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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경자보(庚子譜)
解釋 : 2004. 12. . 金順大
(1) 舊譜序文
1)1754년 甲戌譜序文-省略
2)1802년 壬戌譜序文-省略
3)1911년 辛亥年 序文(서문)
大凡人之家序昭穆而明本支惇孝悌而修親睦氏族炳靈則猶難一一記憶 此其所以譜牒之承繼而作也
대부분 사람들의 집에는 소목의 차례가 있어, 종손과 지손을 명확히 하고, 효도와 우애심에 힘써서 친목과 씨족의 훌륭한 영령을 꾸며서 다듬는다. 오히려 일일이 기억하기 어려운 이런 것을 그 보첩으로 계승하기 위하여 <보첩이> 만들어진다.
從古以來雲仍後昆蕃衍極昌者莫如帝王之冑裔 此曷故焉當其時湥仁厚澤被於生靈功在萬世與 凡人列姓大相不同若庸虞夏商之蘇陳杞宋是己
따라서 옛날 이후로 자손과 거듭되는 후손들이, 늘어나고 넘쳐서 아주 번창하게 된 것이, 제왕의 후손들과는 같지 않다[1]. 이것은 어째서 그런가? 당시 그때의 (흐르는) 인정이 도탑고 윤택하여 여러 사람(生靈)에 미치어, 그 공이 오래도록 존재하였고, 대부분의 사람들의 여러 성들은 아주 많이 다르다. 예로서 생각해 보면 하나라와 상나라의 예와 소, 진, 기, 송나라가 이것이다.
[1]제왕들의 후손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의미
噫吾金之昔在駕洛十世爲王都於金海 而子姓仍爲實籍焉其璿枝奕葉寔繁且茂於幾千年所歷羅及麗至于 我朝其麗不億而遂爲東方簪纓之世族譬如木之一根而 其枝也 盛水之一源而其流也
아 우리 김씨는 옛날 가락에 있었고, 10세까지 왕이 되어 김해를 도읍으로 하였다. 자손들이 거듭하여 실제로 책에 기록되어 있고, 아름다운 가지와 잎(후손) 들이 참으로 번식하고 또 무성하여 수천년 동안 신라를 거치고 고려를 지나 우리 조선에 이르기 까지 그 수를 기억할 수 없다. 동방의 높은 벼슬집안이 되기에 이르러니, 뿌리가 하나인 나무의 가지와, 발원지가 하나인 강물의 지류로 비유할 수 있다.
長豈非祖先之種餘德庥終爲福履之穰穰未艾者耶然之子之孫之曾之玄至于五世則親盡焉
오랜 동안 어찌 조상이 심어놓은 것이 아니겠는가. 남은 덕과 그늘(은혜)이 마침내 복이 되어, 그 복이 풍족하여 아직 끊어지지 아니하였으나, 그들의 아들, 손자, 증손, 현손의 5세에 이르러 친목이 다하여,
上殺下殺傍殺而至于四從則服窮焉兄及弟矣至 于遐遠之族則情疏焉
윗사람도 죽고, 아랫사람도 죽고, 근친들도 죽어 4촌에 이르러 가까운 친척들이 거의 없어지고, 형과 동생 및 먼 친척에 이러기 까지 정이 소원해졌다.
其若猝然邂逅於萍水之會聞其所同則隔千里而如一聞其所獨則對而合席不知其爲誰某決非自先觀之均是子孫之誼也
그들이 만일 갑자기 자연스럽게, 부평초가 물에서 모이듯이, 만난다면, 그들이 같은 <종친인가를> 물어 볼 것이다. 천리에 떨어져 있으면 하나같이 홀로 있는 곳을 물을 것이다. 합석하여 대하면 그가 누가 되는지 알지 못하니, 무언가를 스스로 결정할 게 아니라, 먼저 본 것을 조화롭게 하는 것이, 이 자손들의 의무이다.
余庸是懼與干宗之同人爛漫商確收單 于京鄕各派以付剞劂將肇其役凡我諸宗咸曰諾哉不謀而同此吾宗之盛事也
이를 두려워하여 여러 종친들과 같이 충분한 의견을 주고받아(爛漫), 확실한가를 헤아려 서울과 지방의 각파로부터 수단을 모으고, 판각공을 붙여 장차 그 일이 시작이, 모든 우리의 제종들이 모두 말하기를 “좋습니다” 라고 하였다.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이 같은 일은 우리 종족의 성대한 일이다.
