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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팅 보드를 쥐고 있는 오삼계. 이자성이든, 청나라든, 모두에게 있어 오삼계는 즉시 도움이 될법한 인물입니다. 이자성의 대순(大順) 왕조가 북경을 점령 한 후 각지에서 항복을 청하는 문서들이 도착했지만 오삼계의 항복 문서는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삼계는 명나라 최후의 정예군을 가지고 있으니, 다른 모든 지역에서 항복이 늦더라도 오삼계의 항복은 빠른 시기 내에 이루어져야 이자성에게는 유리한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명나라를 넘어 만주족이라는 적을 상대하는데도 오삼계만한 명장이 없었습니다.
청의 입장에서도 오삼계는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무엇보다 무적의 요새 산해관을 열어줄 수 있는 인물이 오삼계입니다. 그렇지만 오삼계는 명 왕조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지, 청나라 쪽이 잇다른 회유에도 불구하고 그전까진 산해관은 단단히 지키며 벼르고만 있었던 것입니다.
시간을 돌려보면, 1641년 청은 명에 대해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산해관 밖에 있는 모든 성이 청의 수중에 떨어졌으며 계요 총독 홍승주 등이 사로잡혀 항복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는 29살의 청년 오삼계도 참가했었는데, 간신히 사로잡힘을 피해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에 오삼계가 어떻게 행동을 했건간에, 숭정제가 사망한 33살까지 오삼계는 자신의 평생을 북방에서 만주족과 싸우는데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오삼계의 형 오삼봉, 외삼촌 조대수 등 여러 인물들이 오삼계의 마음을 돌려놓으려고 했으나 이 젊은 시절의 오삼계는 고작 5만 남짓한 병력으로 기개를 잃지 않은채 청에 전력으로 맞서고 있었습니다. 훗날 50세의 늙고 노회한 오삼계는 남명의 마지막 황제를 버마까지 추격하여 살해했지만 말입니다.
오삼계에게 이자성의 접근이 있었습니다. 포로로 잡은 오삼계의 아버지를 이용한 공작이었습니다. 오삼계의 아버지, 오양(吳襄)은 권고장을 보냈는데, 천하의 형세가 이미 결정되었으니 대세를 따르자는 식의 이야기 였습니다.
젊은 무장 오삼계는 이 요청을 일축합니다. 두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숭정제에 대한 충절입니다. 입에 발린 소리인지, 실제 젊은 날의 포부인지, 오삼계는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고 합니다.
"자신은 아버지의 음덕을 입어 출정했습니다. 적 이자성도 곧 박멸될 것이라 여겼습니다……그러나 나라에 사람이 없어 바람을 맞아 쓰러지고, 소문을 듣자하니 주군도 돌아가셨다 합니다."
"눈가가 찢어지는듯 해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쁨으로 여겼던 것은, 아버님께서 망치를 휘둘러 일격을 가하셔서 맹세코 적과 생을 하지 않으시고, 그렇지 않으면 곧 목을 쳐서 국나에 순사하시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찌 목숨을 훔치시고 가르치시기를 의가 아닌 것으로 하십니까!"
"아버님은 이미 충신인 아니십니다. 그러한데 어찌 소자가 효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소자는 아버님과 갈라서겠습니다. 어서 적을 도모하지 않으신다면, 적이 아버님을 가마솥과 도마 곁에 놓고 소자에게 회유를 한다 할지라도 돌아보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두번째 이유는 애첩입니다. 오삼계의 애첩 진원(陳沅)을, 이자성의 부하 중에서도 무례하고 거칠기 짝이 없다는 유종민이 차지해버렸습니다. 청나라 초기의 시인 오위업(吳偉業)은 원원곡(圓圓曲)에서, 이때 오삼계의 모습을 묘사하며
머리털이 관(冠)을 찔러 격노한 것은 홍안(紅顔 : 미녀) 때문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후일담으로 오삼계가 나중에 오위업에게 돈을 보내주면서 그 구절을 삭제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오삼계의 뜻이 어떤것인지 명확해지자, 이자성은 오양을 비롯한 오삼계의 일족을 모조리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10여만이 넘는 대병력을 이끌고 오삼계를 공격하러 떠났습니다. 오삼계는 무엇이든 대책을 찾아야 했습니다. 오삼계는 우선 산해관 쪽으로 군사를 옮기고 대비를 했습니다.
