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김명준 사무총장입니다.
몽당연필에서는 오늘부터 <우리학교 이야기>라는 시리즈로 일본의 잡지, 책 등 여러 출판물에서 등장하는
우리학교, 우리동포 이야기를 번역하여 연재할 예정입니다. 현재
몽당연필의 일본어 스터디 소모임 ‘일어나’의 책임강사인
‘정미영’ 교육팀장과 몽당연필 회원 내에 일본어 가능자들의
자원봉사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자원봉사 신청은 몽당연필 이메일 mongdangpen21@gmail.com 으로 해주십시요. 교육팀에서 일본어 원본 자료를 보내드립니다. ^^
발생기의 우리학교 VOL.1 _ 도쿄조선제4초중급학교 (글 이상영)
창립 70주년, 아라카와 제방의 석양은 영원히.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이 시작되어 70년을 맞고 있다. 도쿄 유수의 동포집단 거주지역인 아다치(足立)에서는 조국해방
직후인 1945년 9월에 현재의 조선학교의 원형이 된 <국어강습소>가 탄생했다.
민족을 되돌리다
<아다치(足立)를 통해 본 재일코리안 형성사> (강철, 웅산각) 에 의하면, 우메다쵸(梅田町), 현재의 니시아라이사카에쵸(西新井栄町)에 있던 동아공업주식회사의 공장 일부를 빌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 시작되었다. 교장은 이 회사의 사장이던 윤병옥씨가 맡았다. 도쿄제4초중급학교의 연혁사에는 국어강습소가 개설된 9월 13일을 학교 창립기념일로 하고 있다.
이후, 센쥬아사히쵸(千住旭町), 고탄노미나미마치(五反野南町)에서도 각각 일본의 시설을
빌려 교육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시작한 아다치 구내 국어강습소 세 곳을 통합해 47년
2월, 현재의 모토키 1쵸메(本木1丁目)에 해당하는 곳에 도쿄조선아다치초등학원이 건설되었다.(48년 4월부터
도쿄조선제4소학교)
교장은 나중에 도쿄조선중고급학교의 교장을 맡게 되는 임광철씨였다.
오기옥씨(79)는 이 학교의 제3기
졸업생이다. 46년 11월 효고현 니시노미야에서 아다치로
이주했던 당시, 마침 통합을 한창 진행하던 때였다고 한다. 오씨는
47년 개교와 동시에 초급부 5학년에 입학했다.
"지붕이 하나로 이어진 목조 건물로 지금의 아라카와강 상류 쪽에 있던 구 니시아라이교 근처에 있었지. 전교생이 120명
정도였을까?” 라며 회상한다.
모토키(本木) 일대는
‘넝마주이’라 불린 폐품수집을 하던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었다. 동포들의 생활은 가난했지만 힘을 모아 학교를 지었다. 오씨는 해방
전에 거의 학교를 다닐 수 없어서 니시노미야에 있던 국어강습소에서 귤상자를 책상으로 만들어 공부했다. 그래도
배우는 기쁨은 컸다.
“아다치 학교에는 책상도 있고, 좁지만
운동장도 있었지. 입학했을 당시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오씨는 다음해 3월, 2기생과
함께 1년 일찍 졸업해서 도쿄조선중학교(당시)로 진학했다. 아다치초등학원에 다닌 것은 1년 남짓이지만 당시의 동무들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존재”라고 한다.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우리말을
모르면 자기 민족을 되찾았다고 할 수 없지. 그래서 부모들이 맨 처음으로 한 것이 아이들의 교육이었어. 그런 정열이 있었으니까 가난한 환경에서도 학교를 만들고 지켜왔던 게 아닐까.”
당국의 조선학교 탄압에 의해 이 학교는 일시적으로 도립학교로 이관되었지만,
55년 도쿄조선제4초급학교로 개칭. 60년대
부터는 학생수의 증가에 따라 중급부를 신설 (64년), 2년
후인 66년에는 4층짜리 철근 건물을 지어 신교사의 낙성식을 가졌다.
- 아다치 초등학원 낙성식 기념사진(1947년 2월)-
교사이전, 새로운 역사의 시작.
