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정보 8월호 원고
개신교와의 대화 - 교회일치운동
송용민 신부
(삼산동 성당주임/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를 통하여 가톨릭교회는 세상의 징표들을 복음적 가치를 새롭게 해석하고, 현대 세계에 적응하며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를 교회와 마주하고 있는 타종교들과의 관계에서 새롭게 해석한 바 있다.
오늘날 가톨릭교회가 오늘날 문지방에 서 있다는 점은 타종교와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다. 이보다 더 가깝게는 같은 그리스도 신앙이지만 마치 다른 종교인양 치부되는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대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서 벌어진 종교적 신념의 편향성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1517년)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물론 이보다 앞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단일한 교회가 1054년에 교회의 수위권 문제로 로마 가톨릭교회와 콘스탄티노플(오늘날의 이스탐불) 총대주교좌 사이에 권력투쟁의 형태로 분열되었지만, 동서방 교회는 서로가 사도적 전승을 지니고 있었기에 신앙교리에 관한한 큰 문제를 겪지는 않았다. 오히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기로 동서방 교회 간의 오랜 반목을 해소하고 상호 파문을 철회했다는 점에서는 동서방 교회간의 대화의 진정성을 보여준 셈이다. 그러한 표징으로 가톨릭교회는 동방의 정교회(Orthodox)를 ‘자매교회’로 지칭하면서 가시적 교회 일치를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트’로 불리는 개신교와는 신앙교리의 해석에서부터 교회의 제도적 관점에 이르기까지 상당부분 서로 다른 신념으로 발전해왔다. 여기에는 종교개혁 당시 맞물렸던 정치적 관심, 가령 교황권으로부터의 독립하길 원하던 지방 영주들이 루터를 지원한 점이나, 인문주의 운동에 따라 중세의 전통적인 신앙관으로부터 근대적 신심(via moderna)을 지향하는 문화적 변혁 등에 의한 갈등으로 촉발된 가톨릭신앙으로부터의 분리가 원인이 되었다.
교회의 단일성의 훼손을 막기 위한 가톨릭교회의 노력도 이루어졌지만, 새로운 개신교 신앙은 가톨릭의 입장에서 볼 때 일탈이자 일치의 걸림돌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단죄하는 동시에 개신교가 비판하던 가톨릭의 전통적인 입장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편향된 신학이 전개된 면도 없지 않다. 이른바 ‘대립신학’의 발전은 반대를 위한 반대처럼 여겨질 정도로 개신교의 세 가지 중요한 종교개혁의 원리인 ‘오직 믿음만으로(sola fide)’, ‘오직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 ‘오직 은총만으로(sola gratia)’에서 배제한 교회의 오랜 신심과 제도적 전승(聖典), 하느님 은총을 전달하는 교회의 제도적 성사성, 구원을 향한 하느님 의지에 대한 인간의 선업(善業)을 통한 협력 등을 가톨릭교회가 더욱 강조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 가톨릭의 특징으로 꼽는 교회의 전례법규의 엄격성과 충실성, 교황권을 중심으로 한 교계제도의 단일성, 오랜 교회 영성으로 자리잡아온 다양한 신심과 교회적 관습들이 종교개혁 이후 400여년동안 가톨릭교회를 지배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반하여 개신교는 철저하게 신앙의 유일한 규범인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구원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믿음의 절대성, 그리고 성사라는 제도적 중개를 통하여 하느님 은총을 전달받는 다양한 통로들인 신심의 가치들을 신앙에서 배제하기에 이르렀다. 개신교가 말씀을 중시하고, 신자들의 철저한 믿음의 회개를 강조하며, 자칫 우상숭배에 빠질 수 있는 다양한 성상과 성물들을 혐오하며, 가톨릭신앙이 강조하는 마리아 신심이나 성인 공경과 같은 것을 철저하게 배제해온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하여 가톨릭교회는 이러한 분열의 책임이 개신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양쪽에게 있음을 통감하고,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가 분열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분열되었음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참된 교회일치는 개신교가 다시 가톨릭교회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로 귀의하는 과정이며, 이것은 주님께서 주신 일치를 재건(Unitatis Redintegratio)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는 하나이고 유일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많은 교파들이 사람들에게 저마다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상속자라고 내세우고, 참으로 모든 이가 자신이 주님의 제자라고 공언하지만, 그리스도 자신이 갈라지시기라도 한 것처럼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분명코 이러한 분열은 그리스도의 뜻에 명백히 어긋나며, 세상에는 걸림돌이 되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여야할 지극히 거룩한 대의를 손상시키고 있다.”(일치교령 1항)
