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9
三. 가인과 아벨의 역사
가인과 아벨은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뒤 정배살이중에 얻은 두 자식이다. 아무튼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훔쳐먹은 덕분에 부부가 되어 사랑도 맛보고 슬하에 자식을 둔 아비, 어미가 되어 천륜지락을 누리게 되었다. 우리는 어느 구절에서도 이브가 그 두 자식을 생육하느라 <잉태의 고통과 출산의 수고>를 했다는 기술을 발견할 수가 없다. 분명 그것은 고통이 아닌 행복이요 낙이었을 것이다.
아담이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더라(4:1)
보다시피 여호와에 의한 득남이라는 사실이 축복으로 각광받으면서 잉태의 고통은 전혀 형벌답지 않게 다루어지고 있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원죄를 짓고 추방당하던 때로부터 지금까지 인간은 하나님의 벌을 받고 수형생활을 하고 있다. 아담과 이브는 <형벌>의 덕분에 처음으로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의 연을 맺고 역사적인 성결합을 가짐으로서 명실공히 인류의 조상으로 부상한다. 그 전까지 인간의 존재는 하나님의 창조에 의존해야만 가능했다. 그러나 그들의 성결합으로 더 이상 하나님의 창조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인간스스로 자신을 창조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제 2의 창조자가 된 것이다.
그들은 성결합의 방법으로 잉태하고 출산한다. 인간은 이런 신성한 창조과정을 고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러한 능력을 준 여호와에게 고마움을 느끼기까지 한다.
덕분에 사회를 구성하는 첫 세포인 가족이 탄생한다. 지혜를 얻은 인간은 하나님의 간섭을 떠나 완전히 자신의 능력으로 이 모든 것들을 해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인간의 고통은 잉태와 출산이 아닌 엉뚱한 곳으로부터 덮쳐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가인과 아벨
양과 곡물의 제물 차이는 불행의 시작이 된다
결국 하나님의 불공정한 처사는 이들 형제의 피비린 살육의 원인을 제공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4:3)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재물을 열납하셨으나(4:4)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한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4:5)
그들이 들에 있을 때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4:8)
가인과 아벨은 동시에 하나님께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만 열납하고 가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않는다.
가인이 땅의 소산을 제물로 드린 건 그가 농부였기 때문이고 아벨이 양을 제물로 드린 건 그가 목축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레위기>에 보면 곡물제사도 엄연히 율법으로 허용되고 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만 받고 가인의 제물은 거절했을까?
결국 그 때문에 가인은 질투심의 충동으로 친아우를 죽이게 된다.
누가 보아도 형 가인이 아우 아벨을 질투하여 살해하게 된 원인을 하나님의 불공평한 편애가 조성한 것이라고 느끼게 된다. 즉 인류의 첫 살인은 하나님의 불공평한 처사에 그 원인이 있다.
하나님이 가인이 바친 제물을 받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양羊보다 못한 곡물이었기 때문이며 아벨의 제물을 받은 이유는 그것이 곡물보다 귀한 양이기 때문이라는 판단도 쉽게 생긴다. 그런데도 일부 성서학자들은 하나님의 불공평한 처사가 두 사람이 드린 제물이 달라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린 것은 그가 가진 믿음이 깊어서라고 한다. 반대로 가인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아벨만큼의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전통제사법을 살펴보면 하나님이 곡물보다는 짐승을 각별히 좋아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구절마다 짐승의 피를 가장 좋아하며 양이나 염소 또는 소를 태우는 향기를 가장 좋아한다고 밝히고 있다. 곡물은 보통 제사장이나 백성들의 식용으로 돌려진다. 그러니 아벨의 제물이 하나님이 좋아하는 기름진 양羊이어서 열납했다는 이유가 더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설령 가인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아벨만큼 깊지 못해 제사를 대충 지냈거나 소홀히 하여 하나님이 그의 제물을 열납하지 않았다고 하자. 정말 그러하다면 가인은 아벨과는 달리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미루어 추측할 수 있다. 자기가 경외하지 않는 사람에게 누군가가 경외하고 그 댓가로 각별한 사랑을 받는다고 해서 질투를 느낀다는 건 비상식적이다. 가인도 하나님을 믿고 경외할 때만이 시기심의 발작이 비로서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을 누군가가 좋아한다고 해서 또 그 싫어하는 사람이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해서 질투를 느낄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인간의 첫 살인은 하나님의 불공평한 처사 때문에 생겼다
그밖에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외면하고 아벨의 제물만 열납했던 이유가 제물의 좋고 나쁨 때문이 아니라 <선을 행하지 않았기>때문이라는 이유를 달아보아도 설득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첫째는 선을 행하지 않을 구체적사례가 보이지 않는다. 가인에 대한 정보는 그가 <농사하는 자>라는 신분공개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하나님께 제사를 지냈다는 사실이 전부이다. 우리는 주어진 이 두 가지 사실에 근거하여 가인의 행위를 논할 수밖에 없다. 농사 짓는 일이 선이 아닐 수 없을테고 또 농부가 땅의 소산으로 제를 드리는 행위가 선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인은 제사도 동생보다 먼저 지냈다.
