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소사 대웅보전
산과 바다가 어울리는 풍치가 일품인 전북 부안군 변산반도 능가산에 있는 내소사는 전나무 숲길로 조성된 진입로가 풍기는 고즈넉한 분위기로 유명하다. 인근에 곰소만, 채석강, 적벽강 등이 있으며 최근에는 새만금방조제가 생겼다.
내소사는 백제 633년(무왕34) 창건된 유서 깊은 절이다. 임진왜란 때 대부분 소실되어 1633년(인조11년) 대웅보전(보물 제291호)이 중건되었다. 대웅보전 안에 있는 ‘백의관음보살좌상'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후불벽화로는 가장 크다고 하는데 황금빛 날개를 가진 새가 그렸다는 전설이 있다.
전나무 길과 더불어 내소사를 유명하게 하는 것은 대웅보전 꽃살무늬이다. 해바라기꽃, 연꽃, 국화꽃 등으로 장식한 창살무늬가 정교하여 많은 사람의 극찬을 받고 있다. 다음은 내소사 홈페이지에서 꽃창살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내소사 대웅보전의 꽃살은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가장 잘 표현한, 우리나라 장식무늬의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꽃살은 나뭇결 그대로에 도톰하게 살이 오른 것 같아 더욱 아름답다.”
“대웅보전의 절묘한 꽃잎 문살은 그 꽃잎이 한잎 한잎 살아 움직이는 듯하며 그 예술성은 다른 곳에서 예를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독특하고 여섯 잎 보상화를 조각하여 기묘하게 맞추어 나간 연속문양 솜씨는 더욱 신기롭다. 법당 안에서 문을 보면 꽃무늬 그림자는 보이지 않고 단정한 마름모꼴 살 그림자만 정갈하게 비쳐든다.”
고미술 전문가들이 내소사 문창살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문화재청의 설명을 보면 극찬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내소사의 설명처럼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대표적 장식무늬로 손꼽는 듯하다.
내소사 대웅보전 문
꽃살무늬 부분도
먼저 내소사 대웅보전이 중건된 1633년, 17세기로 눈을 돌려보자. 조선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청나라에게 시달릴 때였다. 1627년 정묘호란에 굴복하여 어쩔 수 없이 청나라를 형으로 모시기로 약속했지만 여전히 망해가는 명나라를 섬겼다. 이 같은 태도는 1636년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태종에게 항복한 이후도 마찬가지였고, 심지어 조선 유학자들은 명나라가 망한 후 수십 수백 년 지나도록 섬겼다.
서양에서는 14~16세기에 걸쳐 대변혁이 일어나 유럽이 세계사의 주역으로 자리 잡았다. 르네상스, 종교혁명, 대항해 시대를 거쳐 전 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17세기에는 시민의식이 향상되어 18세기에 일어난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을 향한 분위기가 무르익었으니 근대화 문턱이 이른 시기였다.
한편 17세기 유럽 예술은 바로크 양식이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바로크 예술의 특징은 고전적 양식을 과장하고 왜곡시키는 것이므로 추상적 기교가 등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예술도 근대화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바로크 시의 문학, 음악, 미술 등은 지금도 교과서 등에 소개되고 있다.
내소사 문창살을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이렇듯 세계적으로 근대화 물결이 일고 있을 때 만든 목조조각을 극찬하는 건 세계사적 시각에서 크게 뒤쳐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스친다. 17세기 내소사 꽃무늬가 그보다 1000년 전에 만들어진 아랍의 장식문양보다 뛰어날까? 또 그보다 2000~3000년 전에 만들어진 그리이스, 로마의 예술적 기교에 비교 가능할까? 그리고 그보다 4000년에 만들어진 피라미드 내부 장식보다 얼마나 뛰어나다고 생각하는가! 이집트 투탄카멘왕의 관 장식과 비교한다면?
내소사 꽃창살이 가치 있는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이 만들어진 전후 시기의 장식미술을 평가하고 연관성을 밝힌 후에, 내소사 꽃창살이 갖고 있는 위상과 고유한 미를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내소사 꽃창살은 단발에 그치고 있어 전후 미술과 연결되지 않고 있다. 물론 많은 문화재가 소실된 것이 주요 원인일 수는 있다.
내소사 꽃창살은 수묵화처럼 은은한 동양적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화려하게 채색된 조각에서 줄 수 없는 그윽함을 준다. 시대를 떠나서 뛰어난 작품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거기에 담긴 예술적 기교를 지나치게 과장하지 말고, 17세기 조선의 한 장인의 예술적 소양을 투영함으로써 그 시대가 추구했던 미에 대한 의식을 깨닫는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