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
월간/GOODS PRESS, 동경, 1991. 12. pp. 145.~149, 번역.
한국의 차세대 비전을 짊어질 예술현장의 새로운 리더들
치노 쉬이치 <전위음악가>
지금 한국은 뜨겁다. 세계의 구성 형태가 흔들리기 시작하고 내일을 예측조차 할 수 없는 이 시대에 뭔가를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를 갖고 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그 에너지란 예술이다. 어떠한 역사에서도 예술에서부터 자손이 태어나고 에너지가 생겼다. 한국의 예술 현장은 한계를 한계로 잡지않고 부활하는 경계선으로 생출시키고 있다.
10년전부터 일․한 아티스트들 사이에서 깊이 교류하고 있는 전위음악가 치노 쉬이치는 그러한 예술 현장을 전개하고 있는 다섯 명 (김덕수, 김태수, 문정규, 안성수, 이불)을 만났다. 기존의 상식에 어울리지 않는 새로운 발상과 에너지의 원천으로서의 예술을 만나는 것으로 뜨거운 한국을 보았던 것이다.
『작가 문정규는 「생성과 소멸」을 조형언어로 에너지의 리듬을 파악하고 현장성을 중시하는 퍼포먼스를 주장한다. 한(恨) 사상의 하나인 氣, 기조된 테마를 그가 정력적으로 작품화 하기 시작한 것은 인간과 자연의 소멸을 통해 그 모습을 본 것과 재발견이 하나의 출발점이었다.
'도전 받지않는 예술이란 존재할 수 없다, 자기 모순과 싸움을 하면서.'』
문정규의 유니크한 퍼포먼스 중 「너와 나의 카테고리」라는 작품에서 관객은 일상성 속에서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생각해 낼 수 없는 스스로의 죽음과 재생의 세레모니를 체험한다. 그 속에서 그는 관객을 끌어내어 원, 삼각형, 사각형의 틀을 인체성에 맞추어 들고 서있게 하든지 목에 걸든지 설치하고 결국에는 몸을 빨강색, 녹색, 흰색 테이프로 꽁꽁 휘감아버린다. 발목에서 머리카락까지 용서없이 구속한다. 커플들이 사이좋게 한꺼번에 묶여버린 관객들도 있다. 그렇게 하더라도 거부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누구도 도망치는 사람도 없다. 관객은 기묘하게 순종하고 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자꾸 연행되어 간다.
그의 행위는 으스한 사냥개 같은 기백과 확신에 만만하다. 그리고 나직하게 웃는 소리와 날카로운 긴장감에 속고 있는 기묘한 시간이 지나서 공간은 구속된 인체의 오브제로 메꾸어진다. 갑자기 그는 사각의 종이 다발을 한 장, 그리고 두 장 머리 위에서 떨구다가 종이다발을 머리 위의 허공으로 높이 던진다. 거친 숨소리와 힘찬, 미친 것 같은 행위로, 공중에서 떨어지는 종이, 지상에는 이상한 오브제들……, 전지 한 장을 찢어서 천국과 지옥을 기상천외하게 만들어낸다. 갑자기 한꺼번에 클라이막스가 연출된다.
정․동․삶과 죽음 앞에는 어떤 카테고리도 없다. 너도 나도 똑같다. 죽음을 역사적 죽음, 사회적 죽음, 개인적 죽음 등 여러 가지로 분류하는 것보다 그에게는 죽음 그 자체가 중요하다. 한국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특별한 천으로 몸을 묶고 장례한다. 그리고 '관객을 묶기 전에 리허설할 때 그는 자기 자신이 묶임을 경험해 봤다. 가시적인 죽음을 느끼기 위해서 뭔가 편안하고 기묘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아마 관객들은 유사체험에 행복을 기대하고 그를 따라가는 것 같다. 누구나 그렇게 확실히 알아주지 못하더라도 하메룬의 피리 부는 남자처럼 그의 행위에서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불가사의한 친화력이 방사되고 있다.
서양화를 전공하였으며 한국성을 재인식하게 된 후부터 서양적인 사고의 눈으로 사물을 대하지 않으려 했으며 그렇기에 거기에서 그는 기운생동(氣運生動)이라는 동양화의 조형론을 실제 작품에 전개해 왔다.
「생성과 소멸」이나 「삶과 죽음」을 크게 내포한 동양적 자연관을 기초로써 자연의 영원성과 인간의 유한성의 요소들에 안주하는 공존이 아니라 대립하는 공존으로 갈등적 균형을 유지하면서 순간성에 항상 도전하고 있다. 그의 퍼포먼스 작품 「죽음」에서는 지하철 입구에 가마니를 덮은 시체가 등장한다. 너무 리얼하였기 때문에 물의를 일으켰다. '퍼포먼스란 현장 상황입니다. 어떤 현장에서도 자연과 관객과의 소통으로서만 성립되고 끝나는 것입니다. 작업이 끝나면 모든 것은 사라지고 무형의 정신만 남고 그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지요. 자연, 생존 그대로가 결국은 하나의 현장이라 말할 수 있지요.'
옆에 나무 오브제가 있었다. 죽은 나무를 가져다가 구멍을 만들고 또 다른 나무를 몸에다 조립하고 그리고 나무를 굽고 빗물을 맞힌 지 3년 정도가 흘렀다. 죽어있는 자연과 살아있는 에너지가 융합된 것이다. 불과 비 그리고 그 에너지를 받고서 죽은 나무조차도 다시 재생한다. 이렇게 해서 우주는 차가운 물질로 되어 있는 물건이 아니고 어떤 카테고리도 초월하는 에너지가 무한히 교향하는 장이 되었다.
문정규의 퍼포먼스는 포용의 에너지를 아낌없이 방사하면서 시간과 공간을 가볍게 넘어간다. 미술 교육가로서도 정력적으로 활동하는 그에 있어서는 예술도, 생활도 똑같이 삶에 에너지가 스파크한 현장으로서 어떠한 순간에 소통도 같은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
월간/GOODS PRESS, 동경, 1991. 12. pp. 145.~149, 번역.
첫댓글 아주 멋진 문선생님~~아주 귀한신 분을 알게 됨을 감사 드립니다~~퍼포먼스를 더욱 리듬감있게 표현 하시니 선생님의 깊은 생각을 조금이나마 공감하기를 바라는 바 입니다^~^
문교수님의 퍼포먼스를 현장에서 처음 본 것은 아주 오래전이었고 그때 문교수님의 첫인상에서 이분은 범상치 않는 분이란걸 감지하였는데 세월이 갈수록 더욱 감동시키는 작품과 저서를 발표하시어 수많은 사람들을 놀라게하시고 추종케하시니 세계적으로보아도 으뜸가는 예술가임을 부언하지못할것입니다 참으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거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