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 김씨 종택 (義城金氏 宗宅)
(소재지: 경북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280)
2008년 11월 6일 오늘은 원우9명과 함께 유고수님을 모시고 영남의 4대 길지인 의성김씨 집성촌을 이룬곳 진천마을로 향 했다.
그들이 중시조로 모시는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의 조부인 김만근(金萬謹)이 임하현의 오씨 부인에게로 장가를 들어 처가인 이곳에서 살면서 점차 그 후손들이 번성하여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 기와집들 가운데 가장 웅장한 규모로 제일 너른 자리를 차지한 의성김씨 종택은 청계(靑溪) 선생을 불천위(不遷位)로 모시는 대종가로 오자등과댁(五子登科宅), 육부자등과지처(六父子登科之處)로 널리 알려진 집이다. 의성김씨 종택이 오자등과댁, 육부자등과지처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청계선생이 자신의 벼슬보다는 자손들의 영예를 선택한 때문이라고 한다. 문장이 뛰어난 청계선생은 생원이 된 후 대과를 준비하고 있을 때 한 관상가를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살아서 벼슬을 하면 참판에 이를 것이나 자손 기르기에 힘쓰면 죽어서 판서에 오를 것이다."라는 예언을 듣고 자신의 벼슬보다는 자손의 영예를 선택해 대과를 포기하고 자손들의 학문 장려에 힘썼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다섯 아들인 약봉(藥峯) 극일(克一), 귀봉(龜峯) 수일(守一), 운암(雲巖) 명일(明一), 학봉(鶴峯) 성일(誠一), 남악(南嶽) 복일(復一)이 모두 과거에 급제해 이 집을 오자등과댁(五子登科宅)이라 불리게 되었고, 자손들이 높은 벼슬을 하였으므로 청계선생은 이조판서에 증직되어 이 집을 육부자등과지처(六父子登科之處)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곳 내앞마을의 현무봉은 낙동정맥의 통고산(1067m)에서 분맥한 용이 일월산(1291m), 청량산(870m)을 거쳐 낙동강과 대곡천 사이로 힘차게 내려와 나지막하게 일으킨 봉우리다. 마을입구에서 집 뒤 현무봉을 보면 마치 편안하게 누운 소가 한가로이 풀을 되새김질하고 있는 모습이다. 풍수형국명을 붙이자면 와우형(臥牛形)에 해당한다. 풍수에서 형국론(形局論)은 주산이나 현무봉의 모양을 어느 물체에 비유하여 이들의 기가 가장 많이 모이는 부분에 혈을 정하는 방법일 뿐 형국명이 길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들짐승인 호랑이(虎), 사자(獅), 소(牛), 개(狗), 쥐(鼠)등은 생기가 코, 배, 젖가슴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곳에다 혈을 정하는 방법이 있다고 유고수님이 설명하신다.
우선 주산이나 현무봉의 모습이 비유하는 물체와 흡사해야 하며, 주변의 사(砂) 등이 형국명을 붙이기에 맞는 조건을 구비해야 한다. 즉 맹호출림형(猛虎出林形)이라면 호랑이가 숲을 나오는 형국으로 호랑이가 숲 속에서 나오는 원인이 중요하다. 그것은 안산(案山)의 형상이 졸고 있는 면구안(眠狗案)으로 보인다든지 명당 주변에 개, 토끼 등을 닮은 형상의 바위나 산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러한 짐승을 잡기 위해 호랑이가 숲을 나오기 때문이다.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 갈록음수형(渴鹿飮水形)은 목마른 말이나 사슴이 물로 내려오는 형국으로 혈장 앞에 연못이나 시냇물이 있어야 하고, 이곳 형국명을 와우형으로 보는 것은 현무봉의 모습이 소가 누운 모습과 흡사하고, 와우형이 갖춰야 할 조건인 풀 더미에 해당되는 적초안(積草案)과 소가 밭을 갈 수 있도록 마을 앞에는 경전안(耕田案)인 평평한 들, 경전을 갈 쟁기를 끌 멍에 같은 사가 있어야 성국이 되는데 이곳은 이러한 조건을 완벽하게 갖췄기 때문이다. 강 건너 안산이 마치 풀 더미 같고 집 앞으로 펼쳐진 들은 소가 일을 할 수 있는 넓은 경전(耕田)이다. 경전을 갈 쟁기를 끌 멍에는 종택의 내백호를 이루는 봉우리와 거기와 이어진 능선이다. 넓은 경전에 비해 소먹이가 반변천 건너에 있고 또 부족하다고 생각해서인지 반변천변에는 인공적으로 울창한 소나무 숲을 조림하여 개호송이라 하였다.