遂遵己未舊例添錄生卒若干以爲全帙使一開卷而瞭然如指諸掌上可以放一根之始下可以計千派之分繼
기미구보의 예를 준수하여 따르고, 생졸의 내용을 약간 덧붙여 전질이 완성되니, 한권의 책을 펼쳐보면 확실하고 명쾌하기가 손바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과 같아, 가히 한 뿌리로 시작된 것 밑에 놓을 수가 있고, 가히 천개의 파가 나누어지고 계승된 것을 헤아릴 수 있다.
自今家傳孝悌之風人叙敦睦之誼 庶不負吾祖與天地合其德無厚薄於大小之心矣 書此語不於譜而弁之誰弁
지금부터 각 가정에서는 효도와 우애의 풍속을 전하고, 사람들이 돈목의 정을 차례로 행하여, 모두 우리의 조상이 하늘에서 내려와 땅과 합쳐졌으나, 크고 작은 마음에 그 덕이 없거나 많거나 적다고 부담을 갖지 말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보첩에서 부적절하나 서문으로 쓴다.
歲辛及仲冬上浣後孫瀅培謹序
신해년(1911) 11월 상순 후손형배(1852~1917) 삼가 씀
(2)跋文(발문)
盖譜者尊祖崇宗聯系編族以明同姓同本之親也 講之以百世之下而孝友愛敬之心油然而生孰謂靈芝無根醴泉無源哉
대개 보첩이라는 것은 동성동본의 친목을 밝힘으로서, 조상을 존경하고, 종친을 숭상하며, 계통을 연결하여 종족을 편성하는 것이다.
金海金之得姓殆近二千載子姓昌大蔓延國中而偉傑問出忠孝文章德業靑史有光而世稱三韓甲族者寔由我始祖皇太王神聖德蔭如天無窮而日月周行雨露滋而時物亨者也
김해김씨는 성을 얻은 처음부터 거의 2000년이 지나 자손이 창성하고, 크게 뻗어나가 나라 가운데 퍼졌다. 위대하고 걸출한 사람들이 나오고 충효, 문장, 덕업이 우리 역사에 빛을 발하고 있어, 세상 사람들은 흔히 삼한갑족이라 말한다. 참으로 우리 시조 황태왕으로부터 유래된 신성한 덕과 음덕이 하늘과 같아, 메마르지 아니한다. 해와 달이 돌아가고, 비에 이슬이 더하여 항상 모든 것이 형통하다.
噫族多則譜煩則弊生勢固然也 况今風潮滔天魚食其魚弱爲强者之食乎
아! 종족은 많으나 보첩은 번잡하고 낡아 살아있는 세력이 그저 그렇다. 더구나 지금 하늘에 가득 찬 풍조는, 고기는 그 고기보다 약한 것을 먹고 강한 자는, 그 고기를 먹는 것이다(약육강식의 시대이다).
金海之金九十有八派而弱爲强制幹爲枝沛出入無常譜譜不同淆亂莫測寧不痛骨寒心哉
김해김씨는 90하고도 8개의 파가 있고, <세력이> 약한 것은 강한 것의 통제를 받아, 기둥이 가지가 되어 버리고, 성대한 것은 나가고 들어오는 것은 없어, 보통의 보첩과 <이러한> 보첩은 같지 않고, 어지럽혀져 있어 헤아릴 수 없으니, 어찌 뼈 속까지 아프고 한심하지 않겠는가.
參判公嗣孫麟泰痛恨比弊去歲戊戌春廣告也發文也
참판공(영견)의 사손[1]인 인태씨(麟泰,1912~)[2]가 통한을 느껴 이러한 폐단을 없애고자, 무술년(1958)봄에 광고를 내고 통지문을 보내었다.
