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한국마임 축제'에서는 '사다리 움직임 연구소'의 <축구>와 '극단 사다리'의 <손들의 여행>, '프로젝트 판'의 <신문 - 추락하는 삶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큰 실수를 했어요.
<신문-추락하는 삶들>이 '프로젝트 판'의 공연이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모호하게 사다리의 공연으로 적어 놓았습니다.
유홍영 씨를 보면 무조건 '극단 사다리'부터 떠올리는 습성이 무의식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어서, 미처 의식을 못했습니다.
깊이 사과드립니다.
이해하고 읽어 주시고요.
작은 생각 하나에도 얼마나 단단하게 갇혀 있을 수 있는지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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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자유로운 소통의 시간
어두운 객석에 앉는 순간, 나는 언제나 텅 빈 그릇이 된다. 빛이며 소리, 움직임, 생각 한 점까지 . . . 일상의 모든 외피들을 까맣게 지워버린 순간, 그 어둠의 순간은 오히려 가장 생생한 생명의 약동으로 피어오른다. 텅 빈 가슴과 텅 빈 머리로, 나의 모든 담장들을 허물고 무심한 듯 그러나 가장 뜨겁게 무언가를 기다리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모든 공연을 보는 행위는 어쩌면 가장 고차원적이고도 에로틱한 대화의 몸짓인지도 모른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다채로운 이야기들, 배우의 몸짓과 가쁜 숨결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온갖 감정의 편린들을 통해 관객은 자기 무의식의 검푸른 바다 속에서 솟아오르는 다양한 자기들 을 만나고, 배우는 그런 관객의 반응들 속에서 더욱 깊이 자신을 파악하게 되기 때문이다. 관객과 배우가 서로의 거울이 되어, 서로를 더욱 사랑하게 도닥여주는 시간. 이보다 더 본질적인 대화의 시간이 있을까? 내가 기다리는 것은 요컨대 집착도 고통도 없이 담담하게, 그러나 가장 정확하게 서로를 알아가는 성숙한 소통의 경험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마임과의 만남을 언제나 가장 큰 편안함과 설레임으로 기다리게 되는 이유는 마음이란 장르가 보여주는 그 자유로움과 깊이의 공존 때문이다. 요컨대 마임과의 대화에는 결코 강요가 없다. 그러나 강요 없이 서로 간의 본질적인 거리까지 편안히 품어줌으로써, 오히려 가장 솔직하고 편안하게 더 많은 이야기들을 털어놓게 만든다. 배우와 관객 모두에게.
이런 자유로운 대화가 가능한 이유는 바로 마임 특유의 몸짓에 있다. 마임에서의 몸은 곧 표현의 도구이자 표현 자체이기도 한 법. 몸의 움직임이 갖는 이런 본질성이야말로 탈장르 시대에 마음을 마임으로서 존재케 하는 마임의 핵심적인 매력인 것 같다.
몸을 일컬어 흔히들 우리 영혼의 옷이라고들 하지만, 몸은 곧 우리의 상처와 생각, 감정, 영혼 등이 녹아있는 우리 존재의 표정 자체이기도 하다. 때문에 배우의 팔과 다리, 손끝이 움직임에 따라, 배우의 몸 속, 세포 하나 하나 속에 축적되어 있던 무수한 기억과 상처, 상념들도 따라서 움직인다. 몸의 움직임이 곧 존재 자체의 움직임, 존재 자체의 소리 없는 외침인 것이다. 미세하지만 강렬한 이런 무언의 외침들은 허공을 가르며 무수한 이야기들을 퍼뜨리고, 이 이야기의 씨앗들은 다시 나의 빈 그릇을 울려, 진정한 소통의 꽃, 사랑의 꽃을 피워낸다. 그들의 몸짓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들을 통해 나의 지나온 길들과 현재를 되짚어보고, 앞으로 가야할 길들을 꿈꿔 본다. 그들을 통해 나를 봄으로써, 나를,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할 힘을 얻는 것이다.
이 글은 이런 작은 소통의 기록. 2003년 한국마임의 다양한 몸짓들을 나누고 정리해보는 작은 축제인 ‘2003 한국마임’을 매개로 한, 지극히 사적일지도 모를 소통의 일기이다.
