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달마(菩提達摩)는 산스크리트어 bodhi dharma를 소리번역한 것이며, 흔히 달마라고 한다. 그는 남인도의 한 작은 나라에서 셋째 왕자로 태어났다. 붓다의 제27대 직계 제자인 반야다라(般若多羅) 존자에게 가르침을 받고 “그대야말로 모든 도리에 통해있다. 이제, 달마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라는 존자의 인가와 함께 얻게 된 이름이다. 이리하여 달마는 제28대 조사(祖師)가 되었으며 또한 존자로부터 엄숙한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다.
그것은 불법의 진수를 얻었더라도 곧바로 이를 전하기 위하여 멀리 가서는 아니 되며 당분간은 남인도에 머물러 있다가 존자 입적후 67년이 지나면 중국에 건너가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종교적인 능력이 뛰어난 상근기의 사람들만을 선택하여 가르쳐야 할 것이며 도를 성급히 전하고자 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 또 언제까지나 중국에 머물러서는 아니 되며 해야 할 일을 마치면 곧 인도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달마대사가 전해 온 선종은 중국인들에게 있어서는 어려운 신흥종교이고, 전래되어온 공자. 맹자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사람들 혹은 이미 불교를 전해온 스님들의 원성을 살 것을 생각했던 것이다.
스승의 명을 받아 남인도에 머물면서 민중을 교화하던 달마대사는 마침내 중국으로 가야 할 기회가 무르익었음을 알고 반야다라존자의 탑에 이별을 고하고 북쪽으로 향했다. 3년의 세월이 걸려 남해(현 黃州)에 도착했던 때가 양나라 보통 원년(520년)이라고 한다. 돈황에서 출토된 <낙양가람기>에 의하면 달마는 실크로드를 통하여 낙양에 온 페르시아의 승려로 나이 150세였다고 한다.
대사는 바다에 떠서 3년을 지나 남해(南海)에 다다르니, 이는 양(梁)의 보통(普通) 8년 정미년 9월 21일이었다. 광주자사(廣州刺史) 소앙이 예를 갖추어 영접하고, 무제(무제)에게 보고를 올렸다.
무제는 보고를 받고, 사자에게 조서(詔書)를 주어 맞아 드리니, 10월 1일에 금릉(金陵)에 이르렀다. 무제가 대사에게 물었다. "짐이 왕위에 오른 이래 절을 짖고, 경을 쓰고 스님들을 양성한 것이 셀수 없는데 어떤 공덕이 있소?"
대사가 대답했다. "아무 공덕도 없습니다." "어찌하여 공덕이 없소?" "이는 인간과 하늘의 작은 결과를 받는 유루(有漏)의 원인일 뿐이니, 마치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는 것 같아서 있는 듯하나 실제가 아닙니다." "어떤 것이 진실한 공덕이요?" "청정한 지혜는 묘하고 원만하여 본체가 원래 비고 고요하니, 이러한 공덕은 세상 법으로 구하지 못합니다."
무제가 다시 물었다. "어떤 것이 성제(聖諦)의 제일 가는 이치요?" "이러히 벽없어 성인이라 할 것도 없습니다.""짐이 대하고 있는 이는 누구요." "모릅니다." 무제가 알아듣지 못하니, 대사가 근기가 맞지 않음을 알았다.
그달 19일에 가만히 강북(江北)을 돌아서 11월 23일 낙양에 이르니, 이는 후위(後魏)의 효명제(孝 明帝) 태화(太和) 10년이었다. 숭산(嵩山)의 소림사(小林寺)에 머물러 벽을 향해 해가 지도록 잠자코 앉았으니, 아무도 대사를 아는 이가 없어 대사를 일러 벽을 보는 바라문이라 하였다.
이때에 신광(神光)이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활달한 사람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낙양에 살면서 여러 서적을 많이 읽고, 묘한 이치를 잘 이야기하였다. 그는 늘 이렇게 탄식하였다."공자와 노자의 교리는 예절(禮)•술수(術)•풍류(風)•법규(規) 뿐이요, 장자와 주역 따위 글은 묘한 진리를 다하지 못했다. 요사이 듣건대 달마대사가 소림에 계시는데 찾아가는 사람을 맞이하지 않고 현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한다."
