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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평구전집>을 올리는 이유
<노평구전집>(전16권)은 노평구 선생이 1946년 11월부터 1999년 12월까지 간행했던 월간 <성서연구>와, 1960년에 창간하여 제8호까지 간행된 월간 <진리와 독립>에 수록된 글들을 모은 것입니다.
이렇게 된 데는 대략 두 가지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선생은 일제 시대에 배재중학교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했다가 약 1년간 옥고를 치르는 바람에 제도 교육을 정상적으로 마치지 못했습니다. 총독부 지시로 강제 퇴학 조치 되었기 때문에 출옥 후에 국내에서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노평구 선생이 이른바 '한글세대'가 아니라는 점도 고려되어야 하겠지요.
둘째, 더욱 중요했던 것은, 제가 곁에서 지켜보아서 잘 압니다만, 선생은 가정적 어려움과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일생 반듯한 서재에서 참고자료를 동원해 가면서 집필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일본에서 10년간 공부하면서 모아놓은 귀중한 성경 참고서들과 쓰카모토 선생 문하에서 성서강의를 들으면서 기록해두었던 다량의 노트를 해방 직후 화재로 모두 잃었습니다.
간장공장 2층에 세를 들어 살다가 1층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책을 비롯한 세간살이가 모두 불타버렸고, 선생 자신도 불을 피해 2층에서 뛰어내리다가 발목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런 곤궁한 처지에서 선생은 일생 덕수궁 같은 고궁 벤치에서 또는 호텔 커피숍 등에서 아무런 자료도 열람하지 못한 채 원고를 작성하곤 했습니다.
(물론 그 후 일본 등지의 친지들 도움으로 중요한 성경 참고서들을 다시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인께서 생계를 위해 가정에서 조산원[助産員] 일을 하셨으므로 자택에서 안정된 여건 가운데 집필 작업을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
저 역시 글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입니다만, 제가 볼 때 선생의 집필 여건은 "최악"이었던 것으로 판단합니다. 역사, 철학, 사상, 문학 등이 수시로 인용되는 원고를 아무런 참고자료 없이 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김교신 선생은 정릉 자택 한편에 별채로 서재를 짓고 <성서조선> 원고를 썼습니다. 김교신 선생은 자신의 서재를 "군함"에 비교하면서 누구에게도 책을 빌려주지 않았습니다. 전투가 벌어지면 대포, 권총, 소총 등 군함의 모든 무기가 총동원되어야 하듯이, 글을 쓰다보면 언제 어떤 책이 필요할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노평구 선생의 원고집필 환경은 김교신 선생보다 훨씬 열악한 것이었습니다. 김교신 선생이 양정학교 등 교직에 몸담고 있으면서 고정적인 수입을 갖고 있었던 데 비해, 노평구 선생은 일생 한번도 월급 나오는 직장을 다녀본 적이 없었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노평구 선생께서는 당신의 그런 한계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70년대 말 <종교와 인생>, <로마서강의>, <마태복음강연>등의 책을 편집할 때 장문강, 임세영, 박상익 등의 젊은이들을 불러내어 문장을 교열하도록 부탁했습니다. 서울역 뒷골목 허름한 다방에 온종일 죽치고 앉아 여러날 함께 교정을 보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유신말기에 다방에 설치된 텔레비전으로 박정희가 개천절 기념사를 하던 암울한 장면을 선생과 함께 시청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 때의 짓눌린 기분도...)
오래 앉아 있자니 다방 주인에게 눈치가 보여서 하루에도 여러 차례 이것저것 마실 것을 주문해야만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선생과 오래 시간을 함께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거든요. 맛있는 것도 많이 얻어먹고...)
교열보는 젊은 친구들이 문장의 오류를 지적하면 선생은 거의 전적으로 젊은이들의 의견을 수용하면서 마음대로 고치라고 말씀하곤 했습니다. 물론 때로는 어떤 문장이 옳은가를 놓고 문법지식을 총동원 하면서 격론이 벌어진 적도 많았습니다. 특히 어학에 조예가 깊었던 장문강이 문법적인 문제를 앞장서서 제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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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몇 해 전 노평구 선생 생존시에 선생의 허락을 얻어, <노평구전집> 제1부에서 각별히 <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현대사>에 어울리는 글들을 가려 뽑고, 문장을 오늘날의 감각에 맞게 가다듬어 새롭게 한 권의 책으로 묶어낼 계획을 세웠습니다.
아무래도 <전집>은 분량이 너무 많아서 일반 독자들이 접하기 어렵기 때문에 일단 <전집> 1-5권(제1부)에서 좋은 글을 뽑아내어 단행본으로 출간할 필요가 있다고 제가 직접 선생께 건의를 드렸던 것입니다. 물론 이때도 선생께서는 "마음대로 하라"고 흔쾌히 허락하셨습니다.
요즘 올리는 글들은 선생의 글을 제가 직접 다듬은 것입니다. 거친 부분은 잘 다듬고 깎아내어 문장의 완성도를 높여서 단행본의 원고로 삼으려 하고 있습니다. 굼벵이처럼 느릿느릿 원고 정리를 하고있는 셈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눈으로 본 한국 현대사"라고 표현할 수도 있는 이 글들을 카페에 당분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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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제가 50-60년대 연세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작고한 "홍이섭"(1914-1974)이란 한국사학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이분은 생전에 탁월한 한국사학자로 널리 인정을 받던 분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분의 책을 읽다보니 문장이 너무나 난해해서 도저히 읽어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알고보니 홍이섭 선생의 글은 학계에서도 "악문"(惡文)으로 평판이 자자했습니다.
제 말을 들은 노평구 선생은 지나가는 말처럼 "홍이섭 선생의 제자들이 스승의 글을 잘 정리해서 새롭게 책으로 펴내야 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스승이 다 이루지 못한 부족한 부분을 제자들이 보완해야 할 것이라는 취지의 말씀이었습니다.
항상 공적인 관심을 갖고 한국 사회의 진보와 발전을 염원하셨던 선생께서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학문이 발전하고, 그렇게 되면 또 우리 민족과 사회도 진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셨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사실 노평구 선생께서 60년대에 힘들여 <김교신전집>을 츨간하신 뜻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봅니다.
저는 이때 노평구 선생이 홍이섭 선생에 대해 하신 말씀을 제게 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저 역시 선생의 글을 보완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전집> 전부를 저 혼자 다듬는다는 것은 역부족입니다. 현재로서는 일단 단행본으로써 노평구 선생의 신앙과 사상을, 그리고 한국 사회에 대한 선생의 매서운 예언자적 질타를 일반 대중에게 소개할 계획만을 갖고 있습니다.
기왕에 책으로 출간된 <노평구전집>을 새삼스럽게 뭐하러 다시 인터넷에 올리는가 하고 의아해 하실 분들을 위해 장황한 글을 적어보았습니다.
널리 이해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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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많이 많이 읽고 퍼가겠습니다. 노 선생님의 로마서로 공부하다가 뒤 늦게 무교회 신앙에 접하게 되어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우연히 81년경에 로마서 책을 접하고 신앙에 눈이 번쩍 뜨여지는 경험을 했고 40에 접어서야 교회를 탈출하여 1994년경부터 무교회 집회에 참석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요즈음도 생각하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모두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생각하며 제일 말단에서마 선생님의 신앙을 여러분에게 알리고 싶어 잘 읽고 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벌써 8년전에 쓴 글이네요. 이거 언제나 마치려는지... 몸은 늙어가고 당장 할 일은 눈앞에 쌓여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