이 마을에 사는 후손이 들려 준 이야기에 의하면 “종택에 앉아 담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갓이 보이면 땅의 정기가 다 된 증거이니 다른 곳으로 이사하라고 선조들이 말했기 때문에, 후손들은 강 건너편으로 길을 만들었고 길에서 마을이 보이지 않도록 소나무 숲을 조성했다”고 한다. 대개 해변이나 강가에 조림한 소나무 숲은 모래를 막기 위한 방사림 또는 바람을 막기 위한 방풍림으로 조성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이곳은 조산(朝山)들이 나성을 이루며 감싸고 있어 마을에는 모래나 바람으로부터 직접적인 피해는 없을 것 같으므로 풍수적 비보(裨補)의 목적으로 숲을 조성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이는 선조들이 이곳 형국을 와우형으로 보았다는 증거다. 담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갓이 보이면 땅의 정기가 다 된 증거라는 뜻은 마을 앞으로 길이 생겨 사람이 다니면 소가 먹이를 먹는데 방해를 받기 때문일 것이고, 소나무 숲을 조성한 것은 바로 소의 먹이인 적초안이 반변천 건너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왜 소의 먹이인 소나무 숲을 마을 가까이 조성하지 않고 멀리 강가에 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이는 멀리 있어야 소가 먹이를 먹기 위해서 열심히 마을 앞의 경전을 갈 것이고, 또한 선조들이 후손들에게 열심히 노력하면 훗날에는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을 자연을 통해 가르치려 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니 의문은 금방 풀린다.
이곳에 살면서 김극일 등 오형제가 나란히 등과하여 부귀영화를 누렸다고한다.
와우형에는 코, 배, 젖에 해당하는 곳에 혈을 결지하기 때문에 이러한 곳에다 집터를 정해야 하는데 의성김씨 종택은 코 부분에, 소종가들은 배와 젖에 해당하는 부분에 자리하였다. 종택이 마을의 중심에서 좌측으로 비켜난 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되새김질하고 있는 소는 코에 가장 많은 기가 집중되므로 이곳에다 자리한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형국이 좋아도 용이 부실하면 그 자리는 허혈(虛穴)이 되는 것이다.
종택 뒤로는 소머리 부분이 되는 현무봉정상에서 내려오는 입수룡이 마을 입구에서도 뚜렷하게 보여 튼실한 용임을 짐작하게 한다.
<사진: 누운 소의 형상을 한 현무봉. 종택은 소코에 해당하는 곳에 자리했다.>
보물 제450호로 지정된 의성김씨 종택 건물은 처음 지었던 집은 조선 선조 때 불타 없어지고 지금 남아있는 집은 학봉 김성일이 16세기말 북경에 사신으로 갔을 때 그곳 상류층주택의 설계도를 가져와 재건하였다고 한다. 행랑채에 난 출입문을 들어서면 우측에는 口자 형태로 안채가 자리하였고 좌측에는 一자 형태로 사랑채가 자리하였다. 집 앞에서 보아 지붕의 측면만 보이고 가장 높아 보이는 건물이 안채의 몸채다. 口자형 안채와 一자형 사랑채가 행랑채 및 다른 건물과 이어져 전체적으로는 巳자형 평면을 이룬다. 안채의 몸채 지붕이 측면만 보여 向을 출입구 쪽이 아닌 좌우의 다른 향을 놓았지 않았을까 싶어 제어 보니 사랑채와 같은 癸坐丁向으로 출입구 쪽에다 향을 대었다.
