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벽원 갤러리기획전 4인전에 참여하며
2013.08.12
8월 26일 오후 5시에 오픈하게되는 삼청동 한벽원갤러리 기획전시회인 4인시각전에 전시할
한지에 자외선 경화염료 프린트를 하고 옻칠로 마감한 사진이 마침내 완성되었다.
처음 한지 프린트 옻칠 사진을 만들 생각을 하면서 알지 못했다가, 1차 옻칠을 하고 나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2012년에 젊은 사진가가 한국 전통 삶의 모습을
옻칠한 한지 위에 프린트를 해서 전시를 했던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내가 최초의 시도라고 생각했었는데, 비록 방법은 좀 다르지만 어쨌던 비슷한 작업을
했다는 것을 알고 '아~ 나뿐이 아니구나! 젊은 사람이 열린 발상을 했는걸!'하고 기특하게 생각되었다.
외국을 다니면서 사진을 촬영해보니, 우리 나라에서 만든 사진과는 표현되는 칼라와 톤이 달랐다.
처음에는 필름과 현상 문제로 여겼는데, 외국 갤러리에서 전시되는 각국의 사진들 모두가 칼라와
톤이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었다는 것을 알게되고, 분명 필름이나 현상이 아닌 다름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름대로 원인을 분석해보니 두가지로 정리되었다.
한 가지는 '빛'이다.
이론의 여지가 없이 빛의 근원인 태양은 어느 나라나 같은 태양이다. 그러나 그 태양빛이 대지 위에
떨어질 때 통과하는 상공은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다. 그 나라 대지의 수분 집적도와 구릉 형태와 산세,
그리고 강과 숲의 분포와 산업환경 등에 따라 대기의 습도와 먼지의 공기층 밀집도가 다르다.
그러기에 다른 공기층을 통과해서 내려오는 빛의 성질도 분명 달라진다.
그리고 다른 한가지는, 사진을 촬영하는 시간대가 작가마다 다르고, 대상으로 하는 피사체의 표면 휘도와
사진 구성과 사용하는 렌즈와 앵글, 필름 그리고 사진 속에 노광시키려는 빛의 방향성도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진가의 개인적인 정서와 그가 태어난 나라의 민족성과 깊은 관련이 있는 듯하다.
오래 전에 영국인 사진가 마이클 케냐가 우리 나라에 와서 강원도 동해안을 촬영해서 전시를 한 적이 있다.
그 후, 그가 촬영했던 장소에 우리 나라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많이들 몰려가서 사진들을 많이 만들었다.
마이클 케냐가 촬영한 사진보다 시각적으로, 테크닉적으로 더 멋진 사진들도 간혹 보였다.
프로와 아마추어가 같은 대상을 촬영한 사진의 가치를 논하기 전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필름과
같은 렌즈로 같은 시간대에 촬영을 한다 해도, 사진으로 표현되는 톤은 결코 같지 않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않된다.
같은 한국인일지라도 개인적 정서가 다르기 때문이다. 영국인 사진가와 한국인의 민족적 정서
혹은 감성이 다르다면 더욱 그 차이는 커진다.
물론 전업작가의 노출제어 방식이 아마추어와는 차이가 많겠지만...
위와 같은 원인에서 밝혀지는 것이, 사진의 칼라와 톤은 민족 정서와 개인의 감성(정서)에 의해
분명 다르게 표현되어 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던지 '정체성 확립"이 우선 넘어야 할 높은
산이라고 생각한다.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으면, 다른 사람과 정서, 감성 또는 감정이 어떻게 다르고, 본연의 자기 모습이
어떤 칼라와 톤으로 표현되어져야 하는 지를 모르게 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초보 사진가나 아마추어들이
기계적이고 테크닉적인 면에만 치중하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피사체 독점권을 선점하려고 바둥거리고...
