아가씨랑 두분이 도움을 주신듯 합니다. 강 팀장은 그 사고로 발목 인대와 갈비뼈가 금이가는 부상을 입어 한참동안 거동이 불편했다고 합니다."
"그래? 근데 강 팀장이 무슨 일로 하연이가 사는 마을을 찾아간거야?"
"거기까지는 아직......"
"하연이를 알고 접근했을수도 있다는 말이군."
"그건...."
정 회장은 왠지 아까부터 찬혁을 두둔하고 있는듯한 윤 비서의 말투에 의아한 생각이 든다. 속이 깊은 편인 윤 비서가 이렇게 제 속을 들어내며 누굴 두둔하는 경우는 보기 힘든 일이었다. 지금도 윤 비서는 찬혁의 회사내 평판이나 업무 능력에 대해 은근한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더구나 무척이나 자존심이 세다는 걸 강조하며 고의로 하연에게 접근하지 않았다는 걸 말하고 있다.
"윤 비서, 강 팀장 그 친구가 맘에 든건가?"
"네? 아.....아니......솔직히 그 친구에 대해 알아보다 호감가는 사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홍보실장에게 무척 신뢰를 받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더구나 하연 아가씨와 함께 오피스텔로 들어간 그 날도 보고 받은 바에 의하면 강 팀장이 아가씨를 무척 아끼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20년 가까이 정 회장을 모시고 있던 윤 비서는 돌아가신 사모님과 함께 하연을 아주 어릴때부터 보아왔다.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여중생, 여고생이 되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봐왔기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딸처럼 느껴지는 하연이었기에 그날 찬혁과 함께 오피스텔로 들어갔다는 보고를 받은 윤 비서 역시 적잖은 충격을 받았었다. 비록 정 회장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딸 같은 하연이였기에 찬혁에 대해 알아보던 그는 점점 더 찬혁이 꽤 괜찮은 사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것이었다.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진중함과 신뢰감이 느껴졌지만 정 회장에겐 그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그가 꽤 괜찮은 사내이건 아니건 간에 유일그룹의 유일한 상속녀인 하연의 짝으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존재일 뿐이다. 정 회장으로부터 두 사람을 계속 주시하라는 말을 들은 윤비서는 왠지모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방을 나왔다.
"저기 하연아."
"응."
혜진이 방금 내린 커피를 머그잔 가득 부어선 하연에게 내밀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평소와는 다른 혜진의 행동에 돌리던 물레를 멈추고 커피를 받아든 하연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평소 속에 말을 담아두지 못하는 성격인 혜진인데 어째 오늘은 조심스럽기만 하다. 그렇게 힘들게 말문을 연 혜진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에도 도현에 관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하연은 혜진이 질문하는 정확한 의도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너 도현씨 어떤거 같니?"
"도현씨? 글쎄, 겉보기엔 니 말대로 키도 크고 꽤 잘생긴 남자지. 안구정화엔 딱 이지."
"아니 그런거 말구."
"그럼 뭐?"
"그.......있잖아. 남자로써..........그러니깐 남자로 어떻냐구."
"남자? 나 찬혁 만난다고 했잖아."
하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 저런 질문을 하는 건지, 분명 도현씨가 핸드폰까지 선물을 했는데 굳이 저런식으로 질문하는 의도가 수상하다. 하지만 혜진은 도현이 선물한 핸드폰이 단지 어젯밤 일 때문일거라 생각하기에 영 마음이 불편하기만 하다. 애써 도현의 선물이 아무 의미도 없는 그냥 단순한 호의에 불과하다며 변명을 해보지만 말이 안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혜진이다. 하연은 쓱쓱 앞치마에 흙 묻은 손을 문질르곤 머그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음 마셨다.
분명 도현과 무슨 일이 있었던거 같은데, 대놓고 물어봐도 신통한 대답을 들을수 없다. 혜진이 스스로가 말을 할때까지 기다릴수 밖에.
"아버지한테 전화는 했어?"
