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교수님 소개 및 판관공 고문님의 삼학사 약력 및 경과보고 동영상입니다.
3.- ② 삼학사 약력 및 경과보고
1636년 병자년 12월1일 청군(淸軍) 7만과 몽골군 3만, 한군(漢軍) 2만 등 도합 12만 명이 심양을 출발하
여 12원 16일 남한산성에 도착하여 포위 압박하자, 1637년 1월 30일 인조 임금이 송파 삼전도에 신하
500명과 내려와 청 태종(淸 太宗)에게 항복하니 홍익한공은 병자년에 사신으로 왔던 용골대를 처형해
야 한다면서 척화를 주장했다는 구실로 잡아왔고, 우리 선조 임계공과 오달제공은 척화(斥和)를 주장
한 신하를 내놓으라고 하자, 두 분은 상위직 벼슬도 아니고, 척화 공론(公論)을 일찍부터 주장해 오지
않았으나, 모두 뒤로 물러서고 나서지 않자, 두 분이 자원하고 나서 척화신으로 끌려 왔습니다.
홍익한공께서는 1586년 출생, 호(號)가 화포(花浦)이며, 문과 장원급제 후 1635년 사헌부 장령(掌令:정
4품)으로 재직하다가 병자년에 평양부서윤(平壤副庶尹)으로 나갔고,
우리 선조께서는 1606년 출생, 호(號)가 임계(林溪)이며 문과 급제 후 당시 홍문관 교리(校理:정5품)로
재직했었으며,
오달제공께서는 1609년 출생, 호(號)가 추담(秋潭)으로 문과 장원급제한 후 병자년에 홍문관 부교리(副
校理:종5품)로 재직했었습니다.
심양에 끌려 온 이후 공들에게 항복하여 청나라에 협조하면 벼슬을 내리고 가족을 데려와 잘 살도록 해
주겠다고 회유했으나 듣지 않았고,
끝까지 항복을 거절하자 차마 눈으로 형상을 볼 수 없는 참혹한 형벌을 가하고, 1637년 4월 19일 심양
서문 밖 형장(현 8.1공원)에서 처형했습니다.
나라에서는 세분 모두에게 영의정을 증직하였고, 홍공에게는 충정(忠正), 우리 선조에게는 충정(忠貞),
오공에게는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청 태종은 삼학사를 처형한 후 이들의 충성심에 감복하여 삼한산두비(三韓山斗碑)를 세웠으니 “三韓”
은 조선을 말하는 것이고, “山斗”는 태산같이 우뚝하고 북두성 같이 빛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유언(遺言)에 이르기를 앞으로 조선을 절대로 침범치 말라고 했다고 전합니다.
이 비석은 오랜 세월로 없어진 것을 1935년 “三韓山斗”라는 머리 돌만 찾아 교민들이 중심이 되어 복원
했다가, 1960년대 문화혁명 당시 다시 파손되어 버려진 것을 요령 발해대학에서 수습하여 두었던 것을
요령대학 발전의 주역이신 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허창무(許昌武) 교수의 헌신적 노력으로 2005. 8 계
룡건설 이인구 회장이 재정을 부담하여 학사정(學士亭)과 함께 비석을 재건하였으며, 천안 독립기념관
내에도 같은 비석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삼학사의 충절을 기릴 수 있는 장소가 순국한 땅에 마련된데 대하여 거듭 감사드리면서 경과보
고를 마칩니다.
2008. 8. 25
林溪 윤공 후손
첫댓글 내용 수정하여 다시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