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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자료실 스크랩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 남명 조식
자흥 추천 0 조회 43 15.09.14 13:3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남명 조식

경()으로서 나를 밝히고 의()로서 나를 던진 선비

[ ]

출생 - 사망1501년(연산군 7) ~ 1572년(선조 5)

1501년(연산군 7년) 경상좌도() 예안현(지금의 경북 안동) 온계리에서 퇴계 이황이 태어나고, 경상우도() 삼가현(지금의 경남 합천) 토동에서 남명 조식( , 1501~1572년)이 태어났다. 16세기 학파 형성기에 영남학파의 두 거봉이 된 이들은 같은 해에 태어나서 퇴계는 70세, 남명은 72세까지 장수를 했다. 퇴계가 경상좌도 사림의 영수라면 남명은 경상우도 사림의 영수로서 이 두 사람의 제자들은 동인 정파를 형성했다. 그러나 영남학파를 바탕으로 한 이 동인 정파는 다시 퇴계학파의 남인과 남명학파의 북인으로 분립되었다.

16세기는 사회적으로 성장한 사림과 기성 정치 세력인 훈구파의 대립과 갈등 속에 사화가 연속적으로 발생한 시기다. 한 세기에 걸쳐 정치적, 경제적 기득권을 향유하면서 귀족화한 훈구파와 사회 개혁을 요구하면서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부상한 사림파의 격돌은 필연적이었다. 그러나 정치판의 물갈이라는 절실한 시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신파인 사림과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의 격돌은 언제나 사림이 피를 흘리는 사화로 결말이 났고, 그러한 상황은 연속되었다. 칼자루는 언제나 정치적, 경제적으로 우위였던 훈구파가 쥐고 있었던 것이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신진 사림인 조광조가 등장하여 성리학적 이상 사회를 위한 대개혁을 추진했지만 학문적 미성숙성과 과격성 때문에 실패하게 되는데, 이때도 정권의 승자는 중종반정의 훈구 세력이었다. 훈구파의 전횡에 질려서 신진 사림에 힘을 실어 주려 했던 왕도 두 세력의 대격돌 앞에서는 결국 훈구파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사림이 미래라면 훈구파는 현실이었다. 왕이 추구하는 미래가 사림에게 있다 하더라도 왕은 자신의 오늘이 있게 한 훈구파를 외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권이 훈구파에게 넘어가면 사림은 귀향하여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를 키우면서 때를 기다리게 된다. 향촌 사회에서 때를 기다리던 사림이 다시 중앙 정계에 진출하게 된 것은 중종 후반기에 이르러서이다.

퇴계는 1534년 34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로서 사대부의 길을 걷게 되고, 남명은 1539년 39세로 초야에서 학문에만 전념하는 유일()로 인정받아 국가의 부름을 받았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선비가 수기()하면 당연히 치인()의 단계로 가서 학자 관료인 사대부가 되는 것이 상식인 그 당시에 퇴계는 그 길을 걸었지만 남명은 그 길을 거부하고 재야 지식인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경()과 의()를 학문의 신조로 삼으며

해동지도삼가현에 조식이 태어난 곳이 표시되어 있다.

남명 조식은 삼가현 토동()1)의 외가에서 아버지 언형(, 1469~1526년)과 어머니 인천 이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녕(), 이름은 식(), 자는 건중(), 호는 남명()이다. 처가가 있는 김해에서 산해정()을 짓고 제자를 길러 산해선생(), 산해부자()로 불리기도 했다.

조식은 다섯 살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갔고, 일곱 살 때부터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를 가르친 아버지나 동네 서당의 훈장은 의문에 의문으로 이어지는 그의 질문 공세에 질리기도 했다. 조식은 아홉 살 때 큰 병에 걸려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에 다다른 적이 있었다. 그때 어린 조식은 아픈 것을 참으며, 상심한 어머니를 오히려 위로했다.

