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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 안을 살펴보니 많은 사람들의 해골이 쌓여 있었어요. 유복이가 큰 소리로 불렀어요. “아버지!” 그러자 가득 쌓인 해골 가운데 하나가 데굴데굴 굴러 유복이 앞으로 왔어요. 유복이는 아버지 해골을 가슴에 안았어요. 다른 해골은 모두 따뜻한 양지쪽에 고이 묻었어요.
그림책에서 정승각은 유복이가 아버지의 해골을 가슴에 껴안는 모습을 클로즈업하고, 집으로 귀환하는 장면마다 유골 보따리를 그려서 유골 수습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권정생과 정승각이 유골을 다루는 손길에는 기존의 구전 설화를 뛰어넘는 섬세한 마음이 담겨 있다. 권정생의 『금강산 호랑이』에서 아버지는 『곰이와 오푼돌이 아저씨』의 주인공들이 이루지 못했던 소망을 성취한다. 가족에게 소식조차 알리지 못한 채 산속에서 해골이 된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집으로 귀환해서 아내를 만난다. 또한 권정생의 이야기에서 유골 수습은 개인적인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공동체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산속에서 백골이 된 채로 버려져 있던 많은 목숨들은 양지바른 곳에 고이 묻힌다. ‘원수 갚은 아들’ 유형에 속하는 많은 설화와 동화를 읽어 보았지만, 주인공이 다른 사람들의 유골까지 돌본다는 내용은 오로지 권정생 본에서만 찾을 수 있다.
(줄임)
권정생은 ‘원수 갚은 아들’ 유형의 구전 설화와 전래 동화가 지닌 문제점을 보완하고 새로운 내용을 첨가해서, 이 유형의 이야기가 지닌 매력과 가치를 잘 살렸다. 권정생의 『금강산 호랑이』에서 죽은 자와 산 자가 재회하고, 남성성과 여성성이 결합하고, 어머니와 아들의 갈등은 극복된다. 권정생은 옛사람들이 입말로 전승해 온 여성 산신의 위상을 복원하고, 무참하게 죽은 사람들의 유골과 유품을 수습해서 적절하게 장례를 치러 주는 우리 고유의 아름다운 풍습을 살린다. 권정생의 이야기가 아무리 훌륭할지라도, 그 이야기에 생명력을 불어 넣으려는 예술가 정승각의 정성과 노력이 없었다면 그 이야기가 빛을 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림책을 한 장 한 장 펼칠 때마다 어린이 독자들은 친구에게 놀림 당하면서 눈물을 흘리던 작고 연약한 유복이가 어떻게 늘름한 청년으로 성장해 가는지, 그 변화의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피나는 노력으로 남성적인 힘과 신기에 가까운 무술 실력을 갖게 된 유복이지만 거대한 호랑이와 맞닥뜨려서는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지를 정승각의 그림은 잘 보여준다. 기존의 '금강산 호랑이' 그림책은 유복이가 해골더미 속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처녀를 깨우는 모습을 담고 있지만, 정승각은 뜨거운 호랑이 배 속에 홀로 앉아 있던 아가씨가 기절한 유복이를 깨워서 장도칼을 주는 모습을 그렸다. 정승각의 그림은 유복이의 삶과 모험에 심리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어린 유복이를 놀리는 도깨비 같은 모습을 한 동네 아이들의 현란한 움직임, 캄캄한 동굴에서 광채를 발하는 원수 호랑이의 두 눈, 붉고 뜨거운 늪 같은 호랑이 배 속, 그 안에서 만난 유복이의 분신 같은 구원의 여성, 생명꽃이 피어나는 유복이와 아기씨의 결혼 따위의 그림은 유복이의 모험이 온전한 자기를 실현하는 내면 여행임을 넌지시 알린다.
권정생과 정승각의 『금강산 호랑이』가 주는 중요한 메시지는, 그 무엇보다도, 괴물을 퇴치하는 방법에 있다. 그들의 그림책은 기존의 설화나 동화와는 다른 메시지를 전한다. 우리를 괴롭히는 작은 괴물들은 총칼로 없앨 수 있지만, 찰나에 우리를 통째로 삼켜 버리는 거대한 괴물은 생명을 죽이는 총칼로는 없앨 수 없다. 그 괴물을 이기려면 죽음의 어둠 속에서도 홀로 깨어서 생명을 지키려는 여성성의 강인한 힘이 있어야 한다.
김환희, 「폭력의 서사를 넘어 – 권정생이 새롭게 고쳐 쓴 『금강산 호랑이』」 『창비어린이』 2017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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