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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소망은 무엇? 한 민족의 미래. Atlanta에서
시작하는 말
“우리의 소망은 무엇? 한 민족의 미래.”
이 제목이 暗示하는 것이란 ‘현재 우리는 여러 가지 難關에 부닥치고 있다. 앞으로 우리 앞에 所望이 있는가? 특히 오래 동안 역경을 겪어온 우리 한 민족의 미래는 어떤 것일까?
우리 한 민족 앞에 무슨 소망이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이 물음에 대한 나의 대답이란 ‘現在대로는 우리들에게 所望이 없다. 앞으로 소망이 있으려면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하고 삶의 자세를 바꾸어야 한다. 우리의 삶의 자세를 바르게 바꾼다면 榮光스런 내 내일이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 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커다란 難關에 부닥치고 있다. 우리 고국에 있는 동지들의 끈질긴 투쟁으로
민주화를 이룩했다고는 하나 날이 갈수록 심화되는 貧富 隔差로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아우성을 치고 있다. 그 결과로 흠집투성인 경제인을 압도적인 다수표로 대통령으로 모셨다.
그러나 그 결과란 오히려 우리에게 일대 混亂을 招來할 것으로 보인다. 貧富隔差는 오히려 더 심화될 것이요 그뿐만이 아니다. 60 여 년 동안 갈라져서 반목질시하던 남과 북이
平和統一을 하려고 서로 손을 내 밀었었으나 이 역시 어떻게 될지 오리무중에 싸여있다.
우리 美國에 사는 僑胞들도 不安에 싸여있다. 미국에서도 빈부 격차가 날로 심화되어 中産層이 沒落해 가더니 요즈음은 경제 자체가 深淵을 향해서 굴러 떨어지려고 한다. 탐욕에사로잡힌 부시 정권이 이락을 침공하여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질 분만 아니라 나라 경제도 破綻 直前에 있다. 남다른 꿈을 안고 미국에 와서 주야를 불고하고 부지런히 뛰어서 이제 살만하게 되는 가 했는데 갑자기 불어 닥치는 不景氣로 말미암아 모두 아연 실색을 하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은 것인가? 세기를 두고 고생해 온 우리들의 앞날엔 아무런 소망도 없는 것인가? 이것이 우리 모두가 가지는 답답한 심정이다.
1. 문제의 뿌리는 경쟁적인 산업문화
이 문제의 뿌리는 경쟁적인 産業文化에 있다. 독일의 유명한 사회심리학자 Erick Fromm은
우리들이 호흡하고 있는 이 産業文化를 죽음의 문화라고 命名했다. 그리면서 생명을 살리는
健全한 社會를 창출해야 한다고 주장을 했다. 아 産業文化란 商品을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좋은 상품을 많이 소유하면 幸福해 진다고 선전을 한다. 멋있는 의복, 화려한 집, 크고 modern한 자동차 등등. TV에서 선전하는 각가지 상품을 많이 소유하면 행복해 진다는 것이다. 사실 TV는 상품을 찬양하는 神殿이기도 하다.우리들의 눈은 TV에서 선전하는 각가지 화려한 상품에 환장이 되어 미친 듯이 날뛴다. 서로 치열한 경쟁을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산업문화의 主役들은 각 가지 화려한 상품을 大量生産하여 TV를 통해서 선전을 함으로 視聽者들의 口味를 도꾼다. 그리고 이 産業文化란 大量生産을 하고 大量 消耗를 하여야 계속 달릴 수 있다. 그 결과는 어떤가??
우리들의 눈에는 商品밖에 보이는 것이 없게 된다. 심지어 사람들 까지도 상품화된다. 미인, 미남은 모두 나의 향락을 돕는 상품이다. 지식이나 기술이 있는 자들은 다 큰 기업의 附屬品이 된다.