애써 화제를 돌리려던 혜진의 입에서 나온 말에 하연은 어젯일이 떠오르는지 이내 시무룩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세세하게 집안일을 떠벌리는 하연이 아니기에 대강의 내용만 알고 있을뿐이지만, 어쨌든 세라라는 그 여자, 하연에게 탐탁지 않은 사람이며 한번씩 집에 다녀올때마다 마음 상해하는 이유가 되는 사람이란 걸 알고 있다. 혜진은 그런 하연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생신날 밥도 안먹고 나왔으면 아버지가 많이 맘 상해하셨을거 아냐. 전화 드려."
"아직 그대로인가봐. 그 여자랑. 빨리 어떡해든 결론이 났으면 좋겠는데, 아버지가 아직까지 그 여자를 그냥 놔두는게 이상해. 난 반대 할 생각 없다고 했는데......그 여자, 맘에 안드는건 사실이지만 아버지가 좋다면야 내가 무슨 상관이야. 내가 그 여자한테 불손하게 군 건 사실이지만, 엄마 유품에 손만 안댔어도 안 그랬을 건데.......아버지랑 관계가 정리되고 나면 어떡해서든 엄마 물건 다 가지고 나오고 싶어."
"그럼 아까 한판했다는게 그 소리야? 그 여자는 왜 자꾸 그런다니."
대강의 이야기가 짐작이 가는 혜진이 하연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어쨌든 그 덕에 찬혁과 만났고, 그리고 애인이 됐으니 어쩌면 전화위복이라며 하연을 위로했다.
"근데 너 찬혁씨 오피스텔은 어떻게 간거야? 찬혁씨가 같이 가자고 했어?"
"아니, 말했잖아. 술 마시고 인사불성 됐다고. 찬혁씨가 첨엔 호텔을 잡아주려했는데, 이상한 남자들이 따라왔나봐. 그래서 그냥 자기 오피스텔로 데려간거래."
"그러니깐 뭐야? 술에 취한 너를 찬혁씨가 엎고갔다는 거야? 그 아저씨들을 따돌리고? 우와~찬혁씨, 참 재주도 좋다."
"그러거 같지? 나도 놀랬다니깐."
혜진의 반응에 하연의 얼굴에 배시시 웃음이 떠오른다. 좀 뭐랄까 여지껏 아버지가 들이민 사진속 남자들이랑은 다른 느낌이다. 어쩌면 우연히 다이어리가 바뀐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런걸 인연이라고 하는걸까? 이런 시골에 살면서 남자를 만난다는 건, 더구나 서울에 살고 있는 남자를 만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하연은 자신이 누군지를 모른다는 게 맘에 들었다. 아버지의 기준에 맞춰 들이밀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배경에 대한 선입관을 가진 사람들이고, 어떤 경로로든 자신에 대해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찬혁은 다르다. 작정을 하고 일을 꾸몄다면 모를까 그냥 한 여자인 정 하연으로 만날 수 있는 사람이다. 지난번 정우 선배와 마주쳤을때 그녀가 느끼기에 맺고 끊는게 분명한 사람 같았다. 싫다, 좋다, 자신의 의사를 똑똑히 밝힐수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처럼 우유부단하지도 않고 숨을 곳을 찾아다니지도 않고, 게다가 그는 무척이나 따뜻한 미소를 가지고 있다.
"그럼 결정한거네. 그럼 도현씨는 어쩌냐?"
"너 아까부터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는데 왜 자꾸 도현씨를 끌어다 붙여?"
"그게.......내가 보기에 도현씨도 너한테 관심이 있는거 같던데.......어제도 여기 왔었는데 널 찾더라."
"어제? 어제 도현씨가 여길왔단 말야?"
"그냥 너 기다리면서 둘이서 와인 한잔씩 했는데........."
"같이 마신거야?"
혜진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거짓말을 하려니 이 모양이다. 이렇게 저렇게 갖다 붙이려니 엉망진창이 되버렸다. 혜진은 면목없는 듯 고개를 푹 떨궜다.