그리하여 그에게 가서 조석으로 섬기고 물었으나 아무런 가르침도 듣지 못했다. 신광스님은 '옛 사람이 도를 구할 때에는 뼈를 깨뜨려서 골수를 빼내고 피를 뽑아서 주린 이를 구제하고, 머리를 진 땅에 펴고, 벼랑에서 떨어져 주린 호랑이를 먹였다. 옛 사람도 이러하였거늘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고 생각하였다. 그해 12월 9일 밤에 큰 눈이 왔는데, 신광스님이 꼼짝도 않고 섰으니, 새벽녘에는 눈이 무릎이 지나도록 쌓였다.
대사가 민망히 생각하여 물었다. "네가 눈 속에 오래 섰으니, 무엇을 구하는가?" 신광스님이 말했다. "바라옵건대 화상께서 감로의 문을 여시어 여러 중생들을 널리 제도해 주소서."
대사가 대답했다. "부처님들의 위 없는 묘한 도는 여러 겁을 부지런히 정진하여 행하기 어려운 일을 참아야 하거늘, 어찌 작은 공덕과 작은 지혜와 경솔한 마음과 교만한 마음으로 참법을 바라느냐. 헛수고를 할 뿐이다."
신광스님이 이 말을 듣고 슬며시 칼을 뽑아 왼쪽 팔을 끊어서 대사 앞에 놓으니, 대사가 비로소 그가 법기임을 알고 말했다. "부처님들께서 처음 도를 구하실 때는 법을 위해 몸을 던지셨다. 네가 이제 내 앞에서 팔을 끊으면서 구하니, 가히 할 만한 일이다."
대사가 그의 이름을 혜가(慧可)라 고쳐주니, 신광스님이 말했다. "부처님들의 법인(法印)을 들려주십시오." 대사가 대답했다. "부처님들의 법인은 남에게 얻은 것이 아니니라."
"제 마음이 편안치 못하오니, 스님께서 편안케 해주소서." "마음을 가지고 오너라. 편안케 해주리라." "마음을 찾아도 얻을 수 없습니다." "내가 이미 네 마음을 편안케 했다." 뒤에 효명제가 대사의 특이한 행적을 듣고 사자와 조서를 보내어 부르기를 세 차례나 하여도 끝내 소림을 떠나지 않았다. 황에의 뜻은 더욱 굳어져서 마납 가사 두 벌과 금발우, 은병, 비단 따위를 하사했으나 대사는 굳이 사양하여 세 번이나 돌려보냈다. 그러나 황제의 뜻이 더욱 굳어지니, 대사는 그제야 비로소 받았다.
그로부터 승속(僧俗)이 배나 더 믿고 귀의하였는데 9년이 되니 대사는 서쪽의 인도로 돌아갈 생각을 내고 문인(門人)들 도부, 총지비구니, 도육, 혜가스님에게 각기 자기의 법문 중에서 가죽, 살, 뼈, 골수를 얻었음을 증명하였다. 특히 수를 얻은 혜가스님에게는 사법(嗣法)의 신표로서 전법의 가사, 능가경을 주고
대사가 말했다."옛날에 여래께서 정법안장을 가섭에게 전하였는데 차츰차츰 전해서 나에게까지 이르렀다. 내가 이제 그대에게 전하노니, 그대는 잘 지키라. 그리고 가사를 겸해 주어 법의 시표를 삼노니, 제각기 표시하는 바가 있음을 알라."
대사의 예언은 비록 당시에는 헤아리지 못하나 뒤에는 모두가 맞았다. 후위의 효명제 태화 19년 병진년 10월 5일이었다. 그해 12월 28일, 웅이산(熊耳山)에 장사지내고, 정림사(定林寺)에 탑을 세웠는데 그뒤로 3년만에 위의 송운이라는 이가 서역에 사신으로 갔다가 오는 길에 총령( 嶺)에서 대사를 만났는데, 손에 신 한 짝을 들고 훌훌히 혼자 가니 송운이 "스님 어디를 가십니까?"하고 물었다. "나는 서역으로 돌아가오. 그리고 그대의 군주가 이미 세상을 뜨셨소."라고 대사가 대답하니, 송운이 이 말을 듣고 아찔함을 느꼈다. 대사를 작별하고 동쪽으로 가서 복명하니, 과연 명제(明帝)는 이미 승하하고, 효장제(孝莊帝)가 즉위하였다.
송운이 위의 사실을 자세히 보고하므로 황제가 광(壙)을 열어 보게 하니, 빈 관속에 신 한짝만이 남아 있었다. 온 조정이 깜짝 놀랐고, 황제의 명에 따라 남은 신을 가져다 소림사에서 공양하였다. 당의 개원(開元) 15년 정묘년에 도를 믿는 이들을 위하여 오대산 화엄사에 가만히 모셨다 하는데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처음, 양무제가 대사를 만났을 때엔 인연이 맞지 않더니, 그가 위(魏)에서 교화를 편다는 말을 듣고는 손수 대사의 비(碑)를 지으려 하였으나 겨를이 없어 하다가 나중에 송눙의 일을 듣고서야 이루었다.
