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들은 손톱으로 자르고 끌로 파내고 사포로 문지른 목기를 갖고 싶어 한다.
전기톱으로 자르고 전동 대패로 말끔하게 다듬은 목기보다 더 좋아한다. 왜 그럴까?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나무의 결과 나무의 옹이와 목수가 얼마나 호흡을 했는가를
보고 싶기 때문이다. 나무는 자란 토양과 기후에 따라 단단하기가 다르다.
손 공구를 다루는 목수는 나무가 어디에서 어떻게 자랐는지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전기 공구를 쓰는 목수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나무가 얼마나 단단하던
전기 공구가 쉽게 자르고 갈아 버리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감탄하는 목수의 기예는, 목수가 나무의 삶과 자신의 삶을 나눈 결과일 것이다.
모든 기예가 그렇다. 뼈를 건드리지 않아 십구 년 동안 칼날을 갈지 않았다는
전설적인 소백정인 포정도 이렇게 말했다.
“저는 새로운 소를 만날 때마다 온 정신을 집중합니다. 땀이 나고 입술이 마를 정도예요.
소는 저마다 다 다르니까요.”
기예가 없는 삶은 단조롭다. 전기톱으로 나무를 자르듯이 단조롭고 획일적인 삶은
무의미한 느낌을 가져온다. 아름다움이 ‘의미가 있음’을 뜻한다면, 무의미란 곧
추함이 아닐까. …”
(「손톱으로 세 달」, 장주식, <어린이와 문학>, 2017년 6월호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