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1년 3월 포졸들에게 잡혀 끌려가는 궁녀 강경복 수산나. 폐궁인 양제궁의 나인으로 산 강경복은 같은 폐궁 나인 서경의의 밀고로 주문모 신부를 숨겨준 사실이 들통 나 순교의 화관을 쓴다. 그림=탁희성
1786년 양인 집안 출신으로 궁녀가 돼 양제궁에 살던 강경복은 1798년 송 마리아에게 천주교 교리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신앙을 권유받는다. 이때부터 그는 다른 궁녀들과 함께 교리를 배우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특히 송 마리아와 신 마리아, 강완숙(골룸바, 1861~1801)과 함께 주문모 신부가 집전하는 미사나 신앙집회에 참석하곤 했다. 그러다가 주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난 이후로는 더욱 열심히 신앙과 교리를 실천하며 살았다.
1801년 2월 신유박해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 주 신부는 노비 남구월의 안내를 받아 양제궁으로 피신한다. 이때 강경복은 어머니 집에 다녀오다가 우연히 '포졸들이 천주교 신자들을 찾으러 다닌다'는 말을 듣고는 급히 양제궁으로 돌아와 이 소식을 전한다. 이에 주 신부는 양제궁을 빠져나와 다른 곳으로 피신하는데 성공했지만, 강경복은 양제궁을 몰래 떠나와 피신하던 중 그해 3월 16일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만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강경복은 즉시 문초와 함께 형벌을 받는다. 그는 갖는 형벌에 굴하지 않고 "이미 천주교에 깊이 빠져 있으므로 비록 죽음을 당할지라도 마음을 바꿀 수는 없다"고 고백한다.
포도청에선 상급 재판부인 의금부로 이송, 그에게 더욱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내리게 한다. 이때 그는 정신이 혼미해져 "다시는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진술한다.
의금부에선 이 진술을 듣고 그를 형조로 내려보냈으나 강경복은 형조에서 크게 뉘우치면서 다시 신앙을 굳게 증거한다. 박해자들이 주 신부를 밀고하고 마음을 돌이켜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는 이제 신앙을 위해 형벌과 죽음을 달게 받을 각오가 돼 있었다. 이윽고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다.
"저는 천주교를 올바른 도리라고 생각해 양제궁에 살면서도 주문모 신부님을 찾아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후 천주교 신앙을 믿는 마음이 갈수록 굳어져 왔으니 형벌을 당해 죽는다고 할지라도 조금도 신앙을 버릴 생각이 없습니다."(이기경 「벽위편」 권2, 「사학징의」 권1) 마침내 그는 강완숙 등 동료 8명과 함께 사형판결을 받고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한다. 그의 나이 40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