삶에 힘을 주는 경쾌하고 적극적인 에너지
<사다리>의 공연을 보고 나면 언제나 ‘그래, 생각만 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열심히 살아야지.’하는 생각이 든다. 사다리의 공연에서 전파되는 그 건강하고도 역동적인 에너지 때문일 것이다. 어떤 표현욕구나 삶의 문제들 앞에서 지레 가위눌려 고민하는 대신, 그 표현 방법과 해결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를 어려운 숙제가 아닌 재미있는 놀이로 풀어갈 줄 아는 경쾌한 에너지. <사다리>의 다채로운 실험과 다양한 표현법들, 왕성한 활동의 비결은 바로 이런 적극적이고도 구체적인 에너지에 있을 것이다. 고민이 아닌 사색으로, 진정 몸으로 움직일 줄 아는 에너지.
오늘의 사다리를 일궈낸 큰 버팀목의 하나인 유 홍영의 연출・출연작 <신문- 추락하는 날들>을 보면서도, 이런 밝은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일상과 현대인, 현대 문명의 자화상이랄 수 있는 신문이란 오브제를 이용한 신랄한 풍자와 해학, 참된 희망에의 회복을 소원하는 따스한 마음. 꼼꼼하게 계산된 듯한 움직임의 동선은 그 나름의 흥겨운 리듬감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아, 극에 집중력을 부여했다. 그 집중력은 다시 배우들의 집중력을 배가하는 힘으로 작용했고, 어느 순간 관객과 배우들이 같은 호흡으로 극에 참여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객석의 반응 역시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차고 뜨거웠다. 나와 너, 우리들의 추한 자화상이 적나라하게 발가벗겨지는 모습 앞에서도 뻔뻔할 정도로 통쾌한 웃음을 남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이런 호흡의 일치 때문이었을 것이다. 단도직입적인 솔직함이 주는 대리 정화의 즐거움. 신문을 상징물이 아닌 소품으로 이용해서, 성의 상품화나 정치인들의 비리, 오노의 비열함을 꼬집은 부분에서는 그야말로 웃음이 절로 나왔다. 또한 양복을 뒤집어 입고 나온 그 작지만 재치 있는 발상의 전환이나 꼼지락 꼼지락 획일화에 저항하는 발들의 미약한 반란을 볼 때에는 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때론 비극을 희비극이 아닌 희극으로만 순화시켜버리는 지나치게 밝은 에너지는 뭔가 허전함을 준다는 것이다. <사다리>의 건강한 에너지에 대한 나의 선입견 때문인지, 그 건강함에 정말로 중요한 무언가가 빠져 있기 때문인지, 모범생다운 긍정성을 넘어 삶의 끈적끈적한 심연을 길어 올릴 수 있는 보다 장중하고도 긴 호흡이 필요한 건지, 그 이유는 아직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지금 이대로도 사다리의 움직임은 기대감을 자아낸다. 언제나 다음의 공연을 기대하게 만든다.
성실과 열정이 만들어낸 놀라운 변신, 뿌듯한 감동
서로 다른 길을 가던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을 때, 그들의 달라진 모습은 힘을 주기도하고, 안타까움에 한숨을 쏟아내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기쁨과 한숨은 사람은 ‘진정 변할 수 있는 존재인가?’ 하는 생각을 되새김질하게 만든다.
오랜만에 본 김원범과 고재경의 공연에서 나는 사람은 진정 변할 수 있는 존재이며, 그 변화의 원동력은 삿되지 않게 묵묵히 자신의 꿈을 만들어가는 구체적인 시도와 성실성에 있음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배우의 변신은 몸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대 위에 선 김 원범의 몸은 달라져 있었다. 현대 모던마임의 문법을 창시하고 다진 에티엔느 드크루의 학교로 유학을 가기 전, 그의 몸은, 더불어 그의 공연은 별로 강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던 것 같다. 그저 성실하고 착하며 심지가 굳은 사람이었다는 기억 외에, 그의 연기에 대한 감동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요 몇 년의 세월을 그는 아주 치열하게 살았었나 보다. 두리뭉실 형체 없는 나무 둥치 속에 잠들어 있던 자신의 진짜 몸을 이제야 비소로 발견 혹은 조각해낸 것 같다. <상념 part 1.2>에서, 단순한 리듬에 묵직한 힘을 실어 나르는 클래식 음악을 배경으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낄법한 욕망과 동요, 갈등, 방황, 회상 등을 이야기하는 그의 몸짓은 리드미컬하면서도 부드럽고 힘이 있었다. 잘 훈련된 근육 속에 응축되어 있던 그 감정의 조각들이 드크루의 표현기법을 통해 힘 있게 터져 나왔다. 때문에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관념적인 주제들이 강한 긴장감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완전히 달라진, 팽팽하게 다듬어진 그의 몸 안에서 이런 상념들의 치열한 투쟁의 흔적들이 자연스럽게 묻어났기 때문이다.
