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문인정신이 아쉽다
엄 원 지
유수(流水)와 같은 세월이라더니 벌써 벚꽃이 한창이고, 필자의 나이도 예순셋의 봄을 맞이하고 있다.
요즘은 백세 인생을 부르짖는 세대여서 그까짖 나이 예순셋 정도야 아직 청년이라고 농담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지만 예순을 넘어서면서 서서히 기력이 허(虛)해짐을 막을 길이 없고, 건망증이 심해지는 것은 뇌의 활동이 오랜 세월을 살다보니 노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육체의 에너지가 날이 갈수록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건강에 대한 경각심과 깨우침이 더욱 절실해 지는 것도 육체를 방치하듯 세월을 살아 온 지난날이 후회스럽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고 인생의 황혼기에 서서히 접어드니 이제야 깨닫는 것이 정신의 중요함을 스스로 체득하고 있다.
백세는 안되더라도 팔십 중반은 채우고 가고싶은 나의 욕심은 남은 세월을 가급적이면 정신 영역에 혼을 다하면서 여생을 보내고자 삶의 과정과 목표를 세우며 이 봄을 다시 맞는다.
그래서 글을 쓴답시고 지난 30여년을 시인으로 자부하며 살아온 세월을 한번씩 회고해 보면 제대로 문인답게 살아온 것인가 하는 자책감과 때로는 자괴감마저 들 때가 많다.
문인이란 그냥 글 몇 줄이나 쓰고, 아름답고 맑은 사색이나 하고, 문인이랍시고 문학지에 투고를 해서 글이 나오면 사람들에게 자랑하듯이 보여나 주고 하는 사람이 아니다.
문인이란 일상사의 많은 세상 이야기를 때로는 함축적으로 때로는 비유적으로 표현할 줄 알아야 하고, 거짓과 부정을 보면 진실하게 외칠 줄 아는 용기도 있어야 한다.
문인이 된다는 것은 글 몇 편 써서 문학지 등에 내어 당선되었다고 해서 문인이 되는 것은 아닌데, 옛날 왕권시절의 과거시험제 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글 잘 짓고, 잘 쓰면 문인이 되는 풍조가 현대에 까지 이르러 귀착된 것으로 사실은 잘못된 것이다.
문인은 인격적으로 고매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의 인격과 인품이 구비된 사람이 시를 짓고 쓸 때 비로소 문인이 되는 것이며, 그의 글은 잘 쓰든 못 쓰든 간에 그 문인의 시는 우리가 읽고 음미해야할 가치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요즘은 글 몇 편 응모해서 문인이 되고, 이러한 사람들이 매일 수백명 씩 탄생하는 시대이다.
지난 30여년간 문단에서 편집자로 일해 온 필자가 반성하는 것은 그러한 사이비 문인들을 수 없이 탄생시킨 사람이 바로 필자도 한 사람이기에 마음 한 구석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자책감을 지울 길 없는 것이다.
사실은 오랜 세월 갈고 닦은 재능의 연마를 관찰하기 보다는 그저 글 몇 편의 재능으로 문인의 등단 기준을 삼은 잘못들이 나이들어 세상을 바라보며 천리를 느끼니 나의 불찰도 그 죄가 큰 것임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왜 조금 더 검증을 하지 못했는지, 왜 조금 더 깊이 보질 못했는지 아쉬움이 큰 것이다.
또 나의 시인으로서의 발자취도 그리 바르지가 못하다.
지난 1996년 이후로 2019년 현재까지 시 30여편 외에는 시작(詩作)을 하지 못했다.
이것도 시인으로서 큰 결격 사유라고 할 수 있다.
언론에 종사하다 보니 맨날 시사적인 일에 관심을 쏟고, 시사성 글에 전념하다보니 저절로 시심(詩心)이 사라진 것이다.
시인이란 꾸준한 사색과 명상을 통해 시상(詩想)을 떠올리고 습작을 통해 창작의 깃을 올리는 것이 정상이다.
처음에 등단할 적에 결심한 것이 1년에 한권의 시집을 발간하자하며 스스로에게 약속했던 초발심을 어디로 가고, 필자는 시인이라는 갓을 쓰고 다니며 선비모습을 하고서 폼만 잡고 살아 온 것이다.
두 권의 시집을 발간하고 그 뒤로는 늘 마음만 먹었지, 시집을 ,제대로 된 시 한 편을 쓰지 않은 사이비 시인으로 30여년을 살아온 것이 오늘에 와서 되돌아 보면 자책이 큰 것이다.