“어머니, 하늘이 사람을 낼 때 어찌 뜻이 없겠습니까. 소자가 남자로 태어났으니 반드시 소자에게 부여한 임무가 있을 것입니다. 임무도 다하지 못한 어린 소자의 목숨을 하늘이 거두겠습니까.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열다섯 살 때 조식은 단천군수로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함경도 단천에 가서 살았다. 이때 조식은 공부의 범위를 유교 경전에만 한정하지 않고 제자백가ㆍ천문ㆍ지리ㆍ의학ㆍ수학ㆍ병법 등을 두루 공부하여 안목을 넓혔다. 한편 지방 관아에서 생활하는 동안 불합리한 행정 체제와 아전들의 비리, 백성의 곤궁한 삶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이때의 경험은 뒷날 그의 「무진봉사 2)」에도 그대로 반영이 된다. 「무진봉사」 중 ‘서리망국론’은 아전들 때문에 나라가 망하겠다는 우려와 함께 아전들의 비리실상을 낱낱이 적은 것이다.

함경도 단천 시절에 조식은 자기 수양을 위한 두 가지 방법을 마련한다. 꿇어앉아서 물그릇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밤을 새우는 일과, 허리에 방울을 차고 다니는 일이 두 가지 자기 수양의 방법이었다. 그릇의 물이 흔들리지 않게 받쳐 들고 밤을 새움으로써 자신의 뜻을 가다듬고, 걸어 다닐 때마다 허리춤에서 나는 방울 소리를 들으면서 자신의 뜻을 일깨우려는 것이었다.

조식, 「서간」24×24cm, 성균관대학교박물관 소장.

열여덟 살이 되는 1518년(중종 13년)에 조식은 아버지를 따라 서울 장의동으로 돌아왔고, 이 장의동 시절에 대곡 성운( )ㆍ청송 성수침( )ㆍ동고 이준경( ) 등의 친구를 사귀었다.

정선, 「청송당」종이에 옅은 채색, 33.5×29.3cm, 간송미술관 소장.
서울 장의동 시절 조식은 청송당의 주인 성수침 등 명망 있는 선비들과 교유하였다.

조식이 진사ㆍ생원 초시()와 문과 초시에 급제한 것은 1520년(중종 15년) 스무 살 때의 일로서, 기묘사화()로 또다시 사림 세력이 숙청당한 이듬해의 일이다. 조식은 기묘사화 때 숙부 조언경이 희생되고 부친이 좌천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사로()의 험난함을 깨닫지만, 어머니의 권유에 못 이겨 과거에 응시하게 된다.

조식의 어머니는 영락한 가문의 중흥에 대한 열망이 강했기 때문에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고 사대부의 길을 걷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조식의 생각은 달랐다. 반드시 중앙 정부의 벼슬을 해야만 국가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모친의 권유에 따라 진사ㆍ생원 초시와 문과 초시를 보고 급제를 했지만 조식은 진사ㆍ생원 회시()3)에는 응시를 하지 않고, 문과 회시에만 응시하여 낙방을 한다. 이때부터 조식은 과거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오로지 유학의 본질을 파고드는 공부에 몰두하게 된다.

공자ㆍ주돈이(?)ㆍ정호()ㆍ주자의 학문과 정신을 이어받겠다고 명세하면서 『주역』ㆍ『시경』ㆍ『서경』ㆍ『주례』ㆍ『예기』ㆍ『춘추』 등 육경()과 『논어』ㆍ『맹자』ㆍ『대학』ㆍ『중용』 등 사서(), 그리고 주돈이ㆍ정호ㆍ장재()ㆍ주자 등 송대의 주자학자들이 남긴 글을 다시금 새롭게 읽고 연구하고 사색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조식은 경()과 의()를 학문과 처신의 지표로 삼았다.

군자는 경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바깥을 바르게 한다.
君子 敬以直內 義以方外

『주역』 곤괘()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 ‘경’과 ‘의’를 딴 조식은 자신이 차고 다니는 칼에다 “안에서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에서 결단하는 것은 의다( )”고 하는 글귀를 새겼고, 옛 성현의 말씀 가운데 경과 의에 관한 글을 뽑아 베껴서 항상 옆에 두고 외우면서 사색했다. 그리고 뒷날 산천재()를 짓고는 왼쪽 창문에 ‘경’ 자를 써 붙이고 오른쪽 창문에 ‘의’ 자를 써 붙였다. 또한 경의 상징으로 성성자()라는 방울을, 의()의 상징으로 칼을 차고 다녔다.

