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혁명의 구조(토마스 쿤)』 비판
이덕하
2009-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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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 철학.. 1
쿤에 대한 오해.. 2
축적 vs. 혁명.. 2
혁명의 비합리성.. 3
서로 말이 안 통한다?. 5
여기서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철학은 라캉, 푸코, 지젝, 데리다 등의
철학을 가리킨다. 이런 식의 통칭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흔히 쓰이는 표현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은 대체로 상대주의를 지지한다. 그들에 따르면
과학적 담론도 미신적 담론, 종교적 담론, 이데올로기적 담론과
별로 다를 바 없는 하나의 담론일 뿐이다. 그들은 과학이 지식을 찾는 더 우월한 담론이라고 주장하는
과학자들이나 과학 철학자들을 비웃는다.
미신, 종교, 어설픈 사회과학, 포스트모더니즘 등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과학자들이나 과학 철학자들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당신은
『과학 혁명의 구조』도 안 읽어보았습니까?
이미 쿤이 과학의 특권적 지위가 허상이라는 것을 다 까발리지 않았나요?”라는 식으로 응수한다.
쿤에 대한
오해
쿤의 글을 읽어보면 실제로 과학의 특권적 지위는 허상이라고 주장하는
듯이 보이는 구절들이 있다. 하지만 쿤은 결코 과학과
미신을 동급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는 과학적 방법론이 진리를 향한 더 나은 길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즉 논리적 일관성, 실증적 검증 등의 가치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쿤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와 같은 상대주의자들이 자신을 오해했다고
보았으며 『과학 혁명의 구조』에 붙인 후기(postscript)를
비롯하여 여러 글에서 그런 오해를 풀려고 했다. 물론 상대주의자들 중 일부의 눈에는 쿤이 배신한 것으로 보인다. 쿤이
『과학 혁명의 구조』의 초판을 출간할 당시에는 과학 철학 문제에서 혁명적 입장이었는데 무슨 이유 때문에 여러 정치 혁명가들이 우경화하듯이 ‘우경화’했다는 것이다.
오해를 산 데에는 쿤의 책임도 어느 정도 있어 보인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좀 더 돋보이게 하려고 상당히 눈길을 끄는 어법을 사용했다. 예컨대 과학자가 한 패러다임을 버리고 다른 패러다임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그는 ‘개종(conversion)’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한 종교를 버리고
다른 종교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뜻하는 말이다. 그런 표현만 보면 이슬람교도가 기독교도로 개종하는 것과
뉴턴의 중력 이론을 버리고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을 받아들이는 것 사이에 별 차이가 없다고 쿤이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즉 합리성의 측면에서는 별 차이가 없는 신앙 체계들인 이슬람교와 기독교
사이에서 선택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자의 ‘개종’ 즉 패러다임 선택도 객관적, 합리적 요인이 아니라 뭔가 다른 이유에 기반하는 것이라는 뉘앙스가 풍긴다.
하지만 쿤의 책 전체를 읽어 보았다면 그런 식으로 오해하기는 힘들
것 같다. 내가 보기에는 쿤을 인용하면서 상대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은 쿤의 글 중 자주 인용되는 유명한 구절들만 읽어본 것 같다.
쿤은 과학의 역사가 우표 수집처럼 지식을 하나하나 축적하는 과정만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과학의 역사는 이전의 지식을 뒤엎는 혁명의 역사라는 것이다. 천동설을 뒤엎은 코페르니쿠스, 뉴턴의 중력 이론을 뒤엎은 아인슈타인의
예가 전형적이다.
나는 쿤의 이런 주장에 동의한다.
내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쿤이 당대의 과학자들, 과학
철학자들, 과학사가들이 과학의 역사를 축적의 역사로만
보았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내가 보기에는 쿤의 유명한
책이 나오기 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과학의 역사가 혁명의 역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코페르니쿠스와
아인슈타인의 작업이 혁명이었다는 것을 누가 부정했겠는가? 진화론이 창조론을 대체한 것이 혁명이었다는
것을 누가 부정했겠는가? 화학의 역사에서 비슷한 혁명들이 일어났다는 것을 누가 부정했겠는가?