대종(代宗, 당 8대왕)이 원각대사(圓覺大師)라는 시호(諡號)를 내리고 탑은 공관(空觀)이라 불렀다. 대사가 위의 병진년에 입적하신 이래로 송(宋)의 경덕(景德) 원년 갑진년까지는 467년이 된다. 달마대사의 가르침이 이처럼 비교적 뚜렷한 반면 그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는 대개 설화적이다. 그러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에 따르면, 어느 날 그는 선정 도중에 잠들어버린 것에 화가 나서 자신의 눈꺼풀을 잘라내 버렸다. 그런데 그 눈꺼풀이 땅에 떨어지자 자라기 시작하더니 최초의 차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선사(禪師)들이 참선중에 깨어 있기 위해 차를 마시는 것에 대한 전통이 내려오고 있다. 설화중 특이한 것은 달마대사의 모습에 관한 것이 있다.
달마대사가 중국에 포교하기 위해 어느 마을에 들어갔는데 그 마을에는 이상한 역겨운 냄새가 나서 마을 사람들이 짐을 싸서 마을을 떠나고 없었다. 달마대사는 그 냄새의 진원지를 찾아서 제거하면 사람들이 다시 와서 살면서 불교를 신봉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대사는 마을 뒤로 가 보니 연못에 커다란 이무기 한 마리가 죽어 썩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용이 못되고 죽은 이무기로구나. 이놈만 치우면 되겠군."
신통력이 뛰어난 달마대사는 자기 몸은 벗어 두고 정신만 빠져 나와서 죽은 이무기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달마가 이무기를 버리러 간후 구름을 타고 지나던 신선이 있었는데 평소 얼굴이 못생겼다고 동료 신선들의 놀림을 받아 열등감이 깊은 신선이었다. 이 신선의 모습이 바로 현재 우리가 '달마도'라는 그림을 통해 알고 있는 못생긴 달마 스님의 모습이라고 한다.
그 신선은 정신만 빠져나간 달마스님의 몸을 보았습니다. 얼씨구나. 이게 왠떡이냐? '그래, 이 녀석 몸과 내 몸을 바꾸면 친구 녀석들이 날 놀리지 않겠지.'몸을 바꾼 신선은 노래를 부르며 자기 갈 길을 가버렸다. 한편 이무기를 버리고 돌아온 달마는 자기 몸은 없고 못생긴 몸이 남아 있는 것을 보고 그 몸을 자기 몸으로 삼고 평생 살아갔다고 한다. 이제 달마대사께서 동쪽으로 오신 깊은 까닭을 아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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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대사의 신비한 이야기들
왠만하면 달마대사가 누군지는 모두 아실겁니다~!
중국 선종의 창시자로 명성이 드높지만,
사실 우리는 그 무섭게 생긴 달마도와 악을 막아주는 사람 정도로 알고있죠 ^-^
그토록 유명한 달마대사, 그에게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생사를 초월하는 달마 대사(達磨大師)
중국 땅에 처음 선법(禪法)을 전달한 달마 대사는 선종(禪宗)의 시조(始祖)로서 그에 관한 일화가 많이 있습니다. 달마 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간 것은 부처의 법 중에 선법(禪法)을 전하고 중생을 제도하려고 한 것이었죠. 달마대사는 선의 경지가 매우 높아서 생사의 경계를 초월해 보통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예사로 해냈다고 합니다..
달마 대사가 천산 산맥을 넘어 인도에서 중국으로 갈 때 앞을 가로지르는 강물을 만났다고 합니다. 아무리 살펴봐도 부근에는 배도 없고 인가도 없었지만 달마 대사는 태연하였죠.
그는 물위를 걸어서 강을 건너 중국 땅으로 갔던 것입니다..
달마 대사는 남인도 향지국 왕의 셋째 아들이었습니다.
일찍이 출가하여 반야다라에게 법을 받고 40년 동안 그를 섬기다가 양나라 보통 원년(520년) 9월에 광주 남해에 도착, 소주 자사 소앙의 소개로 금릉에 이르러 양무제와 만나 문답하게 되었죠.
양무제는 불심천자(佛心天子)라 불릴 정도의 사람으로 많은 불사를 한 사람입니다.