이렇게 미친 듯이 경쟁을 하다 보면 모두가 나의 敵이 되고 만다. 참된 親舊란 찾아보기 힘이 든다. 이웃 4 촌이라는 말도 옛 말에 불과하게 된다. 共同體란 공동체는 다 산산 조각이 난다. 그리고 이런 치열한 경쟁을 통해서 貧富隔差가 날로 더 심해질 뿐만 아니라나라와 나라 사이에 치열한 鬪爭이 일어난다. 큰 고기들이 작은 고기들을 계속 집어 삼켜서 소수의 巨富들이 온 세계를 마음대로 주물럭거리게 된다.先進國과 後進國 사이의 隔差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세계에서 제일 부하다고 하는 美國 내에서도 貧富隔差가 날로 더 심해져 시민들 사이에 각 가지 亂鬪劇들이 일어난다. 한국에서도 인구의 1 %가 한국 땅의 50% 이상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나 그뿐이랴. 이렇게 계속 생산하고 소비하는 사이에 우리들의 삶의 모체인 生態界도 파괴되어 인류를 죽음의 수렁으로 몰아넣는다. 북빙양의 얼음들이 녹아서 일어나는 각 가지 재난들이 일어나고 중국이나 아푸리카에서는 農地가 砂漠을 변하여 앞으로 식량공급에도 큰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하바드 대학의 명성이 높은 역사학자 Nial Fergeson 박사는
다국적 기업이 주도하는 세계화는 다 망할 수밖에 없다고 선언을 했다. 그래서 산업문화를 죽음의 문화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죽음의 문화의 늪에 빠져서 허덕이고 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의 소망은 어디에 있는가?
2. 새로운 가치관과 삶의 자세.
우리의 소망이란 우리들의 가치관에 변화가 와야 한다. 우리들의 삶의 자세가 새로워져야 한다.
첫째로 많이 소유함으로 행복해 진다는 거짓 환상에서 탈피해야 한다. 본래 幸福이란 고인 물과 같아서 얼마 지나면 썩어버린다. 물질이 갖다 주는 享樂도 이와 같다. 향락이란 끝 간 데를 모른다. 날로 우리들의 末梢神經을 더 刺戟해야 한다. 술과 마약으로 삶을 망치는 자들을 보라. 날로 더 마시고 더 먹다가 이에 삼킴을 당하고 만다. 성의 享樂을 즐기는 자들도 마지막엔 폭력을 통한 성행위를 해야 만족한다. 그리고 향락의 極은 생명을 해치는 殺生이다. 어린이들의 장난감들을 보라. 나날이 더 暴力的이 된다. 생명을 죽이는 스릴 이상 우리를 刺戟하는 것이 없다. 우리가 사는 美國에서 나날이 일어나는 폭력적인 殺生行爲를 보지 않는가. 바로 이것을 말한다.
우리는 행복을 바라는 삶의 자세에서 기쁨과 보람을 추구하는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기쁨이란 소유하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기쁨이란 삶과 삶 사이에 서로 氣가 通하는데서 온다. 위하고 아끼는 정이 서로 통할 때 생명이 피어나고 기쁨이 탄생한다. 방긋 웃는 아기를 품에 안은 어머니를 생각해 보라. 비가 오는데도 아랑곳없이 손에 손을 잡고 속삭이면서 가는 연인들을 생각해 보라. 외지에서 오랜 친구를 만나는 것이 三喜 가운데 하나라고 하지 않는가. 수 억불의 巨大廣室에 살면서 서로 反目嫉視하는 富者들 보다 草間 三間에서 오손 도손 된장국을 나누는 가정에 오히려 참된 삶의 기쁨이 깃드는 법이다. 그리고 삶의 보람이란 이 험상궂은 세상에 나가서 죽음의 문화를 추방하고 한숨을 짓던 얼굴들에 웃음의 꽃이 활짝 피게 하는데서 느낀다.
병든 어린 시다들을 위해서 자기 몸에 불을 지른 저 세상에 있는 全泰一은 이런 보람을 느낄 것이다. 이 美國에서 한 黑人이 大統領 候補가 되어서 推仰을 받는 것을 보고 Martin L, King 목사는 흐뭇하게 웃고 계실 것이다. 이렇게 삶의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 사람만이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보람찬 것인지를 느낀다. 사랑과 이해로 하나가 되고 나를 주어 인정공동체를 이룩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하는 한 새로운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상품의 소유가 아니라 서로 위하고 아끼는 네가 삶으로 나도 사는 상생의 문화를 창출하는 創造的인 삶의 姿勢를 가져야 한다. 이와 같은 삶의 문화란 商品이 아니라 生命을 至上의 價値로 여기는 데서 생성이 된다. 그래야 인류의 앞날에 소망이 있다.
3. 韓民族의 미래.