전업 작가뿐만 아니라 사진을 진지하게 만드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분명히 구분되어지는 자신만의
사진 칼라와 톤, 구체적으로 말하면 '표현하고자 하는 칼라와 톤을 위해 "어떠한 피사체를 어떤 시간대의
어떤 빛, 어떤 렌즈와 필름과 노출제어 시스템, 그리고 프린트의 방법과 나아가 마무리 액자까지를
'촬영하기 전에 결정'하려고 애를 쓴다."
셔터를 누르기 전에 모든 결정을 하라고 하는 선각자의 말 뜻이 이것이다.
그리고 이런 결정이 자기 사진의 기준이 되어야, 사진을 만드는 전과정을 스스로 비교 평가를 할 수
있게 되고 잘못된 결과에 대해 그 원인을 밝힐 수가 있다.
아울러 예기치못한 결과를 분석해서 발전적인 계획을 수립할 수 있는 근거도 확보하게 되고,
이런 경험적 분석을 통해 다른 사람의 사진도 깊이 있게 볼 수있게 된다.
나는 파리에서 지내면서 5년만에 여러 가지 개인적인 갈등을 겪고, 외국인들의 작품을 다양하게 접하면서
한국인의 정서가 외국인들과 어떻게 다른가를 체험했고, 나아가 나 자신의 정서, 감정, 타고난 성격 그리고
욕망 등을 투명하게 발견할 수 있었다.
'껍질을 벗는다는 말의 의미'도 깨닫게 되었고, '열정은 어디에서 나오고' 자기 표현을 위해서 '목숨을 건다는'
말의 의미도 체험적으로 께우치게 되었다. 실제로 원하는 표현을 위해서 몸을 전부 내던지게 된다.
지극히 자연스럽게. 자신을 송두리째 내던지는 그 자체에 희열을 가지게 된다.
비록 참담한 결과를 얻고 너무나 자신이 한심해서 죽고 싶도록 괴로와하기는 해도...
내 삶을 내던지는 그 자체가 삶이기 때문이기에... 불어로 '셀 라 비'다.
결국 사진 작업도 삶의 한 방식이라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 이렇게 전부 내던지게 될까?
자기 표현을 생업을 위한 돈벌이로 생각해서? 아니면 타인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사회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
이런 마음을 먹는 즉시 그는 열정도 잃어버리게 되고, 자신의 본래 목적도 잃어버리게 되고,
경험에서 배운 소위 잘 팔리는 작품을 위해 자신을 버리고 테크닉만으로 일관하려고 하고, 기득권으로만
작품료를 책정해서 진짜 장사치로 전락하고 만다. 눈으로는 화려하게 보이고 뛰어난 테크니션으로 감탄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 자신은 잘안다. 그것은 가짜라는 것을...
억누룰 수없는 열정과 어찌할 수없는 몰입과 목숨까지 내던지려는 행위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생각할 때
자연스럽게 발산되는 것이다. 그것이 그 자신의 삶이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에고이즘, 나르시시즘이 되어야
가능해지는 행위다. 내가 돈이 있고, 작품을 산다면 이러한 사람들이 만든 작품을 잘 구별해서 살 것이다.
그 작품에서 '삶을 위해 피 토하듯 절규를 토해낸 행위'를 느끼고 전율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 거는 내 사진은 이런 과정 속에서 만들어졌다.
옻칠을 서너번씩 하다가 온 몸에 옻독이 올라 잠을 못잘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완성된 사진을 하나 하나
보면서 큰 기쁨을 가진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칼라와 톤이 제대로 나왔다는 것에 크게 만족한다.
나보다 누군가가 먼저 비슷한 방법으로 사진을 만들었다는 것도 내겐 아무런 제약도 부담도 아니다.
결과물은 전혀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삶과 나의 삶은 다르니까.
이제서야 첫발걸음을 내딛는다. 빨리 전시를 마치고 머리 속에서 꿈틀거리는 이미지를 만들고 싶은 열정이
억제할 수없을 정도로 뜨겁게 용솟음치고 있다.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고, 영원히 살것처럼 꿈을 꾸자!"