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庸은 何爲而作也오 子思子 憂道學之失其傳而作也시니라 蓋自上古聖神이 繼天立極으로 而道統之傳이 有自來矣라 其見於經엔 則允執厥中者는 堯之所以授舜也오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者는 舜之所以授禹也라 堯之一言이 至矣盡矣로대 而舜 復益之以三言者는 則所以明夫堯之一言이 必如是而後에 可庶幾也라.
<中庸>은 무엇 때문에 지었는가. 子思 선생이 ‘道學이 전해지지 않을까’ 걱정하여 지었다. 대체로 상고시대의 聖神이 하늘의 뜻을 이어 標準을 세움으로써 道通의 전승이 비로소 내려오게 되었다. 그것이 經書에 나타난 것으로 ‘允執厥中(윤집궐중)’은 堯임금이 舜임금에게 전수한 것이요,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은 舜임금이 禹임금에게 전수한 것이다. 요임금의 ‘允執厥中’ 한 마디 말이 지극하고 (할 말을) 다하였지만, 순임금이 다시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세 마디 말을 더 보탠 것은 저 요임금의 한 마디 말이 반드시 이와 같이 한 뒤에야 거의 행할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다.
蓋嘗論之컨대 心之虛靈知覺이 一而已矣 而以爲有人心道心之異者는 則以其或生於形氣之私하며 或原於性命之正하야 而所以爲知覺者 不同하나니 是以로 或危殆而不安하며 或微妙而難見耳라 然人莫不有是形이라 故로 雖上智라도 不能無人心이오 亦莫不有是性이라 故로 雖下愚라도 不能無道心하니 二者 雜於方寸之間에 而不知所以治之면 則危者愈危하고 微者 愈微하야 而天理之公이 卒無以勝夫人欲之私矣리라 精則察夫二者之間而不雜也오 一則守其本心之正而不離也니 從事於斯하야 無少間斷하야 必使道心으로 常爲一身之主하고 而人心이 每聽命焉이면 則危者 安하고 微者 著하여 而動靜云爲 自無過不及之差矣리라.
그것을 한번 논해 보자. 마음의 虛靈知覺은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人心·道心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 것은, 어떤 것은 形氣의 私心에서 나오고 어떤 것은 性命의 正心에 근원하여 (인심과 도심은) 知覺하게 되는 까닭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어떤 마음[人心]은 편안하지 않고 어떤 마음[道心]은 미묘하여 보기 어렵다.
그러나 사람은 이 形氣를 가지지 않은 이가 없으므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人心이 없을 수 없고, 또한 이 性을 가지지 않은 이가 없으므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道心이 없을 수 없다. 두 가지가 마음에 뒤섞여 있는데도 그것을 다스릴 줄 모른다면, 위태로운 것은 더욱 위태로워지고 은미한 것은 더욱 은미해져서 天理의 公心이 마침내 저 人慾의 私心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精’은 저 (천리와 인욕) 두 가지 사이를 살펴 뒤섞이지 않게 하는 것이요, ‘一’은 그 본심의 바름을 지켜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惟精惟一) 여기에 마음과 힘을 다하여 잠깐이라도 중단함이 없어, 반드시 道心은 항상 한 몸의 주인이 되게 하고 人心은 언제나 (도심의) 명령을 따르게 한다면 위태로운 것은 편안해지고 은미한 것은 드러나게 되어 동정과 언행이 저절로 지나치거나 못 미치는 잘못이 없게 될 것이다.
夫堯舜禹는 天下之大聖也오 以天下相傳은 天下之大事也니 以天下之大聖으로 行天下之大事하샤대 而其授受之際에 丁寧告戒 不過如此하시니 則天下之理 豈有以加於此哉리오 自是以來로 聖聖相承하시니 若成湯文武之爲君과 皐陶伊傅周召之爲臣은 旣皆以此而接夫道統之傳하시고 若吾夫子則雖不得其位하시나 而所以繼往聖開來學은 其功이 反有賢於堯舜者시니라 然當是時하야 見而知之者 惟顔氏曾氏之傳이 得其宗하시고 及曾氏之再傳而復得夫子之孫子思하얀 則去聖遠而異端起矣라.