[1]嗣孫; 양자로서 대를 이은 후손
[2] 인태(麟泰); 參判公派 國鉉-濟民-春植-顯叙-瀅培-鍾弼(三子)-麟泰(1912~)-榮成
[3] 영봉(榮鳳); 瀅培-鍾憲(次子)-一泰(次子)-榮鳳(1945~)
累涉於新聞若族黨翌年春三月誤譜委員會始組成而越三年更子春主刱譜役遠近宗族不謀而同辭襄陽龍培洪川敬培金化容九保寧石奎井邑顯允原州鍾漢幹其事沃川炳均河東善益贊其役不肖亦以諸賢之援周章董督是歲秋告厥成功竊惟吾人天賦之彛性同源之氣脉尙溶溶於森羅微妙之中而沛然湊合於生成之地 其在義理當然處雖秦楚之强莫能拒也 於戱偉哉
여러 신문에 광고를 내고, 족당(族黨)에서 다음해(1959) 봄 3월, 오보위원회(誤譜委員會)의 조직을 구성하고 일을 시작하여, 3년이 지난 경자년(1960) 봄에, 새로 보첩을 만드는 일을 주관하여, 멀고 가까이 사는 종족이 누구인가를 불문하고(누구이든지) 같은 말을 하였다. 양양의 용배, 홍천의 경배, 금화의 용구, 보령의 석규, 정읍의 현윤, 원주의 종한이 그 일을 주관하고, 옥천의 병균, 하동의 선익이 그 일을 도왔다. 불초 또한 여러 사람들의 지원을 받아, <보첩의 각> 장을 살펴보고, 감독하였다. 이해(1960) 가을에 판각이 성공되었음을 알렸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하늘로부터 받은 영원한 품성과, 같은 조상의 후손이라는 기맥(氣脈)이 오히려 세상의 모든 창조물에 녹아 흘러, 미묘한 일들 가운데 성대히 모여들어 우리가 생성된 이 땅에서 합쳐졌다. 그 의리는 당연한 처사이고 비록 진나라가 초나라의 강성을 능히 거부하지 못한다 하여도 그 훌륭함을 탄식한다.
麟泰之斯擧也 上以安先祖之靈下以解僉族之惑永介福履 于今古無感之地其行誼勇敢允符名字使來後世藏而爲鑑則庶幾無忝焉略記顚末如右
인태(麟泰)가 이 일을 들고 일어나, 위로는 선조의 영혼을 편안하게 하고, 아래로는 여러 종족의 의혹을 해결하여, 영원한 복이 있도록 하였다. 지금에 와서, 이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것이지만 그 행동과 정의가 용감하고 진실로 인증을 받아서, 이후 세대에 보관시켜 귀감으로 삼을 것이다. 모든 이 일을 더 첨가하지 않고 간략히 위(오른쪽)와 같이 전말을 기술하였다.
檀紀四二九三年駕洛一九一九年庚子(1960)秋七月日後孫謹泰謹識
1960년 7월 일 후손 근태(1889~) 삼가 씀
(2) 凡例(범례)
一 例皆因舊譜故不復疊床而特擧其宜於今者條例于左
예는 전부 구보에 근거하였으므로 다시 중복하지 않았고, 특히 그 정의를 열거하여 지금 조례로서 아래(왼쪽)와 같이 쓴다.
一 惟我金海之金爲東方巨族而發源旣遠文獻無徵故各立中祖分爲九十八派者舊譜例也 今世代愈遠則又增一百六十七派勢不能盡取然幷書各派中祖於總編以備後來考之資焉
생각해 보면 우리 김해김씨는 동방의 거족이 되었으나, 발원이 이미 멀어지고 문헌들을 모아 놓은 것이 없어, 각각 중조를 세워 98파가 된 것은 구보와 같다. 지금 세대에서도 점점 더 멀어져 또 증가하여 167파가 되니 파의 세력을 다 <기록>한다는 것은 어렵다. 따라서 총편에 각파의 중조를 나란히 쓰서, 후세가 참고해볼 자료로서 준비하였다.
一 譜冊以甲一乙一之類定編次而派別成編同派中單有晩到者故下系或有載於第二編者覽者恕焉
보책은 갑1 을1과 같이 편의 순서가 정리되어 있고, 파별로 책이 되어 있어, 같은 파 중에서 수단이 늦게 온 것이 있으면 아래에 붙여 쓰던지, 또는 제2편에 썼으니 책을 보는 사람들은 이해해 주기 바란다.
