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강 원효의 16년, 18년 36년
주체세력 승가에 힘이 있어야 불교계 학자들과 재가자도 힘이 생깁니다.
사마타 위빠사나는 지관!
세친과 원효는 사마타 위빠사나가 지관이며 지관에 대해 설명을 상세하게 하였으며
원음인과 더 가까운 시대의 사람이라 정확하게 소통이 되었습니다.
내가 열심히 번역을 하고 해설하여 책을 내는 것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입니다.
내가 만족하고 너무 재미있고 너무 좋아 세상에 알리고 싶어 책을 내며,
스스로 충분히 만족하고 여러분들이 더 쉽게 이해하여 소통할 때까지 할 것입니다.
만약 원효를 연구하지 않고 불교가 없으면 나의 생명도 없습니다.
원효의 저술 해설은 일차적으로 <경>에 대해 먼저 하겠습니다.
<보살계본지범요기>와 <원효성사>를 출판했고 다음은 <법화경종요>를 하겠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두 권을 어떻게 썼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래전부터 원효의 자료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
이리 만지고 저리 만지고 오랫동안 주물럭 주물럭거리다 갈피가 잡혀
유년기 16년, 출가생활 18년, 환속(원효성사) 36년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학자도 아닌 제가 이렇게 하면 학자들이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앞으로 원효를 더 연구하는 사람이 많이 나올 것입니다.
“원효는 파계승이 아닌 위대한 대승보살”
역사적 사명을 띠고 열심히 증명해야 합니다.
원효는 파계를 하지 않았으며 34살에 환속하여 초계사에 오랫동안 살았다는 것 등
분황사에 오래 살았다는 기록은 없고 분황사에서 <화엄경>을 저술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출가생활 18년과 환속 36년 동안 살았다는 기록이 없는데 분황 원효라는 것은
열반하기 전 이미 원효는 ‘백성이 나의 스승이다.’라며 괴로움이 많은 백성의 멍에를 벗어나도록 인도하고
함께 안락한 삶을 위해 바쁘게 그들을 찾아가 위로하고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백송이라 칭하며 따랐다.
원효가 열반한 뒤에 유해로 소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셔졌고
36년은 보살의 삶이였기에 성사를 뵙고 싶고 그리울 때 분황사를 찾아 공경하였을 것이며
많은 사람들의 입으로 입으로 분황 원효라 하였을 것이다.
고선사 서당화상비는 열반 후 144년이 지난 후에 세워졌고
분황사 화쟁국사비는 500년 후에 원효의 명성이 많이 나왔을 때 원효를 추종하는 의천은 왕자로서 원효의 비를 고선사나 작은 사찰에 세울 수 없는 입장이라 <화엄경>을 썼다는 기록도 있는 경주 중심사찰 분황사에 비를 세웠습니다.
예로 내가(정목) 죽으면 오룡골에 조그만 비를 세웠어도 100년 후 쯤에 재조명 되어 명성이 높아지면 범어사에 큰 비를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고선사서당화상비’는 ‘서당’이라는 아명을 쓰고 고선사에 비를 세웠고
‘분황사화쟁국사비’는 500년 후 의천을 중심으로 원효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사료도 모으고 화쟁국사라는 칭호도 받아 힘 있는 그런 분들이 주최가 되어 세운 비라 명분도 있고 웅장했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깨달아 <화엄경>을 집필할 때 글을 쓰다 중단한 이유 2가지를 들고 있는데
첫째 : 죽일 것 같은 화살을 그를 향하여 비난이 쏟아질 때 제40권 회향품에서 절필했다하고
둘째 : 회향을 해야겠다고 하여 붓을 놓았다고 하는 것이다.
회향을 해야겠다고 붓을 놓을 때라면 나이가 55~60살쯤 될 것이고
비난을 많이 받아 글을 그만 둔 때라면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으로 보는데
(정목생각으로는) 화엄경을 쓸 때는 머리를 굴려 쓰는 것이 아니라 만법을 깨달아 몸이 붕붕 뜨면서 흥분하여 그 때 써야 글에 생명력이 있다.
아마 그 때 썼을 것이다.
많이 완숙하여 천천히 글을 쓴다면 생명력이 없다.
또 원효의 깨달은 나이를 논할 때 34살과 45살이다.
첫째 : 34살에 깨달았다고 보는 것
650년 봄에 유학 1차시도 실패하고 6월에 보덕 아래에서 3개월 공부했으나 부족하여
10월에 유학 2차시도 중 깨달았다고 봅니다.
34살 가을에 깨달았으나 얼마나 비난을 받았으면 겨울에 집으로 환속했을까?
승가에서 집으로 가는 것을 6개월 이상 고민하는 것은 도의 기질이 없다.
원효는 출가해서 주목을 받을 대상이 아니었다.
황룡사로 출가했다는 것은 <송고승전>에만 있지 기록이 없다.
누구에게 어떤 스승에게 출가하여 본명은 무엇이며 계를 누구에게서 받았다는 기록이 없다.
출가하여 분황사에 조금 머물다 조금 떨어져 있는 고선사에 갔다.
고선사에서 사복과 왕래했다는 기록이 있고 백송이라는 기록도 고선사에 머물 때다.