그 당시 청을 지탱하고 있던 아이신기오로 도르곤(Aisin-gioro Dorgon)에게도 숭정제 사망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5월 20일이었고, 거의 동시에 그토록 도도하게 버티면서 까탈스럽게 굴던 오삼계의 서한도 도착했습니다. 글은 제법 중후했지만 내용인즉 군대를 보내주라는 소리였습니다.
─ 뜻밖에도 도적의 무리가 하늘을 거스르고 궁궐을 범했다. 그 좀도둑, 오합지졸들이 어찌 능히 일을 이루겠는가. 그러나 어찌하랴, 북경의 인심이 굳지 않고 간사한 자들이 문을 열어 적을 들여서, 선제는 불행(죽음) 했고, 구묘(九廟)는 재가 되었다. 지금 적은 존호를 참칭(僭稱)하고 부녀자와 재물을 노략하며, 죄악이 이미 극에 달했다. 참으로 적미(赤眉), 녹림(綠林), 황소(黃巢), 녹산(祿山)과 같은 무리다. 천인공노, 민심은 이미 떠나갔다. 그 패망을 서서 기다리면 될 것이다.
삼계는 명의 후은(厚恩)을 받았기에, 그 백성이 난에 화를 당하는 것을 불쌍히 여겨 변방의 문을 막아 지키고, 군대를 일으켜 민심을 위로하고자 한다. 그러나 어찌하랴! 경동(京東)의 땅은 작아 병력이 아직 모이지 않았다. 특히 피눈물로 도움을 청한다. 우리나라와 귀조(歸朝)는 좋은 관계에 있기를 200여년, 지금 까닭없이 난을 만났다. 귀조는 이를 측은히 여기라! 또한 난신적자(亂臣賊子) 는 귀조 역시 마땅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힘을 합쳐 도성의 문에 도달하여 도적을 궁궐에서 멸하고, 대의를 중국에 보이면, 곧 우리나라가 귀조에게 보답하는것이 어찌 제물에만 그치겠는가. 무릇 열토로 보답하겠다. 이는 결코 허언이 아니다.
도르곤의 입장에서는 만세를 부르고 싶을 만했지만, 그는 차분하게 범문정, 홍승주등과 논의 한뒤 오삼계의 충의를 칭찬하는 답신을 보내는 동시에,
─ 지금, 그대가 만약 무리를 이끌고 귀순하면, 반드시 고향 땅에 봉하고 번왕으로 삼을 것이다. 하나는 곧 나라의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이며, 하나는 곧 몸과 집안을 보존하여 세세 자손 오래도록 부귀를 누리기가 산하처럼 오래일 것이다.
라고 하여 늬앙스를 고쳐 명을 구원하는게 아니라 오삼계에게 직접적인 투항을 권하는 식으로 바꾸었습니다.
오삼계로서는 그런 일에 신경을 쓰고 있을 만한 상황이 못 되었습니다. 서한이 도착하기 15일인 5월 5일, 오삼계는 이자성의 군대를 상대로 초전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5일이 지난 10일 날에 또다른 공격을 저지해내었습니다. 명나라 최강의 정예군은 분투를 거듭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계가 올 것은 불을 보듯 뻔했습니다.
그 사이, 도르곤은 청의 운명을 가를 이 전투에 직접 주력 부대를 이끌고 출진했고, 양익 사령관으로 영친왕 아지게(阿濟格), 예친왕 도도(多鐸)를 사령관으로 삼았는데, 모두 어머니가 같은 형제였습니다. 23일 청나라군은 열려진 산해관을 통해 마침내 그곳을 넘을 수 있었고, 오삼계를 만나 그의 군대가 모두 변발을 할 것을 명했습니다. 오삼계는 이 마당에 거부할수도 없어 머리를 깎았습니다.
그날부터 전투가 벌어졌지만 청군은 상황을 지켜보며 개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오삼계나 이자성이 양패구상하여 힘이 떨어졌을때 나가는 편이 좋았던 것입니다. 도르곤은 아지게, 도도, 홍승주, 조대수, 공유덕, 상가희 등과 함께 말 위에서 오삼계군과 이자성군의 싸움을 구경만 하고 있었습니다.