조식은 만년에 덕산에 산천재를 짓고 강학할 때, 뜰에는 매화를 심고, 창의 좌우에는 각각 경() 자와 의() 자를 써 붙였다.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소재.

이때 시작한 조식의 ‘경의’에 대한 강의는 그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진다. 숨을 거두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남긴 말도 ‘경의’였다.

“경과 의, 이 두 글자가 있는 것은 마치 하늘에 해와 달이 있는 것과 같다. 이 두 글자의 의미는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것이다. 성현이 남긴 말씀의 귀결처는 모두 이 두 글자를 벗어나지 않는다. 배우는 이들이 이 두 글자의 공부에 익숙해진다면 마음에 거리낄 것이 없을 것이다. 나는 그런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죽는구나.”

죽음에 이르러서도 ‘경의’를 신념화한 조식의 모습이 선명히 나타나 있다

처사()의 삶을 찾다

조식은 1530년(중종 25년) 30세에 처가가 있는 김해로 어머니를 모시고 이주하였는데, 이것은 처사로 살면서 벼슬살이를 하지 않은 데 따르는 생활고와 무관하지 않다. 22세 때 남평 조씨( ) 가문의 사위가 된 조식에게는 상당한 재산가인 처가로부터 분재받은 전답이 김해에 있었다. 딸에게도 상속권이 있었기 때문에 부인이 친정으로부터 받은 상당한 재산이 김해에 있었던 것이다.

생활의 안정을 얻은 조식이 김해 신어산 중턱에 정사()를 짓고 산해정()이라 이름하니, 대곡 성운ㆍ청향당 이원( )ㆍ송계 신계성( )ㆍ황강 이희안( ) 등 많은 선비가 찾아오고, 뒷날 명종, 선조 대에 영의정을 역임하면서 최고의 행정가로 평가받은 동고 이준경은 『심경』을, 규암 송인수( )는 『대학』을, 대곡 성운의 형인 성우()는 『동국사략 』을 보내 온다. 한편 청도 운문산으로 가서 삼족당 김대유( )를 만나는 등 활발한 교유 활동을 한다.

여성의 가계 계승 권리가 반영된 『안동 권씨 족보』남녀 구분 없이 출생순으로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조식이나 이황 등이 혼인을 통해 경제 기반을 얻은 데서 보이듯 조선 전기와 중기의 여성들은 재산 상속에서도 차별을 받지 않았다.

『남명선생학기류편()』규장각 소장. 조식은 제자백가를 비롯하여 공부의 범위가 다양했으나 성리 철학을 둘러싼 논쟁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따라서 성리 철학에 관한 저술로는 성리학자들의 기존 논의를 가려 뽑은 이 『학기류편』이 유일하다.

남명 조식이 1533년(중종 28년) 33세의 나이로 향시()에 응시한 것은 어머니의 간곡한 당부 때문이었다. 조식의 어머니는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고 사대부가 되어 영락한 가문을 일으켜 세워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남명은 최종 시험에서 합격을 하지 못함으로써 과거를 통한 출사는 이루지 못하며 영원한 처사로 남게 된다. 남명의 영원한 동반자이자 라이벌인 퇴계가 과거를 통해 출사한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퇴계와 남명은 여러 차례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일생 동안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채 서로 존중하면서 서신만 주고받은 기이한 인연이 있다.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두 사람은 서신 교환을 통해 상대를 은근히 비판하기도 하였다. 조식은 무엇보다 당시 성리학의 이기 논쟁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황이 그러한 흐름을 주도하는 것을 불만스러워 하였다.