우리는 이런 새로운 삶의 자세를 가질 수 있을까. 세기를 두고 고생의 고생을 겪은 우리 한 민족이 이 일에 앞장을 설 수가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하여 나는 단호히 말한다. 우리 한 민족이 생명문화를 창출하는데 앞장을 설 수 있다고 말이다. 네가 삶으로 나도 산다는 상생의 진리의 담지자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역사적인 사명을 가진 민족이다. 나는 이것을 8 년 전 6.15에 남과 북의 영수들이 평양에서 만나서 앞으로는 武器에 의존하지 않고 서로 對話하고 協力을 함으로 平和統一을 이룩하자고 宣布한데서 재화확인 했다. 일찍 역사상에 武力을 總動員해서 싸우던 敵手가 이대로 가다가는 서로가 다 죽는다는 것을 깨닫고 武器를 집어 던지고 平和를이룩한 일은 없다. 平和라고 하면 PAX ROMANA 가 말하는 것처럼 强者가 弱者를 짓밟고
모두 강자들의 명하는 대로 순종하게 하는 강요된 침욱을 平和라고 했었다. 그런 평화는 오래 가지 않는다. 네가 살아야 나도 산다는 진리를 깨닫고 무기를 집어던지고 서로 이해하고 협력하는 데서만이 참된 평화가 창출이 된다. 이것은 나라와 나라 사이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도 타당 하는 진리다. 이와 같은 상생의 도란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자들만이 터득할 수 있는 진리다.
20 세기를 되돌아보라. 1918년 1 차 대전이 끝난 뒤 앞날의 세계 평화를 위해서 말 성 꾸러기라고 생각한 獨逸을 國際社會에서 閉鎖 시키고 平和를 이룩했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힘에 의한 정책이 그 무서운 2 次 世界大戰을 초래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 한반도에서 네가 살아야 나도 산다는 6.15 공동선언이 발표된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平和的으로 남과 북을 하나가 되게 한다면 우리는 東北亞의 平和를 초래하는 선구자의 역할을 할 것이다. 或者는 이 6.15를 남과 북의 두 정상이 각자의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룩한 政治協商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남과 북의 국민들이 이에 환성을 올린 것을 생각해 보라.김대중 대통령의 政敵들은 그를 북에 동조하는 빨갱이라고 비난했었다. 그가 김정일의 손을 잡고 상생의 길을 가자고 선언하고 돌아온 그는 응당 돌에 맞아 죽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는 국민 거의 모두가 두 손을 들어서 환성을 올린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그렇게 할 수 있은 것은 우리 국민 대부분이 평화통일을 갈망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가? 그 까닭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 한 민족은 세기를 두고 고생을 했기 때문이다. 서글픈 분단을 통해서 비참한 전란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런 고난을 통해서 生命이 所重한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다시는 이 땅에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아니 된다고 절감을 했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오손 두 손 서로 손을 잡고 살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심정이란 21 세기에 와서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우리들의 선조들은
선사시대부터 이런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의 고서들을 읽어보면 저들은 우리들의 先祖인 東夷族을 生命과 平和를 사랑하는 민족이라고 숭앙을 했다.
주전 3 세기 한나라 때 엮은 禮記에 보면 저들은 周邊 種族들을 野蠻이라고 흉을 보면서
우리들의 선조인 동의족은 “어질어서 생명 살리기를 좋아한다”라고 칭찬을 했다.
東夷傳에 보면
“동방을 夷라고 한다. 이란 물건을 살리기를 좋아해서 만 가지 물건을 자라게 한다는 말이다. 그 때문에 그들의 천성은 유순하여 올바른 도리로 인도하기 쉬워 군자는 죽지 않는 나라이다.“ 라고 적혀 있다.
山海經에 보면
북쪽의 군자들은 의관을 쓰고 검을 찼고 짐승의 고기를 먹는다. 두 가지 호랑이를 사용하고 이웃과 서로 가까이 살면서 서로 양보하면서 싸우지 않는다.“ 라고 적혀있다.