공의회 이후 가톨릭교회는 문지방에 서 있는 교회가 문 안쪽과 바깥쪽을 균형 있게 바라보며 이제까지 편향된 교회의 관점을 교정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신앙의 유일 규범으로서의 성경의 가치를 다시금 확인하고, 교회의 제도성보다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인격적인 면모를 재발견한 점, 평신도들이 그리스도의 직무에 참여하여 일반 사제직의 가치를 인정한 점, 개신교를 같은 주님을 섬기는 형제로 받아들이며 이들과의 일치를 향한 대화를 시작한 점, 그리고 가장 많은 비판을 받던 마리아 공경에 관하여 균형 잡힌 신심과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로, 신앙의 표양으로 재설정하고, 모든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들이 위계(Hierarchia veritatum)를 지니고 있다는 신학적 해석으로 개신교가 비판하는 신학의 오류를 풀려고 했다는 점 등은 공의회 이후 변화된 가톨릭교회의 또 다른 면모라고 볼 수 있겠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가톨릭교회가 추진하고 있는 교회일치운동(ecumenical movement)은 개신교가 개별 교단들 간의 협의체적 친교나 유기적인 일치를 이루는 것과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단일한 교회의 일치를 재건하기 위하여 서로가 지녀온 많은 오해와 편견을 극복하고,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를 함께 발견해나가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 파견된 소명을 함께 실천하며 기도로써 형제애를 재발견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로마 교황청은 이미 ‘그리스도인 일치촉진평의회’를 중심으로 동방의 정교회들과의 대화는 물론 개신교의 개별 교단들과 공의회 이후 끊임없는 대화를 추진해왔다. 교황이 동방의 총대주교좌를 방문하고, 교황대사를 파견하여 꾸준히 일치를 추구하는 동시에, 개신교의 개별 교단 신학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교회 분열의 씨앗이 되었던 의화론이나 교회론, 마리아공경 등에 관한 신학적 편견들을 극복하려는 노력도 이어졌다. 그 결과 지난 1999년에는 루터교 세계연맹과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던 의화론에 대한 기본적인 합의가 이루어져, 하느님 은총으로 받는 구원의 중대성을 재확인하고, 이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교회분열에 이르기까지 심각할 정도로 교리의 차이를 지닌 것은 아님을 확인했다. 이런 관점은 2006년에 감리교세계대회에서도 확인되어 같은 의미로 로마 가톨릭교회와 의화론에 관한 합의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1948년에 세계 개신교계의 일치를 위해 창설된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가 있음)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교회일치운동에 로마 가톨릭교회는 비록 정식 회원교단은 아니지만, ‘신앙과 직제위원회(Faith and Order)’의 정식회원으로서 신앙교리에 관한 전문적인 신학적 대화에 동참하고 있으며, 세계 교회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공동의 소명과 신앙적 유산을 함께 발견하고 보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비록 한국교회는 미국 선교사들을 통해 시작된 독특한 개신교 선교의 역사 때문에 서구 교회가 보여주는 일치 운동의 결실들이 충분히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는 안타까움이 있다. 대부분의 한국개신교는 미국의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복음주의 교단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어,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은 물론 가톨릭교회를 이단시하는 일부 장로교 보수교단들의 세력으로 좀처럼 대화의 창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물론 주교회의(CBCK) 교회일치위원회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지난 10여년간 본격적으로 일치운동을 추진하면서 다양한 관점에서 교회 일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개별교회와 성직자, 평신도들에게 교회 일치운동의 근본 취지조차 잘 전달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하지만 가톨릭교회가 문지방 위에 서 있음을 느낀다는 것은 개신교와의 대립과 반목을 넘어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땅에 선포되려면 같은 그리스도 신앙을 지닌 형제애를 개신교와 먼저 발견하는 과정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오늘날 교회가 지녀야할 비전 중에 중대한 하나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지난 6월 개신교 교단대표들과 함께 떠난 일치순례의 여정에서 아씨시에서 함께 찍은 사진.
일치란 이렇게 함께 만나는 일부터 시작이란 생각이 듭니다.
첫댓글 이런 일들을 함께 고뇌하고, 그리고 만나고 무언가 조금씩 문을 열고 양보하는 모습들이 아름답게 다가옵니다.
사실 전 개신교 학교를 다녔기에 큰 벽없이 그 친구들을 보기는 합니다. 감사히 읽었습니다.
신부님의 좋은 글 잘 읽고 제 카페로 모셔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