쿤은 허수아비 공격법(straw
man argument)을 쓰는 것 같다. 즉 이전의 과학 철학자들을 과학을 우표 수집과
동일시하는 바보라고 묘사하는 것 같다.
쿤은 혁명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비합리적인 요소들이 큰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합리적 요소들은 논리적 일관성, 실증적
검증 등을 가리킨다. 반면 비합리적 요소들은 과학자들의 국적,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과학자의 유명세, 과학자가 믿었던 미신이나 종교,
이론에 대한 과학자의 애착 등을 가리킨다. 과학 혁명이 합리적 요소들에 의해 지배된다고
보는 상식과는 달리 쿤은 비합리적 요소들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나는 비합리적 요소들이 매우 커다란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정할 생각이 없다. 예컨대
케플러가 천동설을 거부하고 지동설을 받아들인 이유 중 하나는 그가 태양을 숭배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는데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제시되었을 때 그것을 제시한 나라의
과학자들은 금방 ‘개종’하는 반면 그 나라와 앙숙인 나라의 과학자들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상당 기간 거부하는 일도 있었다. 과학자들은 자신이 제안한 이론, 또는 자신이 평생을 연구했던 이론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과학자들에게는 이론이 애인과 비슷해서 비합리적인 집착을 보이기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과학 역사를 보면 그런 비합리적 요소들은 결국 상쇄된다. 결국은
장기적으로 전체 과학자 집단의 선택을 지배하는 것은 합리적 요소들인 것이다. 기존 패러다임과 새로운
패러다임이 경쟁을 벌이는 수 년 또는 수십 년 동안은 합리적 기준만 보았을 때에는 어느 쪽이 우월한지 애매할 수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 즉 거대 모델이 작은 모델들에 미치는 이론적 함의를 하나하나 추적하고 실증적으로 검증하는 데에는
오랜 기간이 걸린다. 어떤 때에는 기술적 한계 때문에 검증이 당분간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즉 새로운 패러다임이 더 우월하다는 것을 의심의 여지 없이 보여주기에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와중에는 여전히 어느 패러다임이 우월한지 합리적 기준만으로는 확신하기 힘들다. 이럴 때에도 이미 많은 과학자들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옮겨 타는데 이 때에는 쿤이 언급하는 비합리적 요소들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끼어드는 것 같다. 하지만
길게는 몇 십 년 이상 걸리는 검증의 기간이 지나면 적어도 일류 과학자들의 눈에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과학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이 거의 또는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어진다. 이것이 거의 모든 경우에 패러다임 역전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다. 단기적으로는 비합리적 요소들에 휘둘리기도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과학은 합리적 기준을 바탕으로 전진하는 것이다.
이미 확고하게 검증된 상황에서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사이비과학자로
찍힌다. 그런 사람들은 합리적 기준보다는 비합리적 요소들에 의해 지배되는 사람들로 과학자로서 가망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과학이 합리성에 의해 지배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과학자들이 항상 합리적 기준만 따져서 선택하며 항상 양심적이라고
믿을 만큼 바보가 아니다. 과학자들은 때로는 사기도 치며, 미신도
믿으며, 애국심에 휘둘리기도 하며, 출세를 위해 줄을 서기도
하며, 이론에 대해 비합리적인 애착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제대로 정립된 과학의 장기적 추세를 관찰해 본다면 그런 것들은 결국 이론 선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장기적 추세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합리적 요인들이다. 사기는 들통나는
경우가 많다. 들통나지 않더라도 장기적으로는 별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반복 검증되지 않으면 과학자들은 결국 믿지 않기 때문이다. 물리학, 화학, 생물학 같이 잘 정립된 과학의 경우에는 과학자들이 장기적으로는 애국심이나 비합리적인 애착 등을 극복하고 합리적
기준으로 이론을 선택할 만큼은 합리적인 것 같다.