『남명집』 중 퇴계에게 답한 편지 부분

1536년(중종 31년) 36세의 조식은 결혼 14년 만에 첫아들 차산()을 얻고 가을에 있은 향시에서 3등을 한다. 1538년(중종 33년) 38세에는 회재 이언적( )의 추천으로 헌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1543년(중종 38년) 43세 때는 경상감사로 부임한 이언적이 만나기를 원했으나 거절한다. 그 이듬해인 1544년에 조식은 첫아들 차산을 병으로 잃고 연이어 1545년에는 어머니 인천 이씨를 여읜다.

남명 조식이 김해에서 삼가현으로 돌아간 것은 어머니의 시묘살이를 하기 위해서였다. 아버지 산소의 동쪽 언덕에 어머니를 장사지내고 3년 시묘살이를 한 조식은 삼가현 토동에 강학당인 계부당()과 제자 숙소인 뇌룡사()를 짓고 정착한다. 이때부터 처사(), 곧 재야 지식인인 조식의 활약이 시작된다. 조식이 처사의 길을 택한 것은 객관적이고 공정한 눈으로 현실 정치를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조정을 진동시킨 사직상소문

1551년(명종 6년) 51세에 정6품직인 종부시(簿) 주부(簿)에 임명되었지만 사양하고, 1553년 53세에 다시 정6품의 벼슬을 내렸으나 역시 사양을 한다.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던 퇴계 이황이 편지로 간곡하게 요청했지만 조식은 ‘눈병’을 핑계로 거절한다. 이때 퇴계와 남명이 주고받은 편지에서는 서로에게 보내는 애정과 존경의 정이 자못 절절하다. 퇴계는 ‘유일()로 임명한 벼슬이니 몸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다’며 남명에게 벼슬길에 나오기를 원했고, 남명은 ‘하늘의 북두성처럼 우러러 사모하던 그대의 요청에 따를 수 없는 이유는 나의 경륜 없고 식견 없는 무지몽매함에 있다’며 애정과 존경이 넘치는 편지로 거절했다.

1555년(명종 10년) 55세의 남명 조식에게 다시 벼슬이 내려진다. 삼가현에서 가까운 단성현(경남 산청)의 현감이었다. 서울로 올라오라는 것도 아니고 이웃 고을의 현감을 하라는 것이니 이번에는 사양하지 못할 거라며 내린 벼슬이었지만 조식은 이른바 「단성소 」로서 이 역시 단호하게 거절한다. 이 단성소를 『남명집』에는 1555년에 올린 상소문이라 하여 「을묘사직소 」로 기록하고 있다.

“(전략) 나라의 근본은 없어졌고 하늘의 뜻도 민심도 이미 떠나버렸습니다. 큰 고목이 백 년 동안 벌레에 먹혀서 그 진이 다 말라버렸으니 언제 폭풍우를 만나 쓰러질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중략) 낮은 벼슬아치는 아랫자리에서 술과 여색에 빠져 있고 높은 벼슬아치는 윗자리에서 빈둥거리며 뇌물을 받아 재물 불리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오장육부가 썩어 배가 아픈 것처럼 온 나라의 형세가 안으로 곪을 대로 곪았는데도 누구 한 사람 책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중략) 대비(문정왕후)께서는 신실하고 뜻이 깊다 하나 구중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는 아직 어리시니 다만 돌아가신 임금님의 한 고아에 불과합니다. 백 가지 천 가지로 내리는 하늘의 재앙을 어떻게 감당하며 억만 갈래로 흩어진 민심을 어떻게 수습하시렵니까. (중략) 옛날에 우리나라에 신하처럼 복종하던 대마도 왜구를 대접하는 의례가 천자의 나라인 주나라를 대접하는 의례보다 더 융숭합니다. 원수인 오랑캐를 사랑하는 은혜는 춘추시대 송나라보다 더합니다. 세종대왕 때 대마도를 정벌하고 성종대왕 때 북쪽 오랑캐를 정벌하던 일과 비교하여 오늘날의 사정은 어떠합니까. (중략) 임금으로서의 원칙을 세우십시오. 임금에게 원칙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됩니다.”

