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진통일의 민족사적 정당성
김일성흉노로부터 마한의 왕검성(북한 평양)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조선상고사/남쪽으로 이주한 마한]"마한이 월지국(마한 자체가 고조선의 目支國임-samson-)으로 도읍을 옮긴 뒤에 그 옛 도읍 평양에는 최씨(崔氏)가 일어나서 그 부근 25국을 통속하여 한 대국이 되었으니 전사(前史)에 이른바 낙랑국(樂浪國)이 그것이다. (???-samson-)
낙랑이 이미 분리되매 마한이 지금의 임진강 이북을 잃었으나 오히려 임진강 이남 70여 국을 통솔하더니 오래지 아니 하여 북방에서 지나와 흉노의 난리를 피하여 마한으로 들어 오는 신·불 두 조선의 유민이 날로 많아지므로
마한이 지금의 낙동강 연안 오른편의 1백여 리 땅을 떼어 신조선의 유민들에게 주어 자치계(自治, 고대에 모임을 계라 하였음)를 세워서 이름을 `진한부(辰韓部)'라 하고,
(후한서 동이열전의 내용과 비슷함)
辰韓 耆老自言秦之亡人 避苦役 適韓國 馬韓割東界地與之
辰韓은 그(진한의)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되, 秦나라에서 亡命한 사람들로 苦役을 피하여 韓國에 오자,
馬韓(수도 직산)이 그들의 동쪽 지역을 분할하여 주었다 한다. (경북 의성지역-samson-)
낙동강 연안 오른편의 땅을 얼마간 떼서 불조선의 유민들에게 주어 또한 자치계를 세워서 `변한부(弁韓部)'라 일컬었다. 변한에는 신조선의 유민들도 섞여 살았으므로 변진부(弁辰部)라고도 일컬었다.
이것이 남삼한(南三韓)이니 마한이 구태여 진·변 두 한을 세운 것은 또한 삼신(三神)에 따라 삼의 수를 채운 것이다. (???-samson-)
대단군 왕검의 삼한이 중심 주권자가 되고 말·불 두 한은 좌우의 보상(輔相)이 되었는데 이제 남삼한은 말한 곧 마한이 가장 큰 나라 곧 종주국이 되고, 신한 곧 진한과 불한 곧 변한이 두 작은 나라(소속국)가 된 것은 그 이주민의 계통을 쫓아 이름을 지었기 때문이거니와 (???-samson-)
삼한이 다 왕을 `신한'이라 일컬어서 (이를테면 마한의 왕은 말한 나라의 신한이라 하고, 진한의 왕은 신한나라의 신한이라 하고, 변한의 왕은 불한나라의 신한이라 하였음) 신한이 셋이 되니 대개 앞의 것 (신한 셋)은 삼조선 분립 이후에 세 신한의 이름을 그대로 쓴 것이며, (???-samson-)
진·변 두 한의 두 신한은 자립하지 못하고 대대로 마한의 신한이 겸해 가져서 이름만 있고 실제가 없었으니 이는 남삼한의 창례(創例)이다.
삼조선 분립 뒤의 말朝鮮
말조선의 처음 도읍이 평양임은 이미 앞에서 말하거였거니와 그 뒤(연대는 불명)에 국호를 말한(馬韓마한)이라 고치고, 남쪽의 월지국으로 도읍을 옮겨 불조선(번조선)왕 기준에게 망했다.
그 천도한 원인이 무엇인지 전사(前史)에 보인 것이 없으나 대개 신·불 두 조선이 흉노와 지나의 잇따른 침략을 받아서 북방의 풍운(風雲)이 급하매 말조선왕이 난을 싫어 하여 마침내 남쪽 멀리 떨어진 지방으로 천도하는 동시에 모든 침략주의를 가진 역대 제왕들의 칼 끝에서 빛나던 `조선'이라는 명사는 외국인이 시기하고 미워하는 바라 하여 드디어 말조선이란 칭호를 버리고, 지난 날에 왕호(王號)로 쓰던 `말한'을 국호로 써서 이두 로 마한(馬韓)이라 쓰고, 새로 쓰는 왕호인 `신한'은 이두로 진왕(辰王)이라 써서 `마한국(馬韓國) 진왕(辰王)'이라고 일컬었다.
똑같은 `한'이란 명사를 하나는 음을 따서 한(韓)이라 하여 국호로 쓰고, 또 하나는 뜻을 따서 왕이라 하여 왕호로 씀은 문자상 국호와 왕호의 혼동을 피한 것이다.
국호를 마한이라 쓰는 동시에 왕조는 한씨(韓氏)가 세습하여 국민들이 한씨왕의 존재만 아는 고로 기준이 그 왕위를 빼앗고는 국민의 불평을 누그러뜨리기 위하여 본래의 성 기씨(箕氏)를 버리고 한씨(韓氏)로 고친 것이다.
삼국지에 “준(準) 달아나 바다로 들어 가서 한(韓)의 땅에서 살며 한왕(韓王)이라 이름하였다( 準 走入海 居韓地 號韓王)”고 하였고, 위략에는 “준의 아들과 친척으로 나라에 머물러 있는 자는 성을 한씨라 하였다(準子及親 留在國者 冒姓韓氏)”고 하였다./단재 신채호
원본 출처/내가그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