이자성의 군대는 이미 엄청난 대규모가 되어 오삼계의 군대를 급습했고, 그 숫자는 20여만에 달했으며 산에서 해안에 이르기까지 늘어설 수준이었습니다. 오삼계의 5만 정예 부대는 4배가 넘는 적을 상대로 이틀이 다 되도록 놀라운 분투를 보여주며 결사적으로 싸웠지만 이대로 가다간 전력의 열세로 패배는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놀라운 격전을 벌이던 산해관 방어 부대도 결국 한계를 들어내며 물러서기 시작할때, 갑자기 어마어마한 모랫 폭풍이 불어닥쳤습니다. 바람 소리가 천둥과도 같았다고 하는데, 바람이 거치는 순간 이자성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정체불명의 기마군단이 노도와 같이 진격해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마(萬馬)가 튀어올랐다.
당시 상황에 대한 기록입니다.
갑자기 들이닥친 기마대는 격전으로 지친 이자성의 군대를 눈깜짝할 사이에 도륙하고, 그들의 머리는 모두 변발이었습니다. 이자성은 사태를 깨달았습니다. 이 당시 상황을 기록할수 있는 주체는 결국 만주족 뿐인데, 만주족의 기록에서는 이자성이 만주족이 나타났다며 고함을 지르며 가장 먼저 도망쳤다고 합니다.
상황은 순식간에 바뀌었습니다. 한번 기세를 잃은 도적군단은 지리멸렬하게 패주했으며, 반대로 만주족 부대는 기세를 타고 배 이상의 힘을 내고 있었습니다. 오삼계 역시 보병과 기병 2만명으로 이자성을 추격하고, 달려갔습니다. 선제의 복수를 하고, 연인을 되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자성은 산해관에서 북경까지 내달리듯 도망쳤습니다. 최후의 발작인듯, 4월 29일 그는 즉위식을 치루고 스스로 황제를 일컫었습니다. 그 즉위식는 조악하기가 이를데 없었으며, 주무 대신들도 도망치거나 죽었습니다. 이자성은 황제가 되어 하룻밤을 보내고 즉시 도망쳤습니다. 자금성이 수많은, 가치를 감히 매기기조차 힘든 보물들은 '가져가기 힘들다' 는 이유로 모두 녹여져서 금괴 등으로 변해 실려갔습니다.
북경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사방에서 약탈하는 자들이 넘쳐났고, 이자성의 뒤를 따르는것이 늦었던 추종자들은 군중들에게 사로잡혀 죽었습니다. 반란군에 부역했던 자들이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회도 그 표적이 되어, 크리스트교 회당 역시 공격에 처했습니다. 수십명이 넘는 군중들이 교회로 달려갔을때, 그들은 이질적인 광경을 보게 됩니다.
금발이 키가 큰 서양인 검객이, 카타나를 들고 그들을 막아 세운것입니다. 아담 샬이었습니다. 아담 샬의 기세에 눌린 군중들은 자신들은 약탈하러 온게 아니라며 돌아갔습니다. 아담 샬은 이 혼란기동안 여러 사람들을 고치고 돌봐주는등 다방면에서 활약했습니다. 상황은 혼란스러웠습니다. 일부는 오삼계가 이자성을 물리치고 황제의 아들을 앞세워 귀환하고 있다고 떠들어대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이자성이 떠난 바로 다음날, 일단의 군대가 북경에 도착했습니다. 도르곤이었습니다.
도르곤은 조양문으로 입성했으며, 살아남은 명나라 관리들은 성밖 2킬로미터 까지 나가 그를 영접했습니다.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도르곤을 맞았습니다. 도르곤은 약탈을 금지시켰는데, 그 이유는 이곳이 이제 청 제국의 수도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명나라 관리들은 옛 직에 복귀할 것을 명 받았지만, 관청의 인자에는 만주문자가 새겨졌고 사방에 삭발을 강요하는 사자들이 움직였습니다.
청이 중화제국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명나라가 완전히 끝난것은 아니었습니다. 남경, 옛 명나라의 수도에 아직 작은 불씨가 남아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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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 ㅎㄷㄷ
잘 읽었습니다. 금발의 카타나 검객이라니 맙소사;;
금발 검객의 위엄 ㅎㄷㄷ
아담샬 ㄷㄷㄷ 금발검객이라..
금발검객에 카타나라니... 완전 판소에나 나올 법한 형태가 아닌가!
점점 흥미로워지네요... 재밌습니다!
카타나?? 왜 서양 선교사가 일본도를 들고 있었나요?
판타지 소설에 나올 법한 분이 실제로 있었다닝
아담 샬이 저런 모습을 보였었군요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