저 堯·舜·禹 임금은 천하의 위대한 聖人이시다. 천하를 서로 물려줌은 천하의 중대한 일이다. 천하의 위대한 성인으로서 천하의 중대한 일을 행하는데, 그 (천자의 지위를) 주고받을 때에 간곡하게 타일러 훈계함이 이와 같음에 불과하였으니, 천하의 이치가 어찌 여기에 더할 것이 있겠는가.
이때부터 성인과 성인이 서로 (이 16자의 가르침을) 계승하였다. 成湯·文王·武王 같은 임금과 皐陶·伊尹·傅說·周公 旦·召公 奭 같은 신하가 모두 이것으로 저 道通의 傳承을 이어받았고, 우리 부자[孔子]같은 경우는 비록 그 지위를 얻지 못하였으나 지나간 聖人을 계승하고 앞으로 올 학자에게 길을 열어주었으니 그 功勞가 도리어 堯·舜 임금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
子思 懼夫愈久而愈失其眞也하샤 於是에 推本堯舜以來相傳之意하시고 質以平日所聞父師之言하야 更互演繹하야 作爲此書하야 以詔後之學者하시니 蓋其憂之也 深이라 故로 其言之也 切하고 其慮之也 遠이라 故로 其說之也 詳하시니라 其曰 天命率性은 則道心之謂也오 其曰 擇善固執은 則精一之謂也오 其曰 君子時中은 則執中之謂也니 世之相後 千有餘年이로대 而其言之不異 如合符節하니 歷選前聖之書컨대 所以提挈綱維하고 開示蘊奧 未有若是之明且盡者也니라 自是而又再傳以得孟氏하야 爲能推明是書하야 以承先聖之統이러니 及其沒而遂失其傳焉하니 則吾道之所寄 不越乎言語文字之間하고 而異端之說이 日新月盛하야 以至於老佛之徒 出하야 則彌近理而大亂眞矣라.
子思가 저것[異端이 일어난 상황]이 오래될수록 (성인이 서로 전승한 16자의 가르침이) 참모습을 서로 잃어버릴까 염려하였다. 이에 堯·舜 임금 이래로 서로 전해 내려온 뜻의 근본을 따져 연구하고서[推本] 평소 아버지[孔鯉]와 스승[曾參]에게 들은 말에 바탕 하여, 번갈아가며 서로 풀어 설명하여 이 책을 지어 후세 배우는 자들에게 소개하였다.
대체로 그가 걱정한 것이 깊었기 때문에 말한 것이 절실하고 염려한 것이 深遠하였기 때문에 설명한 것이 자세하다. ‘天命’·‘率性’은 道心을 이르고 ‘擇善固執’은 精一을 이르고, ‘君子時中’은 ‘執中’을 이른다. (堯舜과 子思가 산) 시대가 서로 떨어진 것이 千여 년이지만, 符節을 맞춘 것과 같이 그 말이 서로 다르지 않았다. 예전 성인의 책을 하나하나 선별하여 보건대, 대체를 들어보이고 깊은 뜻을 열어보인 것이 이[中庸]처럼 분명하고도 다한 것이 없었다.
이로부터 거듭 전해져서 孟氏[孟子]를 만나, 이 中庸을 잘 미루어 밝혀 지나간 聖人의 道通을 계승하였는데, 그가 죽자 마침내 그것[道通]을 전해줄 사람을 잃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道가 의지한 것은 言語·文字의 사이를 넘어서지 못하고, 異端의 학설은 날로 새로워지고 달로 성대해져 老·佛의 무리가 나옴에 이르러서는 더욱 도리에 가까워 (우리 도의) 참모습을 매우 어지럽혔다.
然而尙幸此書之不泯이라 故로 程夫子兄弟者 出하샤 得有所考하야 以續夫千載不傳之緖하시고 得有所據하야 以斥夫二家似是之非하시니 蓋子思之功이 於是爲大而微程夫子면 則亦莫能因其語而得其心也니라 惜乎라 其所以爲說者 不傳하고 而凡石氏之所輯錄은 僅出於其門人之所記하니 是以로 大義雖明하나 而微言未析하고 至其門人所自爲說하얀 則雖頗詳盡而多所發明하나 然倍其師說而淫於老佛者 亦有之矣라.