一 金寧君五世孫參判公諱孝源下無后懸註之譜事甚荒唐按 純祖甲子聯系大譜子孫有萬其數自在昭錄九十八派會同修譜板刻藏板於山淸陵譜所者乎反是而古非今是則眞先人愚而後孫賢也故玆以表明焉
금녕군의 5세(손) 참판공 휘효원이하가 무후(無后)라고 주석이 붙어있는 보첩은 심히 황당하다. 순조시대의 갑자연계대보를 보면, 자손은 그 수가 아주 많이 있고, 산청의 능보소에서 98파가 회동하여 수보할 때, 판각하여 보관된 판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一 金寧君七世孫參判公宗孫諱鍾薰有一子早夭嗣後無人故與諸弟及女壻趙章植姪壻林龍圭合議取三弟鍾弼長子麟泰系后焉其授受之際名分已定事軆甚重不啻而僉宗之公議趙林兩氏之新聞有明徵故今依麟泰本單書之
금녕군 7세(손)인 참판공(영견)의 종손인 휘종훈(鍾薰,1877~1919)의 외동아들이 일찍 죽어, 대를 이을 사람이 없어, 여러 동생들과 사위인 조장식과 조카사위인 임룡규가 합의하여, 셋째동생인 종필(鍾弼,1890~1950)의 장자인 인태(麟泰,1912~)를 계후(양자)로 하였다. 양자를 주고받을 때, 명분이 이미 정해진 일이라 그것이 아주 중요할 뿐만 아니라, 여러 종친의 공통된 의견이고 조장식, 임룡규 양씨가 신문에도 내어, 명확한 증거가 있어, 지금 인태를 본단(참판공의 종손)에 쓴다.
一 金海之金別有金時興派 新羅敬順王后也 麗朝封金寧君移籍於金海者世也 稱後金 又有慕華堂派 宣祖壬辰亂日本人沙野將軍感朝鮮禮義服 于襄毅公諱景瑞轅門 宣祖嘉之賜姓者也 幷勿許同譜以別他姓焉
김해김씨에 별도로 김시흥파가 있으니 이는 신라 경순왕의 후예다. 고려조정에서 금녕군으로 봉작받아 본적을 김해로 옮긴 자이다. 후김이라 칭한다. 또 모화당파가 있으니 선조시기의 임진왜란때 일본인 사야장군이 조선의 예법과 도리에 감동하여, 항복하여 양의공 휘경서의 수레앞으로 나아가니, 선조가 기뻐하고 성을 내린 자이다. 이들을 별도의 성으로 구별하여 동보를 하락치 아니하였다.
一 有異姓同源者 許氏有七籍金海陽川河陽泰仁孔岩漢山也 李氏有一籍仁川也 始祖許謙一云許奇
성은 다르나 본관이 같은 자가 있으니 허씨이고 이들은 7개의 본관이 있다. 김해, 양천, 하양, 태인, 공암, 한산 이다. 이씨는 하나의 본관으로 인천이다. 시조는 허겸 또는 허운이라 한다.
一 有異貫同源者 金氏有七籍 咸昌 咸安 高靈 星州 固城 晋州 海州也
본관은 다르나 뿌리가 같은 자가 있으니 김씨의 7개 본관이다. 함창, 한안, 고령, 성주, 고성, 진주, 해주이다.
各派行列
金寧君派(京派)
○培 鍾○ ○泰○洙 榮○ ○謙○燮 載○在○ ○鎭 浩○ ○根 性○益○ ○用 鎬○錫○ ○淳 東○
判書公派(三賢派)
容○ ○坤 鎭○鍾○ ○洙○泰 東○ ○熙 奎○ ○錫 洛○
相○ 熹○榮○ ○壎○在 ○善 洪○
監務公派(四君派)
○炫 在○ ○鎬 永○ ○植 炯○
文敬公派(侍中公派)
永○ ○模 熙○ ○載○ 鏞○ ○泰○ 來○ ○燮○ 瑄○
都摠管公派(西岡派)
○祚 奎○ ○壽 鍾○ ○永 秉○ ○勳 在○ ○鎭
(築隱公派)
光○ ○運 履○ ○爕 堯○ ○鍊 漢○ ○錫 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