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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영화 ‘명량’을 통해 바라본 신학적 문제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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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명량' 포스터 © 뉴스 M |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을 배경으로 만든 김한민 감독의 영화 ‘명량’의 기세가 파죽지세다. 최근 15일 만에 누적관객수 1200만 명 돌파라는 기록을 만들어내면서 한국 영화사를 새롭게 써내려가고 있다. 이곳 미주 지역에서도 지난 주 LA 개봉을 시작으로, 8월 15일을 기점으로 미국 전역 30여 곳에서 동시 개봉될 예정이다.
온 국민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명량’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다. 동양대 진중권 교수의 "명량은 졸작"이라는 폄하를 시작으로, SNS를 통해 다양한 반응과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일부에선 ‘명량’의 시대와 세월호의 아픔앞에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2014년의 현실이 닮았다며, 안전불감증에 의한 ‘대란’의 결과로 온 국민의 국가에 대한 무기력증으로 몰아간 현실이 2014년에도 그대로 재현되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또한 과거 천안함 침몰 원인으로 ‘좌파 군인 자폭 의혹’을 제기하며, "빨갱이 세력은 다 떠나야 한다”는 설교로 물의를 빚은 강남 순복음교회 김성광 목사가 지난 10일 영화 ‘명량’은 ‘국민을 단결시키는 영화’라고 추켜세우며, “종북좌파들이 <해적> 같은 영화를 보면 도둑놈들이 된다. ‘명량’ 이순신 영화를 봐야 한다”라며, "청와대 대통령도 청와대 직원과 함께 이순신 영화를 봤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목숨 바치는 이순신, 이순신 영화를 보자"라며 목사들의 낙후한 정치적 줄대기 발언으로 물의를 빚기도 했다.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은 구원 받았을까?"
몇해 전 가톨릭 신자였던 일본의 소서행장과 이순신 장군의 구원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군기로 붉은 비단 장막에 하얀 십자가를 그린 것을 사용했으며, 그의 휘하 병사들 다수도 천주교도였던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는 일본 예수교 보고서에 가장 뛰어나고 열성적인 신자였던 아버지를 둔 가톨릭 신자였다. 그래서 고니시는 가톨릭, 즉 기독교인이었으므로 구원을 받았지만, 이순신 장군은 비기독교인이었기에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문제로 논란이 있기도 했다.
그렇다면 ‘한국 역사에서 가장 존경을 받았다는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등과 같이 복음을 접할 수 없었던 분들의 구원론은 신학적으로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이순신 장군은 과연 구원받을 수 있었을까?’라는 주제를 영화 ‘명량’ 흥행과 때맞추어 몇 사람에게 의견을 물어 봤다.
남가주 교계를 중심으로 목회자들과 교수들에게 전화와 메일로 문의했고 좋은 의견과 조언을 받았다. 몇몇은 ‘민감하고, 별 의미 없는 주제’라는 이유로 입장표명을 거부했고, 의견은 제시하되 기사화하지 말아달라는 요청도 있었다.
취합한 의견 중에 세 사람의 견해만 정리해 봤다. 구원론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견해를 들어보려는 취지로 준비한 기사이므로 댓글을 통한 다양한 의견제시는 환영하지만, 이단 재판소와 같은 의견은 사양한다(여러 오해가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견을 제시해준 세 분께 감사드립니다. 따라서 편집부 판단으로 본 글의 취지와 상관없다고 생각되는 댓글은 예고 없이 삭제합니다).
<김세윤 교수> (풀러신학교)
“일반 계시와 일반 은총의 범주 안에서 생각해야 한다”
▲ 풀러 신학교 김세윤 교수 © <뉴스 M> |
이순신 장군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의 구원 문제는 원칙적으로 일반 계시, 일반 은총의 범주 안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분들이 각자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자연과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주시는 계시에, 자신의 양심에 새겨주시는 참됨, 의로움, 선함에 대한 의식과 요구에 얼마나 순응하여 살았는가, 그리하여 전체적으로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에 따라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다.
이때 우리가 특별히 유의해야 할 두 가지 진리들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둘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스스로를 계시하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이다.