그러나 오히려 다행이도 이 中庸이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程氏 夫子 형제가 태어나 고찰할 것[中庸]이 있어서 천 년 동안 전하지 않은 도통[緖]을 이을 수 있었고, 의거할 것[중용]이 있어서 저 (老·佛) 두 학파의 옳은 듯하면서도 그른 것을 배척할 수 있었다. 대체로 子思의 功勞는 이 (중용을 지었다는) 점에서 훌륭하다고 할 수 있지만, 程氏 夫子가 없었다면 또한 아무도 그 (중용의) 말에 의지하여 그 (성현의) 심법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애석하고 그들[二程]이 (중용을) 해설한 것은 전하지 않고, 대체로 석씨[石모]가 모아 기록한 것도 겨우 그들의 문인이 기록한 것에서 抽出한 것이다. 이 때문에 大義는 밝혀졌으나 은미한 말은 아직 해석되지 않았다. 그들의 문인이 스스로 해설할 것에 이르러서는 제법 자세함을 다하여 드러내 밝힌 것이 많기는 하나, 자시 스승의 학설을 저버리고 老·佛의 학설에 젖어든 것도 있다.
熹自蚤歲로 卽嘗受讀而竊疑之하야 沈潛反復이 蓋亦有年이러니 一旦에 恍然似有得其要領者라 然後에 乃敢會衆說而折其衷하야 旣爲定著章句一篇하야 以俟後之君子하고 而一二同志로 復取石氏書하야 刪其繁亂하야 名以輯略하고 且記所嘗論辨取舍之意하야 別爲或問하야 以附其後하니 然後에 此書之旨支分節解하고 脈絡貫通하며 詳略相因하고 巨細畢擧하야 而凡諸說之同異得失이 亦得以曲暢旁通하야 而各極其趣하니 雖於道統之傳에 不敢妄議나 然初學之士 或有取焉이면 則亦庶乎行遠升高之一助云爾이라. 淳熙己酉春三月戊申에 新安朱熹는 序하노라.
나[熹]는 이른 나이부터 (중용을) 배우면서 내심[竊] 그것을 의심하여 마음을 가라앉혀 깊이 생각하기를 반복한 것이 대체로 또한 몇 년이었는데, 어느 날 아침에 번쩍 깨달아 그 要領을 얻음이 있는 듯하였다. 그런 뒤에야 감히 여러 학설을 모아 가장 적절한 것을 취하여, <中庸章句> 한 편을 면밀하게 검토하고 결정하고 지은 뒤에, 후세 군자의 (비판을) 기다렸다. 그리고 뜻을 함께 하는 한두 사람과 다시 石氏의 책을 가져다가 거기서 번거롭고 어수선한 것을 지워버리고서 ‘中庸輯略’이라고 이름 붙이고, 또 (여러 학자의 학설에 대해) 논변하고 취사한 뜻을 기록하여 별도로 <中庸或問>을 붙여 그 뒤에 붙였다.
이렇게 (<중용장구>·<중용집략>·<중용혹문>이 갖취진) 뒤에야 이 <中庸>의 뜻이 팔다리가 되고 뼈마디가 풀려 혈맥과 경락이 이어지듯 (글의 구조가 드러나고 조리가 정연해져) 자세하고 간략한 것이 서로 의지하며 크고 자세한 내용이 다 규명되어, 대체로 모든 학설의 차이[同異]와 잘잘못[得失]도 환히 드러나고 폭넓게 통하여 저마다 그 취지가 드러나게 되었다. 비록 道通의 전수에 대해서는 감히 함부로 의론할 수 없으나, 초학자가 만일 여기에서 취함이 있다면 또하 먼 곳에 가고 높은 곳에 오르는 데에 한 가지 도움이 될 것이다. 淳熙 己酉年(1189) 三月 戊申日에 新安 朱熹는 서문을 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