「을묘사직소」(『남명집』 중)

이황이 조광조의 실패를 거울 삼아 점진적인 개혁의 씨앗을 뿌리고 신정치 세력인 사림의 입지를 다져 놓았다면, 조식은 강직한 기상과 강렬한 비판 의식을 가진 재야 사림으로서 거침없는 말과 행동으로 사회 개혁을 주장했다. 남명은 지나치게 투철한 정치 의식 때문에 현실 정치판에 뛰어들지 못한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퇴계와 남명, 두 사람에게는 사회 정의 구현의 이상을 교육에 걸고 새 시대를 준비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정구()ㆍ김우옹(?)ㆍ정탁() 등은 퇴계와 남명 두 문하를 번갈아 출입한 퇴계와 남명 두 사람 공동의 제자이다.

조식의 대표적 문인들로는 정구ㆍ곽재우()ㆍ정인홍()ㆍ김우옹ㆍ이제신()ㆍ김효원()ㆍ최영경()ㆍ오건()ㆍ강익()ㆍ문익성()ㆍ박제인()ㆍ조종도()ㆍ노진(?)ㆍ하항() 등을 꼽을 수 있다. 남명 문인의 특징으로는 대부분 은둔하면서 학문에 몰두했다는 점과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키거나 가담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재야 지식인으로 은둔해 있다가도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직접 창칼을 들고 적군과 맞서 싸움으로써 정신뿐만 아니라 육신까지도 선비의 기백을 보인 것이다. 남명의 외손녀 사위인 의병장 곽재우에게도 남명이 병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전해 온다. 제자들을 배출한 남명의 교수 방법은 자해자득()이었다. 시비를 강론하거나 변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제자들에게 경서를 풀이해 주는 대신 스스로 터득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 남명과 퇴계

경상좌도와 경상우도의 양대 산맥으로서 영남학파의 굳건한 버팀목이었던 퇴계와 남명의 제자들은 그 후 퇴계학파의 남인과 남명학파의 북인으로 갈라지게 된다. 점진적인 개혁의 씨앗을 뿌리며 신정치 세력인 사림의 입지를 다져 놓은 퇴계 이황과, 강렬한 비판 의식으로 무장한 말과 행동으로 급진적인 사회 개혁을 주장한 재야사림의 영수 남명 조식. 그들의 성향은 달랐지만 지향점은 같았다. 자신의 안위나 영달보다 사회 개혁 의지를 불태우면서 제자를 양성하고 자신의 학문을 정점으로 끌어올렸던 것이다. 시대를 앞장서 이끈 퇴계와 남명은 양당 정치 체제를 준비한 선각이기도 했다. 학파 기반의 이념 정당인 붕당이 그 이후에 성립되고 양당 정치 체제가 확립되었으니, 이념의 바탕 없이 이합 집산하는 오늘날의 지식인과 정치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남명 조식이 만년을 보낸 곳은 지리산 아래 덕산 사륜동이었다. 1561년(명종 16년)에 이곳에 산천재를 짓고 자신과 제자들의 강학 장소로 삼고 부단히 제자들에게 학문과 기개를 가르쳤다. 1572년(선조 5년) 2월 8일, 석 달 전에 발병한 등창으로 고생하던 남명 조식은 산천재에서 여러 제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옛 성현의 ‘경의’에 관한 가르침을 외우면서 숨을 거두었다. 산천재 뒷산 임좌향()에 안장된 남명 조식은 대사간에 이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도덕이 있고 견문이 넓기 때문에 문()이요, 도를 곧게 지켜 꺾이지 않기 때문에 정()’이라는 문정()의 시호를 받았다.

조식의 묘몇 차례 깨어졌다 다시 만들어진 조식의 묘비는 정인홍의 정치적 패배 등 그 문인들이 겪은 정치적 파란을 짐작케 한다.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소재.

도학이 사라져 가는 시대에 태어나 분발 정진함으로써 도학을 일으켜 세운 학자요, 그에게서 ‘경의’의 가르침을 받은 수많은 제자가 국가 위난의 시대에 의병장이 됨으로써 성공한 교육자로 기록되는 남명 조식의 저서로는 『남명집』, 『남명학기류편 』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 남명과 퇴계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2002. 12. 10.,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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