이제야 비로소 몸 자체의 표현성을, 자기만의 몸을, 중요한 표현법의 하나를 발견한 그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겐 커다란 감동이었다. ‘나는 나만의 구체적인 표현방식을 찾았는가?’하는 즐거운 반성에 젖게 만들었다.
그러나 <The War>은 그 스케일에 비해 많은 아쉬움을 남기게 하는 작품이었다. 아이의 회상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부각시킨 작품이었지만, 그 스토리의 전개가 아직 너무 단순한 감이 들었다. 이제 막 발견한 대작의 씨앗을 너무 성급하게 무대에 올린 느낌. 그러나 그 미완의 느낌만큼 다음의 완성된 모습이 기대되는 작품이었다.
작품의 완성도 면에서는 <가시나무 새>가 가장 훌륭했던 것 같다. 보디 페인팅을 이용한 분장 디자인도 눈에 띠었으며, 한 편의 서정적인 그러나 신화적인 깊이를 가진 단편 소설 같은 스토리의 전달도 충분히 성공적이었다. 인간의 몸 안에 각인되어 있는 부동적인 비극의 씨앗과 움직이는 사랑의 생명력, 이 두 힘의 대비가 아름답게 연출되었다.
김 원범의 공연은 그 감동만큼 기대와 욕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막 발견한 그의 몸에 머무르지 말고, 그의 몸 안에 고여 있는 그만의 색깔들을 드크루적인 방법까지 녹여낸 그만의 방법으로 다채롭게 표현해냈으면 하는 바람. 그래서 그만의 그 신실하고 올곧은 에너지가 더욱 다채로운 모습으로 자라났으면 하는 마음. 다행히 이런 소망을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그의 몸이 주고 있는 것 같다.
고재경은 이제 자신에 대한 당당함과 함께 보다 진지한 책임감을 가져도 될 것 같다. 기다림의 다양한 표정들을 코믹하게 사실적으로 혹은 시적으로 표현해낸 <기다림> 역시 과거에 본 그의 작품들에 비해 많이 발전한 느낌이었다. 무엇보다도 사실적인 스토리의 정확하면서도 절도 있는 전달 능력이 그의 중요한 무기인 것 같다. 한 가지, 관객들을 의식한 듯한 불필요한 코믹성의 첨가는 때로 군더더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 군더더기들을 쳐내고, 작품의 주제를 한 차원 끌어올릴 수 있는 진지함을 첨가했다면, 한 편의 아름다운 서정시를 만들어낼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러나 그의 사실적인 몸짓 속엔 분명 전과는 다른 여백과 여운, 무게가 실려 있었다. 이런 작은 발전이 단순한 코믹에 그칠 수도 있었던 그의 작품에 작은 감동의 파장을 만들어내기 시작하고 있는 것 같다. 그 파장이 더욱 크고 강한 여운으로 확대되길 기다려 본다.
몸속에 갇혀버린 관념들의 지친 그림자
냉철한 사색이 아닌 모호한 관념은 끝없는 고민의 미로를 만들어낸다. 출구를 향한 사색이 아닌 공회전의 고민. 일정 기간을 넘기면, 이런 고민의 지속은 치열하던 몸짓도 이유 없이 복잡하고 이유 없이 피곤하기만한 매너리즘으로 전락시켜버린다. 자신의 몸 안에, 좁은 망념들의 세계 속에 갇혀 버린 자신의 실상에 서서히 무감각해지는 것이다. 공연이나 삶이나 이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진정한 고통은 삶의 피상성을 거두어내 버린다는데 . . . 아직 충분히 고뇌하지 않은 것일까? 자신과의 뼈아픈 대면을 아직 충분히 감내하지 않은 것일까? 아직 완벽하게 잘라내지 못한 나의 지난 그림자들에 대한 애증의 감정처럼, 이 두성의 <길>과 노 영아의 <덫>, <이불의 꿈-소통>은 강한 안타까움과 답답함을 자아냈다. 이 두성의 섬세하면서도 남성적이고 깊이 있는 사색의 에너지와 심연의 단단한 빗장까지 힘차게 열어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은 노 영아의 무기(巫幾) 서린 강렬한 에너지가 그들의 몸 안에 갇혀, 그들의 몸까지 피곤하고 지치고 붓게 만들고 있는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들의 공연에선 관념만 비등할 뿐, 그 관념을 담아낼 그릇이 형식이 느껴지지 않았다. 말 그대로 나의 애증 때문인 걸까? 하여간 그 관념의 무게에 짓눌려 버리기 전에, 어서 훌훌 그 관념들을 자신의 친구로 가벼이 받아들이게 되었으면 좋겠다.
