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가장 기묘하고도 섬세하게 조제된 약이며 아주 쉽게 손상되는 약이다. 당신은 대체에 의해 복음을 손상시킬 수가 있다. 당신이 단지 성경이 믿음에게 제안하는 중심 대상, 곧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의 눈에서 물리치기만 하면, 그리고 그분의 자리를 대신하여 다른 대상, 곧 교회라든가 성직, 고해, 세례, 혹은 성찬식 등으로 대체시키기만 하면 복음은 완전히 손상된다!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이렇게 해보라. 그리하면 당신의 신앙은 더 이상 복음적이기를 중단할 것이다.
당신은 복음에 무엇인가를 더하여 그것을 손상시킬 수가 있다. 당신의 믿음의 중심 대상인 그리스도와 동등한 존중의 대상으로서 다른 어떤 것들을 덧붙이기만 하면 잘못은 이미 행해진 것이다. 그리스도에 다른 어떤 것을 첨가해 보라. 그리하면 복음은 더 이상 순전한 복음이 아니다! 당신은 무엇을 삽입하여 복음을 손상시킬 수가 있다. 당신은 불균형에 의해 복음을 손상시킬 수가 있다. 당신은 혼동되고 모순된 방향들에 의해 복음을 손상시킬 수가 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혼동되고 무질서한 진술들은 거의 아무런 진술이 없는 것만큼이나 나쁜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신앙에 있어 어떤 것과 다른 것 사이에 있는 차이를 전혀 알아볼 수 없는 상태에 있으며 이로 인하여 계속 길을 잘못 들고 있다. 설교들 간의 명확한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 상태에 있으며, 단지 “때로는 모두가 옳지만은 않다”라는 애매한 개념만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
의사의 처방약은 그것을 신뢰하며 곧이 곧대로 사용하는 데 그 가치가 있다. 한 성분을 빼내고 다른 성분으로 대체해 보라. 그리고 한 성분의 양은 조금 줄이고 조금 높여 보라. 처방한 약을 손상시킬 수 있는 수 없이 많은 방법이 있는 셈이다. 그리하여 당신의 건강을 위한다는 의도로 당신은 완전히 독약으로 바꾸어 놓게 된다.
복음을 무궁무진한 기술과 능력을 가진 의사되는 분에 의해 인간의 영적인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하늘에서 보내진 약이라고 간주해 보라. 그것은 독특한 효험을 가진 약이며 인간이 그의 온갖 지혜를 다하여도 결코 고안해 낼 수 없는 약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처방을 손상시켜 보라. 당신은 그 효력도 손상시키게 될 것이다. 그 균형 잡힌 비율을 준수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무익할 뿐이다.
놋뱀 사건도 귀중한 예증이다. 바라보는 자에게 건강을 가져다 준 것은 놋으로 만든 뱀이었다. 놋으로 만든 제단이나 아니면 뱀이 매달린 장대를 바라보는 편이 현명하리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상처를 그대로 지닌 채 죽어갔을 것이다. 뱀을 직접 만지거나, 그것을 제물로 바치는 편이 더 나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대신 바라보라고 명령했다면 소용 없었을 것이다. 보는 것, 단지 보는 것만이 처방이었다. 고통 받는 자 자신의 눈으로 스스로 바라보아야 했다.
“복음주의적인 신앙”, 실제적으로 좋은 신앙은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여 주신, 그리고 사도들에게 설명하여 주신 복음, 온전한 복음, 오직 복음이어야만 한다. 오늘날에 있어서 소위 신앙이라고 일컬어지는 상당수의 것이 내게는 파손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8).
중대한 질문은 우리 개신교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나는 복음적인 교파에 의해 취해지는 행동노선과 태도에 많은 것이 달려 있다고 믿는다. 만일 그들이 이 시대를 분별하고 저희의 의무를 다한다면 교회는 희망이 있는 셈이다. 만일 그들이 소심하여 두려워하며, 태만하며,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며, 이리 저리 흔들리며, 무관심해 한다면 희망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앙이 완전하고 철저하게 복음적인지에 대해서 주의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명확하고, 단호하며, 확실하고, 결정적인 교리의 기독교와는 참으로 친숙하지 않다. 모호한 자유주의의 안개가 교회의 시야를 두루 덮고 있다. 모든 사람이 옳으며 아무도 틀리지 않다. 모든 것이 참되며 틀린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우리는 도처에서 보게 된다. 세상은 신앙에 대한 그릇된 자비의 악마에 사로잡혀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의 선한 길, 그 옛적 길에 굳게 서기로 단호히 결심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그 길을 편협하고, 구식이며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일컬을지도 모르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은 우리에게 결코 더 나은 길을 제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가 죽음과 심판과 영원이라는 크나큰 실제에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그 길은 더욱더 훌륭하게 보일 것이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고(갈5:9),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해야 한다(마16:6).
목적이 결코 부당한 수단들을 정당화시키지는 못한다. 그릇된 압력에 의해 숭고한 원리의 토양을 떠나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방식을 고수해야 하며 단순성으로부터의 이탈에 대하여 예민하게 경계해야 한다. 성경, 그리스도의 십자가, 단순한 기도와 찬양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예배자들은 거의 무익한 자들이다. 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애쓰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영적인 취향은 병이 들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교리에 있어서나 예배에 있어서나 복음의 단순성으로부터 스스로 이탈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허용한다면 우리의 영혼에 막대한 손상을 입힐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등대지기가 불빛의 밝기를 조금만 변경하여도 난파로 인해 잃어버려질 생명들이 얼마가 될 것인가? 약간 잘못된 지도, 부정확한 해도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참사가 일어날 것인가? 오래 된 단순한 의상을 걸친 복음주의 신앙에 새로운 옷을 입힘으로써 세상과 접하고자 시도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영적인 해악이 어떠하겠는가?
신앙은 막대한 노력과 힘 있는 투쟁에 의해서만 우리 가운데 보존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나라를 위하여, 우리 자녀들을 위하여, 세상을 위하여, 우리 하나님의 영광과 존엄을 위하여, 우리의 정신을 무장하고 투쟁할 것을 결심해야 한다.
- 존 라일, 『오직 한 길』, pp 45-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