이 말은 곧 아둔하고 죄 많은 인간인 우리 누구도 그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느니, 또는 구원을 못 받을 것이라느니 지레 판정하는 오만을 부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침해하는 죄를 범하는 행위이다.
우리는 이순신같이 아무리 영웅시되는 인간도(또는 심지어 그리스도인도), 그 사람의 삶을 속속들이 알 수 없다. 그리하여 그들이 과연 얼마나 하나님의 은총에 의지하고 그의 뜻에 합당하게 살았고, 또 얼마나 거스려 살았는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이 어떻게 판정하실지는 더더욱 모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 특히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일반 계시, 일반 은총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에 대해 너무 좁게 생각하거나, 비그리스도인들의 구원 문제 등과 관계하여 생각할 때는 그것을 사실상 무시해 버리는 경향을 많이 나타낸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아주 편협하게 인식하는 경향도 나타낸다. 하나님을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믿지 않고, 자신들과 같이 구원론의 몇 문장들을 복창하지 않으면 그냥 지옥에 보내는 무서운 분으로 인식한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독선이 강하고 타인들에 대해 정죄하는 태도를 많이 보이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의 운명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려 하지 말고, 다만 그들이 겨우 희미한 일반 계시와 일반 은총에 따라 사는 것보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온전한 은총을 덕입고 하나님의 환한 계시에 따라 삶으로써 구원을 확실히 받도록 열심히 전도할 따름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순신 같은 사람들의 운명에 대해 의문이 생길 때는 하나님께서 의롭고 자비롭게 심판하시되, 그들이 겨우 일반 계시와 은총에만 의지하여 살았던 것을 감안하여 복음을 아는 우리보다는 더 너그럽게 심판하시지 않겠나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말은 곧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온전하고 환한 하나님의 계시와 은총을 받아 이미 구원의 첫열매를 얻기까지 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과연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석 앞에 어떻게 설 것인가의 문제를 더욱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아무리 “예수를 구주로 시인한다”는 등 신앙고백을 하고 세례를 받고 교회 봉사를 오래 하여 장로가 되고 집사가 된 사람이라도 구원을 이미 따 놓은 당상으로 여기는 것은 구원파적 신념이지 성경적인 신념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목사도 되고, 대통령도 되고, 장관도 되고, 판검사가 되고, 사장이 되어서 도리어 자리를 이용하여 더 큰 속임수를 쓰고, 불의를 행하고, 약한 자들을 억누르며, 자신의 영달을 꾀하는 등 하나님이 아니라 사단의 종 노릇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은 한국 기독교계에서는 더욱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열심히 전도하되, 독선과 우월감과 패거리 정신으로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더 엄격하며 그들에게는 겸허하고, 측은히 여기며 너그러운 자세를 갖추고 해야 한다.
<김재영 목사> (ITS)
“성경적 기반이 희미하므로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 ITS 김재영 목사 © 뉴스 M |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교회가 없었던 시대에 있었던 사람들에 대해선 알 수가 없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불가지론자이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시는 일이다. 우리가 보기에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알려지지 않은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았던 주를 몰랐던 사람들의 구원에 관해서 하나님께서 과연 어떻게 판결하실지 우리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순신 장군은 우리 민족에게는 훌륭할지 몰라도, 일본 사람들이 보기엔 훌륭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보는 훌륭함이나 높은 도덕성은 우리의 인간적인 판단에 근거한 것일 뿐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판단하실 것이다.
또한 성경도 이런 부분에 대해 아주 희미하게 계시하고 있기 때문에 분명히 말할 수 없다. 로마서 1장에 나오는 자연인의 양심의 문제도 구원론적으로 쓴 건 아니기에 뭐라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 다시 말해 ‘이순신 장군을 모델로 한,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던 시대의 사람들에 대한 구원문제’는 토론이나 논쟁이나, 고민의 대상이 아니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자기 조상의 구원에 대한 관심 때문에 나온 이야기라는 것은 이해하지만,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 권위자가 된 것처럼 이야기하면 안 된다. 개인적으로야 그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면 좋겠지만,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서 뭐 하겠는가?
