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웨슬레가 처음부터 별도의 교회를 창설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신앙운동이 영국 국교회 안에 수용되지못하고 배척됨에 따라 웨슬리는 1739년 4월부터 옥외집회를 시작했고 특히 탄광촌 공장지대 같은 소외계층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감리교가 정치적 조직을 공식적으로 갖추게 된 것은 1784년의 일로 그 때 웨슬레는 100인 회원으로 “메도디스트 (Methodist)라 불리는 사람들의 연회(年會)”를 조직하였다. 메도디스트란(Methodist) '규칙주의자'란 뜻으로 웨슬레를 중심한 감리회 모임의 철저한 규칙적 신앙생활을 보고 외부에서 붙였던 칭호였는데 그대로 교파 명칭이 되었다.
1791년 웨슬레의 사망 후 연회와 지역교회와의 관계 국교회와 관계 문제로 어려움이 있었으나 1795년 <화평안>이 마련되면서 국교회에서 독립된 교단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 제도의 교리적 문제로 몇 차려 분열을 겪었으며 1797년의 개혁감리회, 1801년의 독립감리회, 1810년의 원시감리교회, 1815년의 바이블 크리스천파, 1835년의 웨슬레감리회, 1849년의 웨슬레개혁파가 생겨났다. 교단 분열 후 19세기 말 이들 감리회 교파들 사이에 일치운동이 전개되어 1907년에 연합감리회가 이루어졌고, 1939년에 이 연합감리회와 기존의 웨슬레감리회와 원시감리회가 합하여 영국 감리교회가 형성되었다.
▩ 미국 감리교회의 역사
미국의 감리교회 역사는 1784년 웨슬레가 코크(T. Coke)를 선교사로 파송한 것에서 비롯된다.
또한 코크가 감리사로 임명한 에즈베리에 의해 미국 감리교회는 영국에서보다 더 급속한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특히 독립전쟁 중에 국교회 성직자들은 영국으로 귀환했으나 감리회 선교사들은 계속 남아 활동하였고 영국 감리교회와 다른 미국 감리회 전통을 수립하였다.
1844년 노예문제에 대한 논쟁이 벌어져 남북 감리회로 분열되었다가 1939년 다시 합동했으며 1968년에 연합복음형제파와 합동하여 연합감리회를 이루었다.
▩ 한국 감리교회의 역사
우리나라에는 1884년에 미(북)감리회의 일본주재 선교사 맥레이(R. S. Maclay)가 내한하여 고종의 선교 윤허를 받고 돌아간 것으로 감리교 역사의 기점을 삼고 있
다. 미감리회 해외선교부는 아펜젤러, 스크랜톤, 스크랜톤 부인 등을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이들은 1885년 내한하여 학교와 병원 사업부터 시작했다. 한편 남감리회는 개화파 인사 윤치호의 노력에 힘입어 1895년에 선교를 시작했다. 중국에서 활약하던 리드와 콜이어 등이 내한하여 서울 개성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처럼 별도의 선교부 배경을 갖고 선교를 추진했던 남 북 감리회는 1930년 12월에 합동하여 기독교조선감리회를 이루었다.
해방 후 교회의 친일문제로 교단이 ‘재건파’와 ‘부흥파’로 양분되다 1949년에서야 통합된다. 그러나 1954년 교회헌법 수정을 놓고 ‘호헌측’과 ‘총리원측’으로 분열됐다가 1959년 재통합하게 되었고, 1974년 감독선거를 둘러싸고 정치적으로 ‘갱신총회’, ‘연합총회’, ‘중부중립’ 등 3개파로 분열된 후 1978년에 재통합해 현재의 ‘기독교대한감리회’를 형성했다. 기독교대한감리회는 2007년 6월 현재 1개 총회와 11개 연회와 216 지방회로 구성되어 있다.
이 외에 미국의 자유감리교회와 연관을 맺고 있는 예수교대한감리회가 있으나 교세는 약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