"같이 마셨어. 너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길래........"
"뭘 물어? 도현씨가 나에 대해 물었단 말야?"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이것저것 묻길래.......별 말 안했어. 내가 너에 대해 아는게 얼마나 된다구........솔직히 니가 누구 집 딸인지도 모르고 니네 아버지 하시는 사업에 대해서도 아는게 없잖아. 그냥 좀 사는 집 얘가 아버지랑 새 엄마랑 맞지 않아서 나와서 사는가보다 하는 정도지."
"아직 새 엄마 아니라고 했지. 아무래도 너 이상해. 너 도현씨랑 무슨일 있었지. 어제 같이 술을 마셨다면 도현씨는 언제 간거야? 여기서 잤어?"
"아.......아냐!!! 너도 없는데 어디서 자!!!"
"술 마셨다며, 대리도 없는데 어떻게 간건데?"
"그러니깐 그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던 혜진은 이내 포기라도 한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팍 떨어뜨린다. 그 모습에 하연은 놀란 토끼눈이 된다. 지금 혜진의 저 태도는 자신이 설마설마 하며 상상하는 그런 일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헉!!!!!! 너 정말?"
"나도 모르겠어. 어떡하다가 그렇게 된건지. 같이 술을 마신 기억밖에 안나는데 일어나보니깐, 일어나 보니깐 그 사람이랑 같이 침대에 있는거야."
"같이 잤어!!!!!!!!"
"그런거 같아. 둘 다.......... 옷을 안입고 있더라구."
하연은 울상을 지으며 두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마구 흔들어대는 혜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당황스럽기도하고 어이가 없기도하고 솔직히 무슨 말을 해야할지 언뜻 생각이 떠오르질 않는다.
"그 사람은 뭐래?"
"몰라. 내가 먼저 눈이 떠져서 도망나왔어. 니 방으로, 아무일도 없는것처럼 시치미 뚝 떼고 나왔는데 얼굴을 못보겠더라. 그 사람도 마찬가지고. 둘 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거든."
"정말 어이가 없네. 술을 얼마나 마신거야?"
"그 사람이 가져온 와인 한병이랑 집에 있던 소주 네병..........."
소주 네 병에 취해 기억도 못할만큼 술이 약한 혜진이 아니었는데, 저렇게 기억까지 오락가락하는 걸 보면, 그 와인이 문제였나보다. 게다가 저녁도 먹지않은 빈속에 술을 마셨다고 하니 아무래도 원흉이지 싶다. 하연은 도무지 이해 할 수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인다. 혜진은 그렇다치더라도 도현의 행동은 이해가 되지않는다. 정말 혜진의 생각처럼 술김에 원하지도 않던 혜진과 하룻밤을 보낸건지, 그 책임감으로 혜진과의 관계를 지속하려는건지 알수가 없다. 하연은 머리카락을 부여잡고는 흔들어대는 혜진을 보며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내가 미쳤었나봐. 하연아 나 어떡하면 좋아?"
"그러니깐 넌 도현씨가 니가 아닌 날 좋아하는데 술 때문에 너랑 하룻밤을 보냈고, 그래서 책임을 지려고 하는것 같다는 거야?"
"맘에도 없는 사람 같이 하루밤 잤다고해서 책임지라고 할 수는 없어."
"니 맘은 어떤건데? 넌 도현씨가 좋아?"
".........그런거 같아......."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는 혜진을 보며 하연은 깊은 한숨을 내쉰다. 분명 도현은 찬혁과의 만남을 축하해줬는데 혜진은 왜 그런 도현을 오해하는 걸까? 하연의 손안에 든 머그잔 속의 커피가 점점 식어가고 있었다.
첫댓글 혜진의 도현에대한 자신감이 없는 생각에 도현의 진심을 모르고 혼자 끙끙앓는모습이
안스럽기까지 하네요 ㅎㅎ
아무튼 찬혁과하연 도현과 혜진 커플이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