기독교를 전제했을 때에 성경적 근거가 되는 구절이 있거나 하면 좋겠는데, 이 문제에 대해선 성경적 기반이 너무 희박하다. 구원은 하나님의 일이기에 모르는 일에 대해 안다고 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정이철 목사> (앤아버 반석장로교회)
“천주교 등에서 주장하는 다원주의적 주장은 복음이 아니다”
▲ 앤아버 반석장로교회 정이철 목사 © 뉴스 M |
죄사함을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듣지 못하고, 믿지 않은 어떤 사람도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그 사람이 설령 아무리 자선이 많았고, 아무리 애국심이 투철하였고, 다른 사람과 조국과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 내어놓았다 할지라도 그것이 구원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지는 못한다.
인간의 아름다운 덕과 영웅적인 행위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이 아직도 남아 있음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아름다운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다른 종교인들에게도 그런 모습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타락했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어서 어떤 사람에게는 그런 선행과 덕행이 전혀 나타나지 않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탁월한 인간의 도덕과 의가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간이 구원받지는 못한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지구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천주교를 왜 조심해야 하는가 하면, 천주교는 기독교의 복음을 말살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선행을 통하여 우리가 다 구원 받습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때문인데, 이게 인류에게는 대단한 평화의 소식이다. 예수를 믿지 않아도, 심지어 부처를 믿어도, 다른 종교를 믿어도 선행을 통하여 구원받는다는 주장이다. 이러면, 이순신 장군, 을지문덕 장군,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 다 구원받는 것이 된다. 그러한 소식은 인류에게는 아주 멋진 복음이다. 그러니까 천주교가 이렇게 환영을 받는 거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죄사함을 위하여 대신 죽으신 메시아의 속죄의 피 제사, 십자가를 믿고, 그 십자가에 자기 영혼을 맡기라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모든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전도만이 영혼을 구원하는 유일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따라야 한다.
도올 김용옥 같은 사람이 기독교에 반발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한신대에서 신학을 했기 때문이다. 도올은 안병무 교수에게 신학을 배웠는데, 그는 민중 신학자이다. 민중신학은 예수님을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투쟁하는 분으로 믿는다. 그러니까 오늘날에도 가난하고 억압받고 사회의 그늘진 곳을 위하여 봉사하고 투쟁하고 헌신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라고 가르친다.
나 같은 사람을 그들은 보수주의자, 근본주의자라고 가르치는데,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흘림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죄사함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도올이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을 향하여 방송에서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된 겁니까? 성호 이익 선생에 의하면 기독교가 편협하다고 하던데...” 그러니까 김수환 추기경은 “적어도 우리 천주교에서는 예수를 믿지 않고, 하나님을 안 믿는다고 해서 지옥 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조상들도 참되게 살고 양심적으로 살면 누구든지 다 구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라고 공영방송에서 말했는데, 이게 오늘날 복음이 되는 거다.
그러니까 이 정도로 지금 잘못된 종교다원주의 복음이 복음이 되고 있다. 같은 민족이고, 선조로서 존경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으로서 구원받았다고 할 수는 없다.
-양재영 기자, 뉴스 M 2014년 8월 16일 기사
인간 이순신 궁금하다면 <명량> 대신 <난중일기>를... 희로애락 가감없이 기록
어떤 이순신 영화나 전기, 평전도 <난중일기>만큼 이순신의 진솔한 모습을 그려 낸 글은 없다. 영화 <명량>도 마찬가지. 정치적 목적으로 이순신을 영웅화하는 데 혈안이 됐던 군사정권은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의 인간적인 대목을 모두 지워 버렸다. 요즘 나온 <난중일기>들은 그나마 원문에 충실하다. 영웅이나 성웅이 아닌 인간 이순신을 엿볼 수 있다. <난중일기> 속 인간 이순신의 몇 대목을 가져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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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이순신을 보고싶다면 <난중일기>를 권한다. ⓒ wikipedia |
백성을 지키지 않는 나라, 나라를 버리는 백성들
'옥과의 향소에서 지난해부터 수군을 잡아서 보내는 일을 성실히 하지 않아서 도피자의 수가 거의 100여 명이다.'