그런데 안채가 출입문에서 가장 깊숙하고 먼 곳에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출입문을 들어서자 말자 우측으로 바로 안채이고, 이에 반해 사랑채는 별당처럼 가장 먼 안쪽에 배치되어 있다. 뭔가 이상한 배치가 된 것이 건물의 배치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출입문을 지금의 자리에 잘못 배치한 것이 원인인 것 같다. 마을이 보이지 않기 위해 인공적으로 숲을 조성했던 그들이 종택으로 들어오는 길과 직충(直衝)이 되게 출입문을 배치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행랑채가 길게 가로 놓여있지 않다면 집 안이 훤하게 드러나 보일 출입문의 배치다.
분명 지금의 장소가 아닐 것이라고 짐작은 하지만 정확히 이전에는 어디라고 단정할 수가 없어 답답했는데 유교수님이말씀이 엣날에는 지금의 출입문 앞은 담장을 둘렀고 그 당시에는 좌측의 사랑채와 연결된 대문채(추정)에 출입문이 있었음을 이야기하신다. 그래서 종택의 배치 역시 사대부가의 일반적인 배치처럼 안채가 출입문에서 가장 깊숙하고 먼 곳에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외부에서 종택으로 출입하는 길 또한 지금과 같이 직충되게 나지 않고 집 앞으로 가로로 나 있음을 알 수 있셨다.
현재 전체 55칸으로 알려져 있는 종택 내부에서 사랑채와 안채를 살펴보면 기단은 사랑채가 높은데 집의 높이는 안채가 더 높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랑방은 기단에서도 몇 단을 더 높이 쌓아 안채의 방들보다 더 높게 방을 만들어 가장 위계가 높은 사람의 공간임을 보여준다. 사랑채에 이어지는 부속건물은 2층 구조로 위층은 서고이고 아래층은 헛간이다.
이 집에는 특별한 방이 있는데 과거에 급제한 청계선생의 다섯 아들이 모두 여기서 태어났다고 한다. <<설심부>>에서 주장하는 ‘지령(地靈)은 인걸(人傑)’임을 입증하는 방이라 풍수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흥미를 끄는 공간이다. 산실(産室)이라 불리는 방으로 사랑채와 거의 겹쳐지는 안채의 끝 지점에 있는데 이 방 뒤가 바로 이 집으로 용맥이 뻗어 내려오는 현무봉이다.
문이 굳게 닫혀 산실을 볼 수는 없었지만 일설에 의하면 이전에는 출가한 딸들이 아이를 출산하기 위해 이 집으로 왔는데 여기서 출산을 하면 지기(地氣)를 타성(他姓)에게 뺏기므로 아예 산실을 없애버리고 마루를 깔아 대청으로 만들었다가 최근에 다시 복원했다고 한다.
과연 종택의 중심되는 혈처는 어디일까 싶어 급하게 내려온 용맥을 따라 집 뒤 소머리에 해당하는 현무봉정상으로 올라가 본다. 현무봉정상이기도 하지만 생기를 정축해놓은 종택의 입수도두(入首到頭)도 된다. 입수룡(入首龍)은 밝고 깨끗하면서도 위이굴곡으로 힘차게 내려왔다. 여기서 마을입구에서는 보이지 않는 현무봉 뒤로 뻗어온 주룡을 따라 가보면 그 기세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개장천심, 기복, 박환, 과협, 위이굴곡 등 용의 변화현상에 대한 용어를 모두 동원해도 설명할 수 없을 정도다. 가면 갈수록 그 기세가 더욱 왕성하다. 혈의 크기는 용의 크기에 의해서 좌우된다고 했던가? 이 정도 용맥이니 종택이 육부자등과지처(六父子登科之處)가 된 것 같다.
같던 길을 되돌아 다시 현무봉정상에서 종택으로 내려오는 용맥을 밟고 따라오면 그 끝은 정확히 안채의 우측 끝 지점인 산실 바로 뒤다. 바로 종택의 혈처는 산실인 것이다. 이 용맥이 산실로 들어가는 그 위에다 나지막한 담장을 쌓았는데, 사랑채와 여성들이 거주하는 안채와의 구별을 위해서 상징적으로 쌓아놓은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용맥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쌓은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