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설거사(浮雪居士)는 신라 진덕여왕[재위 647~654] 때의 이름 높은 재가승이었다. 속성은 진(陣)씨이고, 속명은 광세(光世), 자는 의상(宜祥) 혹은 천상(天祥), 법명이 부설(浮雪)이었다.
흔히 인도의 유마거사(維摩居士), 중국의 방거사(龐居士)와 더불어 대표적인 3대 거사 중의 한 명으로 존숭을 받는 설화적 인물이다.
부설거사는 본래 신라 진덕여왕 초에 서라벌[경주]의 남쪽에 있던 향아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미 어릴 적부터 범상치 않은 면모를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다섯 살에 불국사로 출가했으며, 일곱 살에 원정스님께서 머리를 깎아주며 말했다.
“오늘부터 네 이름을 부설(浮雪)이라 하고 자를 천상(天祥)이라 부르라.”
불국사에서 수도에 정진해 경학(經學)이 높은 경지에 이르자, 날마다 그의 명성은 높아갔다. 부설거사가 활동하던 때는 신라의 의상(義湘), 원효(元曉) 등이 활약하던 시기로, 그런 명승에 가로막혀 종래에는 그에 대한 활동에 대해서는 구비 설화로만 전해 내려왔다.
하지만 부안의 월명암(月明庵)에서 17세기에 쓰인 <부설전(浮雪傳)>이라는 한문 필사본이 발견됨으로써 부설거사의 생애나 행적, 일화 그리고 그가 남긴 선시(禪詩) 등을 좀 더 알 수 있게 됐다. <부설전>에는 부설과 그의 도반 영조, 영희와 주고받은 게송과 부록으로 지금도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이런대로 저런대로 되어가는 대로[此竹彼竹化去竹]’로 시작되는 「팔죽시(八竹詩)」 등 부설거사가 지었다는 몇 편의 시가 실려 있다.
승려 부설은 불법에 뜻을 같이 하는 두 친구인 영조(靈照), 영희(靈熙)와 함께 수행 정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설은 도반 영조 영희와 함께 의논했다.
“영남의 인심은 취득한바 오래니 팔도를 유람하며 선지식을 찾아보는 게 어떠한가?”
“좋은 말이나 나가면 고생이 앞설 것인데 괜찮겠는가?”
“공부는 고생을 스승으로 삼는 것이다. 스승 밑에서 어리광만 부리지 말고 독립심을 길러 새가 하늘을 날아가듯 자재심을 길러보자.”
그리하여 세 사람은 뜻을 같이 해 바랑 하나씩을 짊어지고 남해를 거쳐 두류산(지리산)에 이르렀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더니 싱싱한 나무에 푸른 물이 가히 볼만하구나.”
그리고 구레 화엄사(華嚴寺)에 이르러 큰 선지식을 뵙고 4아함(阿含)을 비롯한 경전 공부에 많은 소득을 얻었다. 이윽고 장흥 천관산(天冠山)에 들어가 두문불출하고 선을 닦았다.
이들은 구도의 길을 떠나 두류산[지리산]과 장흥 천관산(天冠山)을 거쳐 전북 부안군 변산에 있는 능가산(楞伽山)에 들어가 묘적암(妙寂庵)을 세우고 오직 수도에만 몰두했다. 송홧가루에 연꽃열매를 먹으며 5년을 지내고 보니 온 몸에서 솔 향이 가득하고 배속에 낀 티끌하나 보이지 않았다.
부설거사가 득도한 성지 ‘월명암
’불가에서는 산상무쟁처(山上無諍處)를 최고의 수행처로 꼽는다.
한마디로 산 위의 다툼이 없는 곳을 일컫는데,
불교적으로 풀면 뛰어난 경치와 땅의 기운으로 인해
스스로 번뇌와 분별이 끊어지고 가라앉는 장소를 뜻한다고 한다.
호남에서 손꼽는 3대 산상무쟁처가 바로
대둔산 태고사와 백암산 운문암, 그리고 변산반도의 월명암이다.
월명암 대웅전 부처님
약 1,300여 년 전 통일신라시대,
한 젊은 스님이 두 명의 도반과 함께 만행을 하며
김제 성덕면 만경뜰을 지나고 있었다.
이들은 폭우를 만나 재가신도인 구무원((仇無寃)이라는 사람의
집에 묵게 되고, 불심이 지극했던 구무원은
이들을 지극정성으로 대접하며 밤새 불법을 청해 듣게 된다.
구무원에게는 총명하고 미색이 뛰어난
19살의 묘화라는 벙어리 딸이 있었다.