신교사 준공으로부터 7년이 지난 73년, 도쿄도의 도시계획에 의한 고속도로건설 때문에 갑자기 학교
이전 문제가 발생했다. 퇴거 대상에는 학교 이외에도 지역동포가 운영하는 작업소와 주거지도 포함되었다. 총련지부, 상공회, 학교교육회 대표자들이 도쿄도 측과 교섭에 임했다. 당시 이 학교의 교무주임을 맡고있던 강수남씨(아다치 지역 상공회
부회장)에 의하면, 도쿄도 측이 이전할 후보지 몇개 지역을 제안했지만, 학생들의
통학거리와 부지의 면적 문제에서부터 쉽게 타협이 되지 않아 교섭이 장기화되었다. 83년에 들어서 겨우 이전 장소가 정해졌다. 오키노쵸(興野町)에 있었던 큰 가죽구두 메이커인 스탠다드 제화 공장이 있던 부지다. 그러나
신교사건설은 주변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지역동포들이 주민들을 설득해 학교견학을 할 수 있게 했다.
“10명 정도가 대표로 학교를
방문해 등교 때부터 하교 때까지 마음대로 볼 수 있게 했어. 보고난 후 감상을 들으니
<소문에 들은 것보다 나쁘지 않은 학교> 라 했지. 태도가 변해가는 걸 느꼈어.” (강수남씨)
주민들과의 꾸준한 대화를 통해 반대의 목소리가 차츰 줄어들었다고 한다. 니시아라이
병원의 창설자 김만유씨가 건설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지역이 모두 나서 모금활동을 전개해 84년 9월, 드디어 신교사가 준공되었다.
학교 이전 통고로부터 11년의 세월이 흐른 시점이었다. 준공식에
초대된 지역동포들은 철근 콘크리트, 타일로 된 현대적인 건물에 저절로 탄성을 질렀다고 한다.
신교사 건설 사업에 종사했던 양석하(87)씨는 “어느 곳 보다도 훌륭한 학교를 건설하기 위해 애썼어요. 신교사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은 우리들한테 큰 자랑이었어요.” 라며 당시를 회고했다.
신교사 건설 후에도 운동장 맞은편에는 한동안 스탠다드제화 공장 건물이 남아 있었다.
<회사 전체가 하나가 되어 학교지원을 적극적으로 해주었지. 학교행사가 있을 때는 건물 내부를
주차장으로 개방해 주기도 했어. 지역주민들도 해가 갈수록 학교에 대해 많이 이해하게 되었지.> 라며 강씨는 회상한다.
- 1949년 당시 교실 수업 풍경 -
학교는 고향
아라카와(荒川) 제방과 콘크리트 운동장. 40대 이상의 많은 졸업생들은 구
교사의 추억으로 이 두가지를 든다. 저무는
석양에 물든 제방과 하천부지는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학교 운동회 때에는 사람들이 그 제방 위에 옹기종기
모여 구경했다. 축구연습을 하면서 생긴 큼직막한 '비프 테키(찰과상 흉터)' 는 아픈 기억과 더불어 애틋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학교 이전으로부터 30년. 구 교사가 있던 곳에서 당시의 모습을 찾는 것은 어렵지만, 장소가
바뀌어도 지역동포들의 학교에 대한 마음은 변함이 없다.
“우리학교는 모두를 하나로 만드는 구심점 같은 것이야” 라고 강씨는 지적한다.
“우리학교는 고향이야.”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20년
이상 학교교육회 회장으로 근무한 유찬삼씨가 생전에 신 교사에서 들려오던 아이들의 우리말을 들으며 이렇게 얘기했던 것을 이 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작곡가 김학권(66)씨는 지금도 기억한다고
한다.
2014년 2월 2일, 교사 이전 30주년 기념공연에는 “미래로의 유산”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1세에서
2,3세 그리고 4,5세로. 민족교육의 불꽃은
지역 공동체의 중심으로 떠오른 젊은 세대가 이어가고 있다.
2015년, 학교는 창립 70주년을 맞는다.
- 현재의 도쿄조선제4초중급학교 -
* 월간<이어> 2015년 1월호에서.
첫댓글 본문 가운데 '아라카와 제방'은 낯설지 않은 동네군요. 1923년 동경대지진 관련한 기록영화를 보았을 적에 조선사람들의 피해상황과 관련된 제방이었던 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