그리고 또 가인이 정말 선하지 못한 행동을 했다고 하더라도 동생을 죽인 행위에 대해서는 충분한 설득력이 부족함은 마찬가지이다. 농사를 게을리했다거나 소출이 적었다거나 농사꾼의 신세를 원망했다거나 하는 이런 행위들도 선악으로 분류하기가 어렵다. 만일 가인이 자신은 농부인데 동생은 양치기꾼임을 시기했다면 그건 가히 선하지 못한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가 선하지 못한 행위를 했다는 어떠한 주장도 겉으로는 아무리 그럴듯할 지라도 죄다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에게서 절대적인 순종을 강요하는 하나님이라면 가인이 바친 제물이 아벨이 바친 제물보다 초라하다는 이유로 그의 믿음이 부족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하나님은 살인을 범한 가인을 뜻밖에도 죽이지 않는다. 사람을 죽인 사람은 죽여야 한다는 게 기독교적율법이다. 그럼에도 가인을 죽이지 않은 건 그의 범조히가 자신의 불공정한처사에도 책임이 있다는 걸 암암리에 인정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죽이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를 암해하지 못하도록 보호까지 한다. 당시 사람이라 해보았자 아담과 이브뿐이었지만...과실살인도 아닌 고의적살인범을 예외적인 관대함을 베푸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7배나 받으라라(4:5)
<7배>라는 중형은 어떤 원칙에서 얻어낸 결론인가? 동생을 죽인 형의 죄는 추방에 그치고 그 범죄자를 죽인 자는 <벌을 7배>나 받을 것이라니?! 도대체 하나님법의 기준은 무엇인가. 범죄자에 대해 중형을 내릴 대신 비호하는 행위는 오늘 날 같으면 공범죄에 해당한다. 원칙괴 기준이 없는 이러한 수의적판결은 뒤에서도 부지기수로 발견된다.
4장 24절에서도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77배이로다>는 단락이 보인다. 76배도 아니고 78배도 아닌 77배?! 이렇듯 준확한 과학적판결의 기준은 성경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성경에서는 하나님 말씀이 곧 율법이니 하나님 기분대로 판결만 하면 그것이 곧 진리요 정당성이다. 불복이나 상소 같은 건 있을 수도 없다. 하나님이 곧 기준이고 원칙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생명임에도 불구하고 자결권을 박탈당한다.
성서학자들은 생명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라고 한다. 그 말의 기저에는 생명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라는 의미가 깔려있다.
그런데 이들은 뭔가를 오해하고 있다. 선물이라는 의미를 곡해하고 있는 것이다. 선물이란 그것이 일단 주인의 손에서 양도자의 손으로 넘어가는 순간 소유권도 동시에 이양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차라리 하나님은 생명을 인간에게 선물한 것이 아니라 사용권만 대여하고 소유권은 보류했다는 식으로 풀이하는 게 훨씬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만일 인간의 생명이 하나님에게서 대여받았거나 사용권만 양도받은 것이 아니고 선물받은 것이라면 제발 그 소유권도 전부 이양되기를 기대할 뿐이다.
하나님한테서 시한부생명을 빌려 사는 인간!
얼마나 불행하고 비참한가.
다음주 월요일에 계속
기대하셔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