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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이 |
폭 |
높이 |
비신 |
53 |
14.5 |
109 |
비좌 |
86.5 |
54.5 |
21 |
5. 윤징 묘(사진 19~22)
윤징(尹澄, ?~?)은 시영의 次男으로 자세한 이력은 전해지지 않는다. 부인은 초계 변씨(草溪卞氏)이며 관품은 장사랑(將仕郞)에 올랐다. 종제(從弟) 윤결(尹潔, 1517~1548)이 춘추관 시정기(時政記) 필화사건으로 참형당한 안명세(安名世, 1518~1548)를 두둔하다 밀고되어 국문(鞠問)을 받던 중 옥사(獄死)하자 은둔하였다. 아들 윤우신이 2품에 올라 한차례 증직을 받은 이후 우신이 호성공신에 책록됨으로써 다시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초계변씨 역시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추증되었다.
묘소는 윤은 묘소 좌측 아래에 위치하며 쌍분으로 조성되어있다. 1997년에 새로 건립한 비석을 비롯하여 상석, 향로석, 계체석을 새로 조성하였으며, 옛 석물은 묘표 1기와 망주석이 남아있다.
묘표는 방부원수 형식으로 대리석 재질로 만들었는데 음기는 없고 전면에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觀象監事行將仕郞尹公之墓 贈貞敬夫人卞氏之墓”라 하였다. 전면 우측에 “萬曆三十九年辛亥七月日立”이라 기록되어 1611년(광해군 3) 세워진 것을 알 수 있다. 비신의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비좌는 화강암으로 조성하였다.
망주석은 형태상 18세기 중반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윤염에 의해 세장지를 정비할 때 만든 것으로 보인다.
* 묘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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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이 |
폭 |
높이 |
비신 |
61 |
18.5 |
155 |
비좌 |
93.5 |
54.5 |
22(매몰) |
* 망주석
폭 |
높이 |
31 |
147 |
그림 19) 윤징 묘소 전경
그림 20) 묘표 망주석(좌) 그림 22) 윤징 망주석(우)
6. 윤식 묘(사진 23~25)
윤식(尹湜, ?~?)은 젊은 시절 종제 윤결이 윤원형(尹元衡, ?~1565)에 의해 옥사(獄死)하자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은둔하였다. 윤시영의 아들로 숙부 윤시호의 양자로 입계(立系)되었다. 부인은 완산 이씨(完山李氏)이다. 사후 아들 윤자신이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녹훈(錄勳)되자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용은부원군(龍恩府院君)으로 추봉(追封)되었다. 완산이씨 역시 정경부인으로 추증되었다.
묘소는 윤청 묘의 우측에 위치하며 합장묘로 조성되어있다. 망주석을 제외한 다른 석물은 모두 근래에 새로 마련한 것이다. 망주석은 16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1980년대 세운 묘표와 2006년 세운 비석이 있다.
* 망주석
폭 |
높이 |
35 |
128.5 |
그림 23) 윤식 묘소 전
그림 25) 망주석(우)
7. 윤자신 묘(사진 26~28)
윤자신(尹自新, 1529~1601)의 자는 경수(敬修)이며 부친은 윤식이다. 1562년(명종 17)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참판, 공조 ․ 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우승지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扈從)하였으며 다시 종묘서(宗廟署) 제조(提調)로 임명되어 종묘의 역대 국왕 신주(神主)의 호종을 맡았다. 그 공로로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 2등, 용원부원군(龍原府院君)에 봉해졌다. 부인은 파평 윤씨(坡平尹氏, 1531~1601)로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윤은과 윤시영 사이의 구릉 사면에 위치하며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다. 망주석을 제외한 다른 석물은 모두 새로 조성되었다. 묘소 사면 아래에는 신도비가 위치하고 있는데 이정구(李廷龜, 1564~1635)가 찬술한 내용을 1985년 10대손 윤태희가 써서 건립한 것이다. 망주석은 17세기 전반기에 조성된 것으로 화강암 재질로 조각 수법이 고졸(古拙)하다.
* 망주석
폭 |
높이 |
31 |
139 |
그림 26) 윤자신 묘소 전경 그림 27) 망주석(좌)
그림 28) 망주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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