이순신은 도망치다 잡혀온 수군들을 처형한다. 군율을 엄하게 지킨 것은 병사들을 전장에 붙들어두기 위한 고육책이다. 병사들이 전장에 머무는 것은 애국심 때문이 아니다. 전장은 곧 공포다. 적에 대한 공포, 죽음에 대한 공포. <난중일기>에 적의 수급을 베어낸 기록만큼이나 탈영병의 목을 베었다는 언급이 많은 것은 그 때문이다. 전장의 안과 밖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다.
"급히 적들의 돌아갈 길목으로 나가서 물길을 끊고 도망치는 적을 몰살하라"
"부산으로 가서 돌아가는 적들을 무찌르라"
무능하고 물정 모르는 임금은 그저 뜬구름 같은 교서만 내릴 뿐 군사나 무기를 보내지 않는다. 제 목숨 보전만 급급한 왕에게 전장에 보낼 지원군이나 무기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다. 전쟁 시작 20일도 채 못 되어 도성을 왜적에게 뺏기고 도주한 무능한 조정. 와중에도 부패한 관리들의 욕망에는 브레이크가 없었다.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원균이 '명나라 고관 송응창이 보낸 불화살 1530개를 나누지 않고 혼자 독차지하려 하고' 남해 부사 기효근 또한 '배 안에 어린 색시를 싣고 다니며 남이 알까 두려워한다'고 탄식한다.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해서도 예쁜 여인을 태우고 놀기까지 하니 그 사람됨은 말할 수 없다. 참으로 통분하고 한심스런 지경이다.'
이순신 혼자서 아무리 군율을 엄하게 한들 이탈하는 민심을 막을 도리가 없다. 징집된 백성이 무능한 나라의 군대를 피해 달아나는 것은 살기 위함이다. 죽음을 무릅쓴 탈주. 죽음의 공포보다 강한 것이 생에 대한 애착이다. 전란이 일어나자 임금과 관리들은 제 살길을 찾아가 버리고 백성들만 사지로 내모는 나라. 그런 나라에 목숨을 내놓고 싶지 않은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전쟁 중에는 탈영병만이 아니라 포로가 되어 왜군에게 협조한 백성들도 많았다. 나라가 백성의 보호자가 아니라 수탈자였으니 그리 된 것이다. 나라에게 백성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대상이 아니었으니 그런 것이다. 백성들에게는 나라나 왜적이나 다 같은 약탈자였다.
백성들이 의병에 가담해 왜적과 맞서 싸운 것 또한 왕조와 나라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왜적의 만행이 너무도 가혹해서였다. 지배세력은 전쟁 중에도 전란이 끝난 후에도 결코 그런 백성의 뜻을 알지 못했다. 전란 뒤 백성들은 더 이상 임금과 조정, 양반들을 두려워하지도 신뢰하지도 않게 됐다. 후일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임금과 조정이 남한산성에 갇히는 상황에 처해도 백성들이 의병을 일으키지 않고 수수방관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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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에서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는 이순신 장군 ⓒ CJ엔터테인먼트 |
굶주리다 못해 서로 잡아먹기까지 한 전쟁
1592년(선조 25년) 7월 7일, 전라우수사 이순신은 전라좌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의 부대와 합류해 한산도 앞바다에서 왜군의 배 70여 척을 격파하고 불태우는 대승을 거둔다.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1593년 수군 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긴다.
'가을 기운이 바다에 들어오니 나그네 생각이 어지럽다. 홀로 배 뜸 밑에 앉았노라니 마음이 몹시 산란하다. 달빛이 뱃전에 비치고 정신도 맑아져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어느덧 닭이 울었다.' (1593년 7월 15일)
'원 수사의 음흉하고 간흉함이 대단했다.' (1593년 7월 28일)
1592년 4월 시작된 왜군의 침략으로 한반도는 7년간 고통이 극에 달한다.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전라 좌수사로 부임한 1592년(선조 25년) 1월 1일부터 정유재란이 끝나가던 1598년 11월 17일까지 7년간의 기록이다. 마지막 일기를 쓴 이틀 후에 이순신은 절명한다.