고선사에 비를 세웠다는 것은 고선사에 많이 살았기 때문이다.
사복이 자기 어머니 장례를 부탁하려면 30세쯤은 되었다고 보며
16세 출가하여 30세 무렵까지 살았다고 본다.
고선사를 근거지로 대략 15년 쯤 정진 수학하다
세상 밖으로 나와 혜공. 대안. 낭지. 보덕화상을 친견하여 공부를 점검 받았다.
650년 6월은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합니다.
고구려에서 보덕화상이 내려 온 것이 역사적 사실이며 650년 6월까지는 공부를 배우려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한번 깨달은 사람은 다시 구법의 길을 걷지 않는다.”
둘째 : 45살에 깨달았다고 보는 것.
<송고승전> -신라국 의상전-에 ‘661년 상선에 의지하여 동주 해안에 도달하여 관아를 지키는 일을 맡은 한 믿음직한 분의 집에 이르렀다.’
한국 불교계에서 661년 원효와 의상이 함께 유학을 시도하다 원효는 깨달음을 얻고 의상은 홀로 당나라에 들어갔다고 말한다.
신라에서 유명 인사를 다 만나고 고구려에 뛰어난 보덕화상을 만나 수학하였으나 미진하여 유학 2차시도 실패하고 다시 11년을 기다려 유학을 시도한다는 것은 도저히 도의 기질이 없는 보통사람입니다.
45살에 깨우쳤다는 것은 661년은 무열왕이 죽은 해며 그 때 유학을 간다는 것도 말이 안 되며 또 원효는 무열왕 시대에 요석공주와 결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최소한 45살은 아닙니다.
해골의 물도 중국에서 꾸며낸 전설입니다.
영명연수(904~976 북송)가 961년에 지은 <종경록>과 혜홍각범(1071~1128)이 지은 <임간록>에 의해서다.
원효는 중국에 간 적이 없으나 스승을 찾으려고 당나라에 와서 밤에 노숙하면서 무덤 속의 물을 마셨다 한다.
게송
심생고 종종법생(마음이 생겨나니 갖가지 법이 생겨나고)
심멸고 감분불이(마음이 사라지니 토감과 무덤이 둘이 아니다)
삼계유심 만법유식(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만 가지 법이 오직 인식이다)
심외무법 호용별구( 마음 밖에 법이 없으니 어찌 달리 구하려고 힘쓸 것인가)
일체경계 본래일심!
원효는 34살에 모든 것을 익히고 알아 <기신론 별기>까지 썼다.
원효가 승가 생활을 했지만 어디에도 공식적인 문서에 원효라는 이름이 하나도 없다.
서당이라는 이름은 아명임에도 고선사비에 서당이라 한 것은 승가의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며,
그 후 500년이 지나 다시 비를 세울 때 원효라는 이름을 익히 알고 있음에도 비에 원효라 하지 않은 것은
원효는 승가에서 사용하는 이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분황사화쟁국사비)
34살에 초개사를 지을 때 본가 집을 다 뜯어버리고 새로 절을 잘 지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선화상의 ‘지기’중에 전하여 말하기를
‘불법에 능한 자가 아홉 명이 있었는데 모두 대사라고 불렀다.
원효가 초개사에 있을 때 현풍을 돕고 칭찬한 대 목수들이 었다.‘라고 하였다.
9명의 대사이면서 대 목수가 집을 잘 지었다고 ‘현풍을 돕고 칭찬한 것’은 그들이 대문을 장엄하게 만든 것을 말한 것으로 본다.
기록이 만선스님 수첩에서 발견되어 전해 오는데 만선은 아남스님으로 640년에 열반하여 원효가 24살 때라 앞뒤가 맞지 않다.
세월이 많이 흐른 후 그 사람을 평가를 하여 비를 세울 때 비문에는 그 사람의 업적 삶을 함축적으로 하여 중요한 업적 삶과 사상을 기록한다.
원효의 사상에는 대표적으로 <십문화쟁론> <금강삼매경론> <화엄경소>가 있다.
해골을 보고 꿈을 꾸는 것은 유식이며
해골바가지 물을 먹고 아침에 깜짝 놀라는 것은 보통 사람
해골바가지를 만져보고 해골바가지 인 줄도 모르는 것은 바보!
발등에 불이 떨어져도 돌아볼 여유가 없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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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께 죄송하고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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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생생한 법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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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연의 은혜에 감사하고 보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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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깨달은 사람은 다시 구법의 길을 걷지 않는다.”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일심 광명 화신 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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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을 다시 세우고 다시 듣는 법문~
등잔밑이 어두워져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는,말아야지~
감사드립니다.
귀한 범분 전해주시는 보살님,감사드립니다.
아미타 아미타 아미타
유정해원명심님, 긴 글로 스님의 말씀을 알려 주시는 은혜에 감사합니다.
함께 하는 인연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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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해원명심 보살님 !
맑은 정신으로 공부하는 새벽 이 시간..
환희심으로 가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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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명심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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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해원명심보살님께 합장올립니다.
생생한 법문을 스님게서 면전에서 화답하시듯 옮겨주셔서 고맙습니다.
늘 세상을 밝히는 등불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 나무아미타불 일심광명화신 일체경계본래일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