많은 절을 짓고 무수한 탑을 세우고, 여러 경전을 번역하고 또한 사경(寫經)도 하여 불법을 널리 세상에 포교하였던 사람.
왕은 달마 대사를 보자,
"짐이 즉위 이래로 많은 절을 짓고 경전을 새기고
스님들 공양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했는데 어떤 공덕이 있겠습니까?"
"조금도 공덕이 없습니다."
"어째서 공덕이 없습니까?"
"그것은 인천(인간 세상과 천상) 속세의 조그만 행위로서 공덕이 조금 새어 나올 뿐이오,
조금 있다 할지라도 참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떤 것이 참된 공덕입니까?"
"진정한 공덕은 청정한 지혜를 체득함에 있는데,
깨끗한 지혜는 마음이 비어 조용한 데서 나오는 것이므로
짐짓 드러내고자 마음내어 하는 일로는 이룰 수가 없습니다."
라고 했죠.
그러나 무제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도리어
대사를 외도(外道 : 그릇된 도를 닦는 이)로 취급하였습니다.
이에 대사는 곧 무제를 하직하고 강을 건너 소림사에 들어가서 날마다 벽만 바라보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일러 벽관 바라문(壁觀婆羅門 : 벽을 바라보고 명상하는 인도 스님)이라 하였죠.
달마대사의 고약한 인상
달마는 남인도 향지국(香至國) 국왕의 셋째 아들로서 머리가 영특한 미남이었으며, 지금 여러 그림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무서운 얼굴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범명(梵名)은 Bodhi-Dharma이고 성장하여 대승 불교의 승려가 되어 선(禪)에 통달하였으며 나중에 선종을 중국에 전달하기 위해 험한 천산 산맥을 거쳐 중국에 갔죠.
어느 해 중국 땅에 선종의 뿌리를 내린 다음, 인도를 다녀오는 도중에 첩첩 산중의 오솔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마침 그때, 깎아지른 듯한 절벽 끝에 겨우 뚫린 좁은 길에, 코끼리보다 더 큰 짐승이 길을 막고 누워 막 숨을 거두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 짐승이 거기서 그대로 죽으면 천산 산맥의 길이 막힐 판국이었죠.
달마는 재빨리 나무 밑에 자기의 육신(肉身)을 벗어 놓고 혼만 빠져 나와 그 큰 짐승 속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마치 차를 운전하듯이 그 짐승을 통행에 지장이 없을 만큼 길에서 멀리 옮겨 놓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 짐승의 몸에서 혼이 빠져 나와 자기 본래의 육신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자기가 벗어 놓은 미남의 육신은 없고, 험상궂고 보기 흉측한 육체 하나가 놓여 있었습니다. 어떤 라마교의 도승이 길을 가다가 문득 나무 밑의 혼이 빠져 나간 아름다운 육신을 보고 욕심이 나서 못생긴 자기의 육신과 몸을 바꾸어 버렸기 때문이었죠.
개구리였다면 좋았을텐데..
달마의 혼은 할 수 없이 그 못생긴 육신 속에 들어가서 중국으로 돌아왔는데 아무도 그를 달마로 알아보지 못했다고합니다.
그러나 그가 하는 말과 행동 등이 똑같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틀림없이 달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옛날처럼 스승으로 잘 받들었다고 합니다.
죽은 지 3년 만에 다시 살아난 달마
달마는 중국에 간 다음 소림굴(少林窟)에 들어가 9년 동안이나 묵묵히 벽만 대하고 앉아 참선을 했습니다.
중국 태생인 혜가(慧可)에게 법을 전하고 앉아서 열반(涅槃)에 들었는데, 나라에서는 국장으로 성대하게 장사를 지내고 왕릉과 같이 큰 묘를 만들었습니습니다.
그로부터 3년 후 중국사신 송운(宋雲)이 인도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총령(葱嶺)에서 달마대사를 만났습니다. 그는 눈을 의심했습니다. 달마가 신발 한 짝을 매단 주장자(지팡이)를 등에 걸치고 걸어오는 것이었죠.
"3년 전에 돌아가신 스님을 여기서 만날 수 있으니 실로 신기합니다."
"나는 생사를 해탈한 사람이요. 생사와는 아무 상관이 없소."
"그러나 내가 여기서 달마스님을 보았다고 하면 누가 나를 믿겠습니까?
다들 나를 미쳤다 하지 않을까요?"
"내 묘를 파 보면 알 것이오. 거기에는 내 몸도 없고, 빈 관 속에 신 한 짝만 남아 있을 거요."
하고는 나머지 신 한 짝을 주장자 끝에 매달고 태연히 고국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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