옥포해전, 당포해전, 당항포해전, 율포해전, 한산도해전까지 해전에서는 연전연승을 거듭하던 이순신이었지만 육상의 패전 소식에는 속수무책이었다. 1593년 6월 29일 10만의 왜군이 진주성을 함락시켰다. 이른바 2차 진주성 싸움. 1592년 10월의 1차 진주성 싸움 때는 3800여 조선군과 성민들이 왜군 3만과 싸워 승리했다. 하지만 2차 진주성 싸움의 결과는 참혹했다. 성이 무너지자 왜군들은 성 안에 남아 있던 6만여 명의 조선 백성들을 창고에 몰아넣고 모조리 불태워 죽였다.
전쟁이란 그토록 무참한 것이다. 임진왜란은 칼에 베이고 창에 찔리고 총에 맞아 죽고, 불태워져 죽고, 굶어 죽고, 죽고, 죽고. 백성들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기까지 한 전쟁이었다. 전쟁 와중에 사람은 없다. 전쟁은 사람이 아니라 병사들이 하는 것이다. 전쟁에는 이쪽 사람도 저쪽 사람도 없다. 오로지 적군과 아군만 존재한다. 적을 이롭게 하면 아군도 적이 된다.
'훈도를 처형했다.'
'도망병을 처형했다.'
처형 당할 자들이 넘쳤다. 전쟁터에 사람이 설 자리는 없다. 대체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의 경계란 무엇인가. 이순신 또한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고뇌했다. 적과 탈영병을 가차없이 처형하고서는 어머니와 자식들 걱정에 날을 새고, 또 병사들의 고통에 눈물 흘렸다. 전장은 죽음과 삶의 경계였다.
'미역 60동을 따왔다. 군관 정사립이 왜인의 목을 베어 가지고 왔다.' (1594년 3월 23일)
'송한령이 대구 10마리를 잡아 왔다.' (1594년 11월 5일)
'견내량의 군사 방어선을 넘어서 고기잡이를 한 어부 24명을 잡아다 곤장을 때렸다.' (1594년 11월 12일)
'이날 청어 40두릅을 곡식과 바꾸어 사려고 이종호가 받아 갔다.' (1595년 11월 21일)
바다는 죽음의 바다이면서 삶의 바다이기도 했다. 둥둥 떠다니는 적군과 아군의 시체가 물고기와 조개의 먹이가 되는 바다. 그 바다에서 병사들은 동료들의 살을 먹고 자란 조개와 전복을 따고 물고기를 잡아다 굽고 국을 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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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 제승당 수루에 걸려 있는 이순신 장군의 시조 ⓒ 강제윤 |
머리는 가려웠고 심사는 외로웠다
이순신은 불안한 자신의 앞날과 어지러운 심사를 점술에 기대기도 했다.
'장님 임춘경이 와서 내 운수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1598년 5월 11일)
'선홍수가 와서 원균의 점을 쳤는데, 첫 괘가 수뢰(水雷) 둔(屯)인데 천풍(天風) 구(女后)로 변했으니 본체를 이기는 것이라 크게 흉하다고 했다.' (1597년 5월 12일)
감지 못한 머리는 늘 가려웠다.
'다락에 기대어 저녁나절을 보냈는데 심회가 언짢았다. 머리를 꽤 오랫동안 빗었다.' (1596년 3월 25일)
'닭이 운 뒤 머리가 가려워 견딜 수 없었다. 사람을 불러 긁게 했다.' (1594년 8월 5일)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원균과 부하 군관들에 대한 증오를 자주 토로하기도 하고 첩의 부정을 꿈에 보기도 했다. 이순신에게는 정실부인 상주 방씨 외에도 해주 오씨와 부안댁 두 사람의 첩이 더 있었다.
'초 1일 한 밤 중에 꿈을 꾸었는데, 나의 첩(부안 사람)이 아들을 낳았다. 달수로 따져 보니 낳을 달이 아니었다. 꿈이지만 내쫓아 버렸다.'
현실의 불안이 꿈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순신 또한 사랑을 잃을까 노심초사하고 질투심에 몸을 떠는 외로운 사내였다. '나라가 위급함에 처해 있는데 남해 부사 기효근이 어린 색시를 싣고 다니며 논다'고 분노하던 이순신 또한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술을 마시고 시를 읊고 수시로 여인들을 품었다.