나는 인간 전체가 충분히 합리적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미국
같은 선진 산업국이면서 동시에 선진 과학국인 나라에서도 대중 대다수는 여전히 합리성의 기준으로 볼
때에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기독교 창조론을 믿는다. 대중은 새로운 패러다임이 과학계에서 승리한 이후
수백 년이 지나도 여전히 비합리적 요인들에 지배를 받아서 옛날 패러다임에 매달리는 경우가 있다. 또한
많은 사회 과학자들이나 철학자들도 그런 대중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내가 어느 정도 신뢰하는 것은
일류 과학자들의 합리성이다.
서로 말이 안
통한다?
쿤은 서로 다른 패러다임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말이 통하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서로 매우 다른 전제 하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서로 매우 다른 전제에서 출발하면 말이 통하지 않을 수 있다.
문제는 쿤이 이해와 믿음을 혼동한다는 것이다. 기존 패러다임을 받아들이는 과학자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해는 하지만 믿지는 않을 수 있다. 예컨대 뉴턴의 중력 이론을 믿는 과학자가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을 이해하면서도 받아들이지는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을 이해하려면 비에우클레이데스(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배워야 하며 뉴턴의 개념과는 다른 시공간 개념을 익혀야 한다. 이런 것이 일반인에게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지만 당대의 세계적인 과학자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설사 당대의 일류 과학자들에게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경우라 할지라도 그것은 이해의 문제다. 즉 해당 과학자의
무능이 문제인 것이다.
과학자들이 서로 자신이 지지하는 패러다임만 이해한 상태에서 서로에게 말을 건다면 쿤의 주장처럼 서로 말이 안 통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과학
역사에서 당대의 일류 과학자들이 1 년을 공부해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난해한 패러다임이 출현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믿음과 이해는 분명히 구분되는 현상이다. 과학자들을
포함한 인간은 믿지 않으면서도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서로 다른 패러다임을 지지하는 과학자들이 상대편
패러다임을 충분히 이해한 상태에서 논쟁을 벌인다면 말이 통할 수 있다. 즉 ‘개종’하기
전에도 말은 통할 수 있는 것이다.
서로 말이 통한다면 서로 다른 패러다임을 실증적으로 검증하여 어느 쪽이 더 우월한지를 가릴 길을 찾아내는 것이
가능할 때가 많다. 기술적인 이유 때문에 당분간 가리기 힘들 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과학의 역사를
볼 때 이런 문제는 시간이 해결해 주었다. 앞으로의 과학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의 과학 역사를
볼 때 과학자들은 서로 다른 패러다임을 서로 이해한 상태에서 논쟁을 벌였으며 우월한 패러다임을 실증적으로 가릴 방법을 거의 항상 결국 찾아냈다.
첫댓글 지나가다가 짧게나마 댓글 남깁니다. ^^ 쿤이 허수아비를 상대로 공격을 하고 있는게 아닌가라는 문제제시에 대한 것입니다. 쿤이 등장하기 이전의 과학철학의 지형을 고려해본다면 어떨까 합니다. (여기서 과학철학은 '과학'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정도로 이해하면 무난할 듯합니다.) 즉, 논리실증주의자들의 귀납주의나, 그 귀납주의를 반대하는 칼 포퍼의 반증주의... 등등등 쿤이 등장했던 때는 귀납주의나 반증주의 등이 '과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대표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이러한 입장은 과학이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것으로 봅니다. 따라서 쿤은 결코 '허수아비'를 때리는 것이 아니죠. ^^
귀납주의나 반증주의는 "구획"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고, 쿤의 이론은 "과학 변천의 모습"을 다루는 것입니다. 반증주의가 구획의 문제에서 일정한 기준을 제시한다고 하여도 그것이 과학사에 대한 점진주의적 이해로 귀결되지 않습니다. 칼 포퍼는 언제나 "대담한 가설의 제시"를 훌륭한 과학자의 태도로서 제시하였고, 칼 포퍼의 반증주의 이론에서 일종의 모델 역할을 했던 것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임을 감안하면, 반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새로운 가설은 얼마든지 혁명적일 수 있는 것입니다. 쿤의 문제는 과학자 집단의 활동, 과학자 개개인의 마음상태와 동기 등 사회학적 기술(description)의 문제를 구획의 문제와 혼동하였다는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