東方朔 新異經에 보면
“동방의 이족들은 남자들는 비단옷에 검은 띠를 띠고 검은 모자를 쓰고 여자들는 채색 옷을 입고 앉아서 서로 범하는 일이 없고 서로 높여 회방하는 일이 없다. 위급한 일이 있을 때는 생명을 던져서 서로 구한다. 얼른 보기에 미련한 듯하나 사실은 선한 사람들이다.“
弘益人間을 삶의 철학으로 한 檀國朝鮮시대의 풍조 역시 같은 모습이다. 당시 큰 무당인 단군의 통치법이란 각 지역을 다스리는 和白들을 한데 모아 모든 일들을 만장이치의 원칙에 따가서 결정을 하고 이를 공포하여 실시하게 했다는 것이다. 和合이야 말로 다스림의 원칙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생명을 사랑하고 평화를 존중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그들은 오랜 동안 더불어 험악한 逆擊을 克復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본래 우랄알타이 산맥에서 시작하여 춥고 밤이 긴 시베리아를 걸쳐서 낮이 길고 따뜻한 곳을 향해서 부락부락이 더불어 이동을 했었다. 이렇게 고생을 하는 과정에 생명이 소중한 것을 절감했고 더불어 화목하게 사는 도를 닦은 것이다.
저들은 생명을 살리는 환하고 큰 햇님을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 섬겨 한님이라 불렀고
그가 큰 울안에 계신다고 해서 한울님이라고 불렀다. 모두 이 한울님에게서 생명을 얻었기에 서로를 한 형제자매로 여겨 서로 아끼고 섬기면서 살았다. 이렇게 평화의 얼이 저들을
한 화목한 가정으로 만들었다.
이와 같은 우리 선조들의 사상이 중국 전국시대에 살았던 평화주의자 墨子의 글에 명확히 나타난다. 우리는 오래 동안 墨子를 中國學者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그는 東夷 의 後裔라는 것이 밝혀졌다. 묵자는 武王의 전투적인 정책에 반대하여 죽임을 당한 伯夷 叔齊의 후손인데 백이 숙제는 東夷 사람임이 밝혀졌다. 따라서 墨子의 哲學도 우리 선조들의 平和主義적인 자세와 일치한다. 따라서 그는 싸움을 일삼는 전국시대에 평화를 위해서 진력을 한 평화주의자로 알려졌다. 그는 노예들의 해방을 주장하고 전쟁을 수행하려는 왕들을 찾아가서 화해자의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芻나라가 宋나라를 침공하려고 했을 때 芻나라 왕을 찾아가서 이를 막으려 했다. 그리면서 그는 목숨을 걸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을 송나라에 보내어 宋나라의 방위를 돕게 했다는 것이다.
이 墨子의 소신이란 우리는 모두 한님의 자녀들이기에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고
이웃 가정을 자기 가정처러 소중히 여기고 이웃 나라도 자기나라와 같이 여기라는 것이다.우리가 모두 한님의 자녀라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면 우리 모두가 한님의 햇빛으로 사는 것이 아니냐고 대답을 했다는 것이다. 우리 선조들의 사상이 이렇게 명확히
글로 적혀 우리에게 전해져 있다.
이런 선조들의 얼이 고생을 당하는 민중들 사이에 흘려 내려오다가 이조 말 東學思想에서 다시 부활을 했다. 최제우의 事人如天 思想이 마로 그것이다. 이웃 속에 한님이 계시기에 誠敬心으로 .이웃을 하느님처럼 섬기라는 것이다 그리면 악질이 만연한 上元甲은 자취를 감추고 평화스런 下元甲이 온다는 것이다.
이 얼이 다시 “武力의 시대는 가고 平和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1919년 3 월 1 일에 선포된 3.1 독립선언서의 核이 되었다. 이 평화의 정신이 다시 民主化 운동의 추진력이었고 마침내 6.15 共同宣言을 탄생하게 했다.
맺는 말
우리는 외세로 말미암아 갈라진 땅에 사는 弱小民族이다. 세기를 두고 强大國에 시달려온 受難民이다. 그러나 우리는 矜持를 가져양 한다. 平和의 새 내일을 창출할 歷史的인 과제를 授與받은 백성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릇된 價値觀을 벗어버리자. 네가 삶으로 나도 산다는 상생의 진리를 삶의 원칙으로 삼자. 필요한 만큼 생산하여 서로 나누어 사는 새로운 생명문화 창출의 전위대가 되자. 이를 위해서 먼저 평화적인 민족통일을 이룩해야 한다. 그리고 이 상생의 삶의 원칙을 확산하여 동북아의 평화를 이룩하자. 역경을 겪어온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 운동이 탄생했듯이 미국의 흑인 노예들을 통해서인간해방 운동이 전개 되었듯이 우리 한 민족을 통해서 네가 삶으로 나도 살게 되는 상생의 21 세기가 전게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