'이날 밤, 으스름 달빛이 다락을 비치는데 잠을 들지 못하고 시를 읊으며 밤을 지새웠다.' (1595년 8월 15일)
'이날 달빛은 대낮 같고 바람 한 점 없는데 홀로 앉아 있으니 마음이 심란했다. 잠을 이루지 못해 신홍수를 불러 퉁소를 듣다가 밤 10시경에 잠들었다.' (1596년 1월 3일)
'개(介)와 함께 잤다.'(1596년 3월 9일)
'국화 떨기 속에 들어가서 술 두어 잔을 마셨다. 여진(女眞)과 잤다.' (1596년 8월 8일)
'광주 목사의 별실에 들어가 종일 술에 취했다. 최철견의 딸 귀지(貴之)가 와서 잤다.' (1596년 8월 19일)
통영 강구안 바다에 있는 거북선 ⓒ 강제윤 |
나라가 망해도 정신 못 차리는 고관들
이순신은 누구보다 원칙에 충실한 관리였다. 훈련원 봉사로 재직할 당시 자신의 상관인 병조정랑 서익의 인사 청탁을 거절했다가 후일 서익의 보복을 받았다. 재직 중 이순신은 서익의 모함으로 파면당했다. 먼 친척이었던 율곡이 한 번 찾아오라는 제의도 거절했다. 1591년 2월 서애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 좌수사로 부임한 뒤에도 원칙에 따라 모든 일을 처결했다.
이순신이 전투마다 승리를 거둔 것은 운이나 기적이 아니라 원칙의 승리였다. 왜군의 침략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음을 눈치 챌 수 있었으나 무능한 조정과 부패한 관리들은 임무에 태만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병사들에게 강도 높은 군사훈련을 시키고 총포 등 무기를 확충하고, 전함을 새로 만들거나 수리하고 거북선을 건조했다. 이러한 일들은 전쟁을 앞둔 군 지휘관이면 누구나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이었다.
이순신은 해야 일들을 마땅히 했으나 다른 관리와 지휘관들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전쟁에서의 승패를 갈랐다. 평상이든 전장이든 기적은 없다. 준비가 기적을 만든다. 하지만 전란을 겪고서도 조정과 관리들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송사가 진행 중인데 술과 첩, 심지어 자신의 딸까지 상납해서 위기를 모면하려는 관리도 있었다. 그에 대해 이순신은 단호했다.
'이른 아침 조계종(趙繼宗)이 현풍 수군 손풍련에게 소송을 당한 결과 마주 대면하고 공술하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가 갔다.' (1596년 2월 20일)
'날이 어두워질 무렵 영등 조계종이 소실을 데리고 술을 들고 와서 마시기를 권했다.' (1596년 2월 20일)
'밤 9시가 지나서 영등 조계종이 그의 딸을 데리고 술병을 들고 왔다고 하는데 만나지 않았다. 11시가 넘어서 돌아갔다.' (1596년 3월 23일)
전란 중에도 조정은 여전히 부패한 자들의 잔치판이었다. 이순신의 절망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을 듯하다.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다소에 따라 죄의 경중을 결정한다니 이러다가는 결말이 장차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이야말로 둘만 있으면 죽은 사람의 넋도 찾아온다는 것인가.' (1597년 5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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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과 한산도 제승당을 오가는 배 ⓒ 강제윤 |
-강제윤 기자, 오마이뉴스 2014년 8월 20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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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을 그린 영화 '명량'이 흥행 신기록을 세우고 있는 가운데 세인들은 세월호가 침몰한 울돌목 근처에서 이뤄진 명량대첩과 현 시국을 연결짓는가 하면, 신학자들은 이순신 장군의 구원문제를 재조명하고 있네요. 이 문제에 대한 김세윤, 김재영 교수, 정이철 목사의 각기 다른 의견을 들어봅니다. 김세윤 교수는 "우리는 이순신같이 아무리 영웅시되는 인간도(또는 심지어 그리스도인도), 그 사람의 삶을 속속들이 알 수 없다"고 말하는데, 오마이뉴스의 강제윤 기자는 때마침 난중일기에 부인 외의 여러 여인들을 품었다는 이순신 장군의 기록을 들어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조명해주고 있어 흥미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