나만의 옷 찾기 - 마음을 다해, 과감하게 도전적으로
마임을 계속한다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던 일 세대의 외롭고도 절박한 몸짓들을 지나, 내 것이 아닌 이방인의 몸짓과 대화법을 터득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던 이 세대의 성실한 노력을 넘어, 이제 한국 마임도 어느덧 한 차원 높아진 기본기에 당찬 실험력을 갖춘 삼 세대가 공존하는 다양성과 책임의 시기를 살아가게 되었다. 이 번 ‘2003 한국마임’은 특히 이런 3세대의 풍요롭고도 조화로운 공존과 삼 세대의 약진이 돋보이는 무대였다.
오르페우스와 유리디케의 사랑이라는 일면 익숙하고도 어려운 주제로 한 시간 분량의 마임극을, 그것도 이십대의 나이로는 믿기지 않을 만큼 짜임새 있고 분명하게, 소화해낸 윤종연의 연출력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배우들의 잘 계산된 몸짓과 새롭고 분명한 의도가 엿보이는 무대 장치, 확실한 이야기 전달력 등은 특히 훌륭했다. 그러나 배우들의 대부분이 아직 이십대여서 그런 것일까? 그 화려하고 보기 좋은 몸짓에 비해 그들의 내면 연기는 아직 약하게 겉돈다는 느낌이 간혹 들었다. 그래서 때로는 섬세한 연출 의도까지 과도한 욕심에서 비롯된 불필요한 멋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현대적인 그러나 상투적인 기법의 모방이 주는 알 수 없는 피로감이 얼핏 든 것이다. 그러나 부토나 병신춤을 연상시키는 박종태의 움직임은 극의 클라이맥스에서 관객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보다 간결하게 그러나 보다 응집된 윤종연의 다음 연출작이 기대된다.
무언가 모를 재미있는 상상력의 소유자인 것 같은 이 정훈의 공연도 아주 즐거운 발견이었다. <미친 새의 노래>는 그 실험적이고도 신선한 의상에 비해 작품의 내용 면에서 아직 충분히 무르익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밧줄을 잡아당겼다 놓치는 단순한 행위를 소재로 삶의 전 과정을 관통하는 삶의 일면을 훌륭하게 그려낸 것 같다. 아직 충분히 개화되지 않은 그러나 재미있는 캐릭터의 배우. 보다 과감하게 자신을 풀어헤치고 실험을 하든가, 아니면 좀더 강한 절제로 안으로 시선을 돌리든가. 둘 중의 어느 한 방향으로 힘을 모은다면, 그 역시 아주 독특한 작품을 만들어낼 것 같다.
혼돈에서 탄생, 망각, 기계적인 삶의 공식, 희망으로 이어지는 다섯 개의 에피소드를 통해 현대인들의 자화상을 그려낸 김봉석의 연기도 훌륭했다. 집중된 내면 연기의 힘이 유독 두드러지는 배우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 내면 연기의 힘이 좀 더 다양한 형식들과 훌륭하게 어우러지는 모습이 기대된다.
부토적인 몸짓이 가미되었다면 작품이 더욱 재미있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불러일으킨 박 미선과 오꾸다 마사시의 앙상블, <남과 여, 그리고 풍경>도 흥미로웠다. 극도로 절제된 움직임으로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상징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한 컷의 사진 같은 장면을 연출해냈다. 이 외에 최 경식의 <다윗과 골리앗>은 아직 가야할 길이 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했고, 강 정균과 이 경식, 조 성진의 작품들은 아쉽게도 놓치고 말았다.
꾸준히 어느 한 길을 간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능력임을 갈수록 절감하게 된다. 때론 앞서가고 때론 뒤에 처지는 이들도 있겠지만, 같은 곳으로 시선을 두고, 같은 길을 간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서로에게 힘을 준다. 모두가 소중한 도반들인 것이다.
이 번 ‘2003 한국마임’을 보는 내내, ‘그 길을 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하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역시 마음을 다해, 온 마음으로 자신의 표현법을, 자신의 진짜 옷을 찾아가는 일임을 다시금 확인했다. 일상의 삶은 물론 예술작품의 창조에도 적용되는, 진부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진리인 것 같다.
한국 마임이 지금의 다채롭고 풍요로운 모습에서 한 발짝 나아가, 제각각 자신만의 독특하고도 자연스런 옷으로 갈아입게 되길 바란다. 그것이 지금 한국 마임의 숙제인 것 같다. 언젠가는 풀어야 할 모든 인간의 숙제이기도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