그런데 이날 이 젊은 스님의 법문을 듣고
묘화의 말문이 열리는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그러자 묘화는 스님에게 전생에 풀지 못한 인연이 있으니
혼인을 해달라고 간청한다.
스님은 거듭된 거절 끝에 ‘보살의 자비는
곧 중생의 인연 따라 제도하는 것’이라 생각해 허락한다.
동행하던 도반 두 사람은 이 스님을 비웃으며 오대산을 향해 떠난다.
이 젊은 스님이 바로 부설거사다.
인도의 유마거사, 중국의 방거사와 함께
세계 3대 거사로 꼽히는 성인이다.
부설은 생전에 자신을 인품을 짐작케 하는 시를 한편 남겼다.
사람 사는 게 별거 아니라며
가느다란 대나무에 인생을 비유했다는 유명한 팔죽시(八竹詩)다.
대나무 소리 음운을 따라 ‘대로’
읽은 재치와 일상적 삶을 초탈한 경지가 엿보이는 선시라는 평가다.
此竹彼竹化去竹 (차죽피죽 화거죽)
風打之竹 浪打竹 (풍타지죽 랑타죽)
粥粥飯飯 生此竹 (죽죽반반 생차죽)
是是非非 看彼竹 (시시비비 간피죽)
賓客接待 家勢竹 (빈객접대 가세죽)
市井賣買 歲月竹 (시정매매 세월죽)
萬事不如 吾心竹 (만사불여 오심죽)
然然然世 過然竹 (연연연세 과연죽)
이런 대로 저런 대로 되어가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죽이면 죽 밥이면 밥 이런 대로 살고
옳으면 옳은 대로 그르면 그른 대로 보고
손님 접대는 집안 형편대로
시정 물건 사고파는 것은 세월대로
세상만사 내 마음 대로 되지 않아도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 대로 보낸다.
그 뒤 부설거사는 어떻게 됐을까.
부설은 묘화와의 사이에 아들 등운(登雲)과 딸 월명(月明)을 낳고
10년을 함께 산다.
그러던 어느 날 식구들을 모아 놓고 수도를 계속하겠다며
작별을 고하고 입산한다.
서기 691년(신라 신문왕 11년)의 일이다.
출가한 부설거사가 변산반도에서 두 번 째로 높은
쌍선봉(雙仙峰 498m)에 암자를 짓고 일념정진에 매진하니
바로 오늘의 월명암이다.
얼마 후, 옛 도반인 영조와 영희가 오대산에서 수도를 마치고
월명암으로 부설을 찾아왔다.
이때 부설은 질그릇 병 세 개에 물을 가득 채워 대들보 위에 달아두고
도반들과 더불어 도력을 시험한다.
그릇은 깨되 물은 흘러내리면 안 되는 조건이었다.
영조와 영희가 병을 돌로 치자 물이 아래로 흘러내렸는데,
부설이 병을 치자 병은 깨어지고 물은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이렇게 부설은 자신의 깨달음의 경지를 이들에게 보이고 나서
다음과 같은 열반송을 남기고 입적했다.
목무소견 무분별(目無所見 無分別)
이청무음 절시비(耳聽無音 絶是非)
시비분별 도방하(是非分別 都放下)
단간심불 자귀의(但看心佛 自歸依)
눈으로 보는 바가 없으니 분별할 것이 없고,
귀에 소리 없는 소식 들으니 시비가 끊긴다.
시비분별을 모두 놓아 버리고
단지 마음의 부처를 보았으니
내 마음의 부처에 돌아가리라
이러한 부설의 삶을 목격한 아들 등운은
훗날 유명한 조사(祖師)가 되었고
딸 월명도 수도를 통하여 깨달음에 이른다.
묘화부인 또한 부설원을 세우고 부설거사의 명복을 빌며 수행하다
110세에 고요히 입적한다.
그 뒤로 월명암에는 근대의 고승인 행암(行庵)·용성(龍城)·고암(古庵)·
해안(海眼)·소공(簫空)·서옹(西翁)·탄허(呑歔) 대종사 등이 주석하며 수행 정진했다.
월명암은 일제강점기 의병활동의 근거지로도 유명하다.
수난도 많았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해 전소되기도 했고,
6.25 전란 직전 여수 반란군에 의해 불타 사라지기도 했다.
또 월명암에는 부설거사에 얽힌 전설을 바탕으로 쓰여진
"부설전"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전라북도에서는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이 <부설전>을
도 유형문화재 제140호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