시인은 시상(詩想) 속에서 끊임없이 짓고 쓰며, 세상을 향해 시를 통해 사람들을 계도하고 인도해야 할 의무와 사명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신을 연마해야 하며, 세상을 염려하고 생각하는 간절함으로 필을 들고 밤이면 고뇌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한 편의 부드러운 서정시도 그 속에는 자연과 사람의 이야기가 있고, 자연을 통해 사람의 진실과 거짓을 판별하는 지혜가 들어 있어야 한다.
시인이 단순하게 자신만을 위한 시 작업에 몰두한다면 그것은 시인의 올바른 시 작업법이 아니다.
옛날 중국 땅 송나라의 문인 구양서(AD1007~1072)는 ‘도승문지’라는 문학이론에서 ‘문장 짓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현의 도(道)를 선양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은 문인이 인격과 인성이 풍부해 지면 저절로 좋은 문장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며, 정신의 내면에 충실하면 자연히 밖으로 광채 나는 문장이 완성된다는 뜻이다.
특히 문장가에게 권고하는 이 이론의 총지는 내면의 인성 연마에 노력하게 되면 외면적인 글의 내용도 훌륭하게 된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문인정신의 기본이라고 했다.
오늘날 우리의 문인정신을 어떠한가?
어줍잖은 글을 갖고서 자신의 글이 최고라는 아집을 걷어내지 못하며, 남의 글은 아예 읽어보지도 않고 과소평가하는 풍조나, 글은 아름다운 내용이나 실은 현실적으로는 그 아름다운 내용과는 정반대인 거짓과 위선의 삶을 살아가는 문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문인정신이 아쉽다.
글을 보면 아름다우나 사람을 보면 사람같지 않은 추태스러운 문인이 많다.
글을 보면 애국자이나 사람을 보면 매국노같은 문인이 많다.
글을 보면 인격이 고매하나 사람을 보면 짐승과도 같은 문인이 많다
옛날에 지각있는 문인은 바르지 못한 세태에 합류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신념과 기개를 굽히지 아니하였으며, 심지어는 총칼의 권력 앞에서도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
비록 가난은 하였으나 금전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물질보다는 정신의 도에 치중하여 세월의 흐름보다는 자신의 내면의 흐름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한 인고의 세월의 흐름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세상에 나아가 자신의 문장으로 세민(世民)을 인도하고 깨우쳐주고 다스렸으니, 이러한 문인정신을 우리 후세는 본받아야 한다.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을 이야기하며 현실을 외면하자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변함이 없다.
글을 짓고 쓴다는 것은 세상을 짓고 쓰는 것이다.
이러한 중대한 의무와 사명감을 지닌 문인이 많이 탄생할 때 세상은 조금이라도 올바른 방향으로 생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금력과 권력에 아부하고, 자신의 내면은 거짓과 위선으로 꿈틀거리는 사람이 문인으로 활동하면서 글을 짓고 쓰게 된다면 세상은 그러한 방향으로 밖에 변해갈 수 밖에 없다.
자연을 보호하자면서 자연을 파괴하는 행위가 도처에서 이루어지는데, 문인이 문장은 아름다우나 현실은 아름답지 못하게 살아가는 현실이 많은 것이 이와같은 것이다.
문인정신은 문장과 같아야 한다.
봄이 온 거리에 가득하다.
긴 겨울추위를 인고하고 차다찬 땅의 기운을 딛고 일어선 저 한낱 노란 개나리꽃에서도 우리는 삶의 희망과 자연의 숭고함을 느낄 수가 있다.
자연의 순리에 적응하며 봄의 계절에 자신이 담당해야할 몫을 다하고 또 언젠가는 여름 속으로 가을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우리 문인은 필자나 여러분이나 이 봄에 새롭게 태어날 각오를 하자.
정신의 내면을 깊이 되돌아보고 스스로 각성하면서 우선은 자신을 갈고 닦는 문인이 되어보자.
먹고 사는 일도 중요하지만 적어도 문인이라는 문패를 가슴에 달았다면, 내면의 도에 전력할 때, 이상하리만치 먹고 사는 일도 더 잘되고, 문장은 여러분의 가슴에 훌륭한 빛을 안겨다 줄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국신춘문예 2019년 봄호』를 발행하면서
발행인 엄 원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